< 제89화. 실제 상황 (2) >
제89화. 실제 상황 (2)
연대장이 직접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인근 부대 여 기저기에 전해졌다.
이에 따라 1075대대도 대책에 나서야만 했다.
북한의 도발이 무서운 게 아니라 상급 부대에서 순찰을 도는 게 무섭다.
1중대 간부들은 당분간 연대장이 순찰을 거 같은 예상 시간 에 최정예 멤버들을 근무에 투입시킬 생각이었다.
이강진과 백우호, 김철을 따로 부른 것도 이런 계획의 일환이 었다.
행보관이 셋을 나란히 세운 뒤에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내일부터 너희가 당직을 좀 서 줬으면 하는데."
지금 가장 급한 게 바로 당직 근무자였다.
'상꺾' 이상의 선임급들이 최근에 로테이션에서 우르르 빠지 게 되었다.
이제 막 새롭게 당직 근무에 투입되기로 한 상병급들이 과반 수가 넘을 시점에 실제 상황이 터지게 되었으니, 1중대 간부들 입장에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무서운 게 아니다. 상급 부대에서 올 검열이 무서운 것 이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당직 근무자들의 힘이 필요했다.
원래 이강진, 백우호, 김철, 이렇게 셋은 이번 달부터 슬슬 당 직 근무자에서 이름을 빼기로 했었다.
이번 주에는 아예 이름조차 올라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 기 당직 근무를 서라니, 매정한 결정이었다.
물론 이건 행보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는 세 말년 병장들에게 이런 제안을 꺼 냈다.
"나도 염치가 있지, 너희들한테 맨입으로 근무 서 달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만한 보상은 챙겨 주마."
보상이라는 말에 백우호와 김철의 구I가 번뜩였다.
병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행보관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포상휴가 2일 치. 어떠 냐?"
"병장 백우호!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병장 김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미 두 사람은 행보관의 제안에 넘어가 버렸다.
김철은 그렇다 쳐도.
백우호는 문제가 있었다.
팔꿈치로 백우호의 옆구리를 툭 친 이강진.
"너, 오대기 차고 있잖아. 근데 당직을 어떻게 서겠다는 거 냐?"
"그거야 행보관님이 알아서 바꿔 주시지 않을까?"
행보관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직 근무자가 우선이니까, 오대기는 다른 병사로 대체하면 된다."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이강진뿐.
동기들과 이강진은 경우가 많이 달랐다.
굳이 포상 휴가가 필요 없다. 있어 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휴가도 전역 전까지 다 쓸 수 있을지 없을 지 장담을 못 하는 상황에서 이틀의 포상 휴가가 굳이 필요할 까?
천만에. 이제는 굳이 휴가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
행보관도 이강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이강진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1중대 에이스를 이대로 놓치기엔 아깝다.
물론 '명령이다.'라는 한마디만 있으면 이강진은 군말 없이 행 보관의 말대로 당직 근무를 설 것이다.
하나 이강진이 그동안 행보관에게 해 준 게 있는데, 그걸 다 무시하고 명령 한 마디로 퉁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결국 행보관이 먼저 칼을 빼 들기로 했다.
"이강진, 원하는 걸 말해 봐라."
포상 휴가 말고 원하는 게 있을까?
백우호와 김철은 상상이 잘 안 갔다.
고민하던 이강진이 행보관에게 확인 차원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말씀드려도 됩니까?"
"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다 들어주마."
최후의 통첩.
이강진의 입꼬리가 위쪽으로 향했다.
여태껏 이강진은 위기를 늘 기회로 만들어 왔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운상이에게 분대장을 물려주는 걸 허락해 주시 면, 군말 없이 당직 서겠습니다."
아직 딱 하나 남아 있던 이강진의 숙원!
바로 분대장 인수인계다.
행보관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오랫동안 이강진에게 분대장을 채우려고 했었건만,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행보관은 입을 굳게 다문 채 2분 동안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긴장감 때문에 행정반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뒤에 있던 소대장조차 침을 꿀꺽 삼키면서 이들의 신경전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행보관이었다.
"후우……!"
기나긴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이강진의 청원에 짧게 답했다.
"그래, 알았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대신, 넌 내일부터 바로 당직 완장 차라. 내일 연대장님이 오 실 가능성이 제일 크니까."
"예, 알겠습니다!"
연대장이 뭐가 무서우랴, 분대장 교체를 허락받았는데.
혹한기 때까지 저주와도 같은 초록 견장을 차고 있어야 하나 걱정이 많았던 이강진.
그러나 이 거래로 인해서 그런 걱정은 사라지게 되었다.
* * *
생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이강진은 기운상을 찾았다.
"운상아, 다음 주에 분대장 교체식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 둬 라."
"사, 상병 기운상. 그게 정말입니까? 행보관님이 죽어도 이번 달에는 안 바꿔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강진과 같이 생활관으로 복귀한 백우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대신 사정을 설명했다.
"강진이 이 녀석, 완전히 미쳤어. 천하의 행보관님하고 딜을 할 생각을 다 하다니. 난 진짜 오금이 저려 죽는 줄 알았다."
"왜, 그래도 성공했잖아."
"너니까 성공한 거지, 나였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엎드려뻗쳐 소리 나왔을지도 몰라."
그간 쌓아 온 이강진의 이미지 덕분에 원만한 거래가 이루어 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 대신 바로 내일부터 당직 근무를 서게 되었으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하루만 고생하면 되니까.'
하루 동안 빡세게 당직 근무를 소화하면, 앞으로 남은 군 생 활이 편해진다.
둘 중에 어느 것을 고를 것인지 택하라고 한다면, 이강진은 고 민할 필요도 없이 남은 군 생활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연대장이 기습적으로 1075대대 순찰을 나온다 해도 이강진은 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일을 대비해서 빡세게 준비해야겠군!'
연대장에게 털리지 않을 것!
이것만 잘하면 임무 완수다.
* * *
다음 날 아침.
이강진은 오전 9시에 맞춰서 당직 근무를 인수받게 되었다.
전번 근무자였던 황지운 병장에게 완장을 건네받으면서 물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 아, 하나 있습니다. 우리 부대 일은 아닌데, 요 근 처의 같은 사단에 속해 있는 보병 부대가 연대장남한테 다이렉 트로 털렸다고 합니다."
완장을 차던 이강진은 쓴웃음을 삼켰다.
"끔찍한 특이 사항이네."
"더 끔찍한 게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대장님이 자정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대비고 뭐고 할 시간도 없이 탈탈 털렸다고 합 니다."
그 부대가 얼마나 난리가 났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 상상하기 싫었다.
동시에 남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늦은 시간대가 방심하기 쉬운 시간이어서 그런 걸까? 일부러 그런 시간대를 노리고 부대를 기습 방문하는 상급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이강진 병장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지."
"근데 이강진 병장님은 누구하고 같이 근무 서시는 겁니까?"
이강진은 이제 막 정신없이 행정반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가 리 켰다.
어제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울먹였던 서광수 상병이었다.
"광수하고 서는 겁니까? 쟤, 당직 근무 서기 시작한 지 2주밖 에 안 될 텐데……."
"설 근무자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어. 그렇다고 내가 우호나 철이하고 같이 설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연대장이 반드시 오늘 안에 온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행보관은 최대한 전력을 분산시키기로 했다.
연대장이 올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날에 이강진을 배치하고, 그다음 날에 김철을, 셋째 날에는 백우호를 배치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직 초보 근무자가 섞일 수밖에 없었다.
서광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당직병 완장을 차기 시작했다.
"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나야말로 잘 부탁해."
이강진은 서광수와 당직 근무를 서는 게 처음이었다.
불안 요소를 하나 안고 가야 했다.
'내가 커버 치면 되니까.'
두 사람 다 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강진이 서광수의 부족한 부분까지 채워야만 했다.
같이 당직 근무를 서는 파트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눈여 겨봐야 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오늘의 당직사관은 누구지?'
이강진은 곧장 근무자 편성표를 확인했다.
부소대장? 통신반장? 아니면 행보관?
정답은 '소대장'이었다.
근무자 편성표를 보고 있던 이강진의 뒤로 소대장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내가 오늘 당직사관이야."
"병장 이강진. 예, 방금 확인했습니다."
소대장도 금일 당직 근무자들 못지않게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연대장에게 털려선 안 된다!
갑자기 소대장이 이강진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오늘, 잘해 보자!"
"예, 알겠습니다."
마치 이강진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하는 소대장.
상당히 부담스러운 아이 컨텍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이강진은 식당에 적혀 있는 암구호를 확 인했다.
'기러기, 등대라......
새롭게 갱신되는 암구호는 이렇게 점심 식사 시간에 식당으 로 내려와 확인하면 된다. 혹은 행정반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상급 부대에서 검열을 오면 거의 90퍼센트 이상으로 꼭 물어 보는 단골 질문이 있다.
암구호를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이건 반드시 확인한다.
이등병, 일병 때에는 빠싹하게 암구호를 익히고 다녔던 이강 진이었으나, 병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굳이 암구호를 확인하고 다니진 않았다.
암구호를 몰라도 간부들을 제외하고 이강진에게 뭐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년 병장의 특권 중 하나였다.
하나 그 특권이 연대장 앞에서 적용될 리 만무했다.
무조건 외워야 한다. 괜히 연대장 앞에서 트집이라도 잡히는 순간, 기껏 붙잡은 분대장 교체의 기회는 저 멀리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밥을 먹고 행정반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 12시 40분.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은 없네.'
연대장이 움직이고 있다면, 이미 이곳 1075대대로 연락이 왔 어야 했다.
잠잠한 것으로 봐선, 아직 연대장이 1075대대로 올 생각이 없 어 보였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저번처럼 뒷좌석에 몰래 타고 대대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이 거친 파도가 지나갈 동안 몸을 사려야 한다.
* * *
저녁 점호가 끝나고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이때까지도 1075대대는 잠잠했다.
늦은 시간에 서광수는 자신이 직접 탄 커피를 소대장과 이강진에게 한 잔씩 돌렸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가려나 봅니다."
"그러게."
소대장은 속으로 안심했다.
내심 연대장이 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조용히 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서광수도, 이강진도 같은 마음이었다.
나만 아니면 돼.
이런 생각이 다들 마음속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대장은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과하게 스트레칭을 했으나, 피로는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는 소대장을 보면서 이강진이 넌지시 제안했다.
"소대장님, 잠깐 눈 좀 붙이고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상황 걸 리고 나서 제대로 잠도 못 주무셨다고 하던데, 이번 기회에 잠 깐 자고 오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럴까……"
FM의 화신이라 불리는 소대장이 이렇게 대답할 정도다. 그만 큼 지금의 상황이 많이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중대장실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오기로 결심한 소대장.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키가 울리기 시작했다.
"통신보안, 1중대 상병 서광…… 자, 잘 못 들었습니다?"
서광수의 당혹스러운 반응이 이강진과 소대장을 바짝 긴장하 게 만들었다.
"왜! 뭔데?"
"연대장님 오셨어?"
키를 내려놓은 서광수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연대장님…… 안 오셨습니다."
"에이, 뭐야. 괜히 놀랐네."
"그럼 뭐였는데?"
이강진의 물음에 서광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단장님이 오셨답니다."
< 제89화. 실제 상황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