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0화. 견장을 떼다 (1) >
제90화 견장을 떼다 (1)
이강진의 휴가를 도중에 증발시켜 버렸던 북한의 미사일 도 발한때는 부대 전체가 시끌시끌할 정도로 큰일처럼 다뤄지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별 탈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그에 따라 1075대대도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상황이 해제된 뒤, 오랜만에 병사들은 총이 아닌 삽과 곡괭이, 톱을 들고 행보관의 지시에 따라 작업에 들어갔다.
굵은 땀방울을 몇 차례 흘리다 보니 오늘 하루도 금세 저물었저녁 식사 집합을 위해 사열대 앞으로 모여든 병사들.
당직사병이 나와 집합한 병사들에게 외쳤다.
"분과별로 식사하러 내려가셔도 됩 니다."
"아싸!"
병장들은 대열이고 뭐고 그런 거 없이 그냥 무작정 병사 식당 으로 달려 나갔다.
이강진도 마음 같으면 저들처럼 그냥 나 몰라라 하면서 뛰어 가고 싶었지만, 어깨에 달려 있는 초록 견장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인솔자 위치에 선 이강진.
"오와 열 맞추고. 출발."
이강진의 지시에 따라 1분대원들이 발을 맞춰 식당을 향해 걸 어 갔다.
뒤에서 같이 따라 걷던 백우호가 그런 이강진을 바라보며 물 었다.
"분대장 교체식, 언제 한다고 했지?"
"수요일."
"수요일이면…… 가만, 내일 아니냐?"
"맞아."
이강진은 씨익 웃었다.
하루만 지나면 이 지긋지긋한 분대장 견장을 떼어 낼 수 있 다.
중대장과 행보관은 혹한기가 앞당겨진 김에 그때까지 이강진 에게 분대장을 맡기고 싶어 했었다.
하나 당직사병을 두고 펼친 거래 때문에 이강진은 그 전에 분 대장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 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오히려 득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휴가 도중에 강제로 복귀한 건 여전히 이강진의 군 생 활 중 최악의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이강진은 기운상의 왼쪽 어깨에 팔을 올렸다.
"상병 기운상."
"운상아, 내일부터 네가 분대장이니까, 분대원들 아무쪼록 잘 통제해라.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평소의 기운상답지 않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긴장감 때문이었다.
설마 자신이 분대장을 차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분대장으로서 분대를 이끌어 가야 좋을지, 그 것 때문에 머릿속이 한창 복잡한 상태였다.
이강진은 그런 기운상의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했다.
"너무 중압갑 느끼지 마. 그냥 전투복 상의에 초록 견장만 다 는 것뿐인데, 뭘. 그리고 결산 회의에 꼬박꼬박 참가하고, 저녁 점호 때마다 생활관 책임자 하고, 분대원들 개인 면담 주기적으 로 진행하고, 또……. 음, 말하다 보니까 많아지네."
부담감을 덜어 내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분대장이 알게 모르게 하는 일들이 정말 많았다.
이강진은 자신이 여태껏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 왔는지 신기 하게 느껴졌다.
말만 들어도 귀찮은 일들뿐인데 말이다.
기운상이 걱정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분대장 교체식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예 상 못 했습니다."
빨라 봤자 혹한기를 받을 때쯤 어찌어찌 분대장을 물려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기운상.
그러나 며칠 전에 갑자기 생활관으로 들어온 이강진이 그에게 바로 다음 주에 분대장 교체식을 진행할 거라고 말을 했다.
사실 이때 기운상은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많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런 대비도 못 하고 갑자기 분대장을 덥석 물려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잖아. 분대장 교육대도 갔다 왔고. 안 그래?"
"그렇긴 합니다만……."
"괜찮아. 너라면 잘할 수 있어."
적어도 기운상이 간부들에게 탈탈 털릴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투스타의 아들을 간부들이 함부로 대하진 못할 테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 * *
화요일 저녁.
행정반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대장들은 지금 즉시 행보관실로 집합하도록.
오늘 당직사관인 통신반장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방송했다.
분대장 수첩을 챙겨 든 이강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1생활관을 나섰다.
이강진이 분대장 결산 회의에 참가하는 마지막 날이다. 이것 때문에 이강진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행보관실로 들어온 이강진은 후임 분대장들을 보면서 말했다.
"얘들아! 이 형, 내일 드디어 분대장 뗀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진짜 분대장 오래 다신 거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다음 분대장은 운상이 맞지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다고 대답을 해줬다.
분대장들은 쓴웃음을 흘렸다.
투스타의 아들이 1분대 분대장이다. 간부들조차 건드리지 못 하는 게 기운상인데, 병사들 중 누가 감히 기운상에게 먼저 시 비를 걸까.
만약 있다면, 그 병사는 남은 군 생활을 포기했다고 봐도 무 방할 것이다.
이강진은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후임 분대장들을 향해 웃음을 보였다.
"하하, 그냥 서로 친하게 지내면 문제 될 것도 없을 텐데. 편 하게 생각해, 편하게."
고단수인 이강진이 후임 분대장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 를 리 없다.
원래 분대장 중에서 군번에 가장 느린 막내 분대장이 제일 고 생하는 법이다.
심하면 지난번에 이강진이 당할 뻔했던 것처럼 다른 분과들이 서로 협력해 경고 카드를 특정 분과에게 몰아줘 그 분과를 죽이는 것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기운상이 분대장을 달면 이야기가 아주 많이 달라진 다.
이강진은 이런 것까지 전부 고려를 했다.
병사들끼리 한창 이강진의 분대장 교체식을 두고 잡담을 나 눌 때, 행보관실의 문이 열렸다.
"다 모였나?"
"예!"
행보관이 자리에 앉아 분대장들의 숫자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이강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강진."
"병장 이강진."
"얼굴이 아주 폈구나. 오늘이 마지막 분대장 다는 날이라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씩 웃는 이강진.
역시 행보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분대장 교체식을 무를 수도 없는 일. 행보관은 한 숨을 푹 내쉬고서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북한 미사일 도발 때 휴가 복귀 명령 받았던 병사들, 누구누 구 있었지?"
"병장 이강진!"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잽싸게 손을 들었다.
이강진과 김철을 포함해서 총 다섯 명이었다.
행보관은 수첩에 이들의 관등성명을 적은 뒤에 말했다.
"대대장님께서 강제로 휴가 복귀한 병사들에게 추가로 1박 2 일 포상 휴가를 붙여 주고 다시 내보내라고 하셨다. 행정분과가 일정 짜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분대장 교체식을 하게 된 것도 기쁜데, 여기에 더해서 휴가까 지 다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 이강진에겐 최고의 하루였다.
하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음, 혹한기 일정에 대해 말해 줄 테니 다들 받아 적어라."
이강진의 군 생활 마지막 시련인 혹한기가 남았다.
"날짜는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4박 5일 동안 진행될 거고, 훈련 내용은 작년에 받았던 혹한기와 비슷하게 갈 거다. 말년이 라고 훈련 제외시키고 그런 거 없으니까, 열외 없이 다 참가할 수 있도록 해라."
특히 마지막 부분은 이강진과 그의 동기들을 노리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이강진은 그런 기대조차 가지지 않았다.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처음에 예고되었던 그대로 1월에 혹한기 훈련이 진행되었더 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마무리가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오늘이 좋은 소식이 가득 한 하루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 * *
이강진이 그토록 고대하던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부로 이강진은 1분대 분대장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오전 집합을 위해 사열대로 모이게 된 병사들.
드물게 중대장이 오전 집합부터 병사들 앞에 섰다.
"전제 주목!"
"주목!"
중대장은 이강진과 기운상을 가리켰다.
"강진이하고 운상이, 앞으로 나오도록."
"병장 이강진!"
"상병 기운상!"
두 사람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특히 이강진의 목소리가 가 장 우렁찼다.
이제 견장을 뗀다는 기대감과 설렘 때문이었다.
중대장은 두 사람을 앞에 세워 뒀다. 그리고 확인 차원에서 물 었다.
"교체식 준비는 다 끝났나?"
"예!"
"이미 예행연습까지 다 끝내 뒀습니다!"
오전 집합 때 분대장 교체식을 가질 거라는 행보관의 말에 따 라 이강진과 기운상은 미리 리허설을 마쳐 뒀다.
이강진의 말을 듣고서 중대장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분대장 어지간히 떼고 싶은가 보구나."
"아닙니다! 더 달고 싶었지만, 이제는 후임에게 물려줘야 한 다는 점 때문에 아쉽기 만 합니 다!"
"그럼 좀 더 찰 텐가?"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병사와 간부 들은 이강진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빨리 분대장을 인수인계하고 싶다.
이게 이강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분대장 교체식은 빠르게 거행되었다.
이강진과 기운상이 순서대로 분대장을 인계, 인수하였다는 보 고를 마쳤다.
이제 분대장 교체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순서가 다가왔다.
바로 견장 인수인계다.
초록색 견장을 뗀 이강진은 중대장과 함께 기운상의 어깨에 각각 하나씩 견장을 직접 달아 줬다.
견장을 단 기운상의 모습에 병사들은 환호를 했다.
"견장 잘 어울리네!"
"축하한다, 운상아!"
"앞으로 1분대 잘 이끌어 봐라!"
기운상은 병사들의 축하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집합 때마다 분대장이 가장 앞에 서야 한다.
오늘 아침 점호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이강진이 1분대 대열 중에서 가장 앞에 섰었다.
하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강진은 백우호와 나란히 맨 뒤에 섰다.
원래는 신병이 들어오지 않는 한, 짬이 높은 순서대로 앞에 서 야 한다. 그러나 말년 병장들은 예외였다.
간부들의 눈에 띄기 싫다는 이유로 말년들은 맨 뒤에 서곤 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이강진은 맨 앞이 아닌 맨 뒤로 자리를 옮겼다.
백우호가 그런 이강진을 열렬히 환영했다.
"어서 와라, 강진아. 그동안 고생했어."
"땡큐. 드디어 나도 맨 뒤에 서네, 어휴!"
지금 이강진의 표정은 마음의 짐을 덜어 낸 자의 것과 같았
* * *
새로운 분대장이 된 기운상.
이강진으로부터 분대장 수첩까지 건네받고 나서야 그는 자신 이 정말로 분대장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분과 운영비는 여기 봉투 안에 들어 있고. 그리고 이건 이번 달 칭찬, 경고 카드. 칭찬 카드는 내가 며칠 전에 준형이한테 두 장 줬어. 그거 기억해 둬."
"예, 알겠습니다."
"개인 면담은 다음 달부터 시작하면 돼. 이번 달 건 내가 다해 뒀으니까."
"감사합니다, 이강진 병장님."
인수인계를 하려면 확실하게, 그리고 남아 있는 것 없이 깔끔 하게 해 둬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기운상뿐만 아니라 이강진도 고생한다. 그게 싫어서 철저하게 해둔 것이다.
이강진은 기운상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했다.
"그리고 궁금한 거나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부담 없이 나한테 말하고. 알았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힘내라."
이강진은 행보관이 따로 지시한 작업을 소화하기 위해 백우 호와 함께 막사를 나섰다.
혼자 남겨진 기운상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금 확인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기운상은 각오를 다졌다.
"열심히 해 보자!"
이강진을 뛰어넘을 만큼의 성과를 거두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기운상은 스스로 이런 목표를 설정했다.
적어도 분대장 일 못한다고 욕은 먹지 말자.
< 제90화. 견장을 떼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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