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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더니 입대 전날-285화 (285/347)

< 제91화. 외진 (1) >

제91화. 외진 (1)

오늘도 변함없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열심히 땅을 파고 또 파 는 병사들.

이들의 귓가에 행보관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렸다.

"말년들 어디 갔냐! 이강진! 백우호! 김철!"

어찌나 큰지, 멀리 떨어져 있는 병사들의 귀에도 행보관의 외 침이 들릴 정도였다.

혀를 차던 행보관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01 버러지 같은 놈들!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행보관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꼭꼭 숨어 버린 말년 3인방.

기운상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삼켰다.

아직까지 행보관에게 안 들키고 잘 도망 다니는 말년 3인방 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삽질을 잠시 멈춘 채 옷소매로 땀방울을 닦아 낸 성태강이 신 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백우호 병장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성실하던 이강진 병장 님까지 행보관님을 피해 어딘가에 짱박히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년 병장이 되면 다들 그렇게 되나 보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성실한 모습을 계속 보여 줬던 선임은 안 준렬뿐이었다.

하나 그 안준렬조차도 전역하는 마지막 주에는 어떻게든 행 보관의 눈을 피해 다니려고 애를 썼었다.

그 모습이 기운상의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말년 병장.

"근데 이강진 병장님 어디 짱박혀 계시는지 알고 있어?"

성태강은 기운상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다른 후임들은 알고 있을까?

일일이 붙잡고 물어봤지만, 이들도 성태강과 같은 대답을 들 려줄뿐이었다.

어디로 숨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역시 이강진 병장님. 짱박히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시군.'

괜히 1중대의 전설이라 불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행보관이 그토록 찾고 있는 말년 3인방은 1중대가 아닌 다른 곳에 숨어 있었다.

이강진이 말년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만들어 뒀던 대비 추악.

바로 PX다.

원래 PX는 관계자가 아니면 일과 시간에 올 수 없다. PX가 열 린 시간에 맞춰서 와야 이용할 수가 있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임이, 그것도 같은 분대의 상당히 친한 병사가 PX병 으로 있다면?

예외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PX에서 아이스크림 네 개를 골라 온 이강진은 그중 하나를 조은석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은석아. 덕분에 행보관님 피해서 편히 짱박힐 수 있 게 되었어. 자, 이건 보답이야."

"잘 먹겠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헤헤헤."

조은석 덕분에 행보관의 감시망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 게 되었으니 안심이었다.

이들은 조은석이 물건을 정리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PX 창고 구석으로 향했다.

접이식 의자가 두 개밖에 없었기에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 이 박스를 깔고 앉아야 했다.

"가위바위보!"

최종 패자는 김철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은 그렇게까지 억울 해하지 않았다.

PX에서 편히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까.

원래대로라면 이강진과 백우호만 이곳에 올 심산이었다. 그 랬는데 어쩌다 보니 김철도 여기에 끼게 되었다.

"너희 아니었으면 난 말년에도 행정반에서 계속 간부들 업무 뒤치다꺼리하느라 고통받고 있었겠지. 아무튼 고맙다. 역시 동 기밖에 없어."

이들은 신병훈련소 시절 때부터 서로 도우면서 이 험난한 군 생활을 헤쳐 왔다.

전역할 때까지도 이 협동심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백우호가 창고에 달려 있는 창문을 힐긋 바라봤다.

"행보관님 지금쯤 우리 엄청 찾고 있겠지?"

"그렇겠지, 뭐."

걸리면 바로 작업행이다.

어떻게든 말년 병장들을 데리고 작업을 하려고 기를 쓰는 행 보관.

반대로 말년 병장들은 행보관을 피해 도망 다녀야만 했다.

지금 당장은 피할 수 있다 치더라도.

나중의 일이 걱정이었다.

김철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휴가까지 어떻게 버티냐."

이강진과 김철은 북한 미사일 도발 때문에 강제로 부대로 복 귀한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행보관은 조만간 이들을 다시 휴가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 휴가를 나가기까지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

이등병 시절 때, 1백 일 만에 휴가를 나갔던 것에 비하면 일 주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등병 때의 1백 일과 말년 병장일 때의 일주일은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말년이 되니 시간이 오히려 안 간다. 그래서 더 미칠 지경이었다.

"강진아, 당당하게 작업 안 하고 생활관에서 쉴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어?"

"있으면 우리한테도 공유 좀 해 줘."

신교대에서 군대 척척 박사라고 불렸던 이강진에게 자문을 구 해보는 두 사람.

그러나 이강진은 도리어 쓴소리를 들려줬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이강진도 모르는 게 있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이강진은 이곳 PX에 숨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행보관님 피해서 재주껏 잘 도망치든가, 재수 없게 걸릴 거 같은 사이즈 나온다 싶으면 포기하고 열심히 작업 하든가. 그러는 수밖에 없지, 뭐."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오후 4시라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일과 시간이 종료되었다.

소대장이 병사들을 따로 사열대 앞으로 집합시켰다.

그는 이강진, 백우호, 김철 3인방을 보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행보관님이 그렇게 찾으실 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 니만, 일과 시간 끝났다고 하니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구나."

그들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딱히 이렇다 할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체육 활동 하고 싶은 병사들은 하고, 생활관에서 쉬고 싶은 병사들은 들어가서 쉬고 있어라. 단, 휴게실하고 공중전화 이용 은 개인 정비 시간에 해라. 알겠나?"

"예!"

"그럼 해산!"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흩어지는 병사들.

생활관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성태강이 이강진을 불렀다.

"이강진 병장님, 오랜만에 죽구 한판 어떻습니까?"

"멤버는?"

"제가 모아 오겠습니다."

자주 휴가를 나가다 보니 부대원들과 공 찰 기회도 현저히 줄 어들었다.

전역하고 나면 같이 죽구를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된다. 이강 진은 이 한정된 시간 동안 추억 만들기의 일환으로 성태강의 제 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간만에 한판 하자!"

"예, 알겠습니다!"

성태강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생활관으로 간 이강진은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사열대로 향했다.

그곳엔 성태강이 모아 온 멤버들 몇몇이 벌써부터 공을 주고받으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이강진은 그들에게 외쳤다.

"형 왔다! 패스!"

"하하, 알겠습니다!"

"공 갑니다!"

뻥!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축구공. 이강진은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 냈다.

오래간만에 만지는 축구공의 감촉에 이강진의 텐션이 상승했 다.

멤버들이 전부 나오기 전까지 이강진은 후임들과 미리 몸을 풀기로 했다.

"와서 뺏어 봐라."

이강진의 도발에 후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클라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세 명이 펼치는 압박 수비에도 이강진은 화려한 개인기로 이들을 가볍게 따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감한 슈팅!

이강진이 찬 죽구공은 시원스럽게 골망을 갈랐다.

"이강진 병장님, 실력 여전하시지 말입니다."

"이 정도야 기본이지."

후임들이 비행기를 태워 줘서 그런지 이강진의 동작은 더더 욱 과감해졌다.

원래 이강진은 축구 경기에 임하기 전에 항상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공을 찬다. 선수로 뛰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스트레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텐션이 너무 오른 나머지 그의 신념이기도 했던 스트 레칭조차 하지 않고 바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개인기를 펼치면서 후임들을 제치려고 하던 이강진.

그 순간.

발을 헛디딘 나머지 그대로 바닥에 옆어지고 말았다.

"이, 이강진 병장님!"

"괜찮으십니까?"

후임들이 놀라며 물었다.

너무 제대로 넘어졌다.

무릎과 팔꿈치에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 이건 약과였다.

"아야야야야!"

왼쪽 발목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활동화과 양말을 벗고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지켜보던 후임 몇몇이 헛숨을 삼켰다. 퉁퉁 부운 이강진의 왼쪽 발목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발목을 접질린 듯했다.

* * *

축구 시합이고 나발이고 이강진은 곧장 의무대로 향했다.

얼음찜질을 받으면서 의무병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발목이 많이 부으셨네요. 당분간은 심한 움직임은 자제하세 요."

"뼈가 부러지거나 그런 건 아니죠?"

"뼈 부러졌으면, 아저씨 걷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냥 좀 심하 게 접질린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모르니까 외진 잡아 드릴까 요?"

굳이 외진까진 필요 없을 거 같았다.

"아니요. 그건 필요 없……."

순간 이강진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가만. 외진 나간다고 하면 그날 하루는 행보관님 눈치 안 보 고 그냥 날릴 수 있잖아?' 좀 더 정밀하게 진단을 받고 싶으면 외진을 신청하면 된다.

1075대대는 일주일에 하루, 화요일에 외진을 받고 싶어 하는 환자들을 모아 외진을 보낸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군 병원인 양수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돌아오면 된다.

군인들만 아는 양수병원만의 명물이 있다.

'매점에서 파는 양수치킨이 기가 막히게 맛있지.'

생각해 보니 이강진은 회귀한 이후에 단 한 번도 양수치킨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걸 먹어 보지 못하고 전역하면 말이 안 된다.

무조건 먹어 봐야 한다!

이강진은 의무병을 불렀다.

"아저씨!"

"네?"

"외진 나갈게요."

기회가 왔다 싶으면 붙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주식이든, 사업이든, 군 생활이든.

이 법칙은 어디서든 유효하게 적용된다.

외진을 신청한 이강진은 붕대를 감고서 다시 1중대로 복귀했당직사관을 맡게 된 행보관은 이강진이 쉬고 있는 1생활관을 찾았다.

"의무대 갔다 왔냐?"

"병장 이강진. 예, 갔다가 방금 전에 복귀했습니다."

"뭐라든?"

병사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 또한 행보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특히 1중대 행보관은 병사들의 부상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필중 때에도 그랬다.

"외진은 신청했냐?"

"예, 그렇습니다."

"가서 검사 받아 보고, 그래도 나을 기미가 안 보인다 싶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라. 민간 병원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군 병원은 영 믿을 곳이 못 된다.

행보관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쉬라고 말한 뒤에 다시 행정반으로 돌아간 행보관.

백우호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이강진의 왼쪽 발을 유심히 바라봤다.

"걸어 다닐 수는 있는 거지?"

"어, 걷는 데에는 지장 없어. 의무병 아저씨가그러던데, 뼈가 부러진 정도는 아닌 거 같다고 하더라."

"그 아저씨들이 뭐 전문의도 아니고, 의사 말을 믿어야지. 행 보관님이 말씀한 것처럼 병원에 가서 진찰받고 오L"

"그래야지."

"그리고……."

행여나 다른 사람들이들을까 봐 일부러 목소리를 낮준 백우 호.

"양수치킨, 몰래 싸을 수 있으면 싸 오고."

백우호는 언제든 치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양수병원의 명물인 양수치킨이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하나 이강진의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싸서 가져오고 싶어도 못 가져와, 인마."

외부음식 반입은 금지다.

< 제91화. 외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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