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1화. 외진 (3) >
제91화. 외진 (3)
진료를 마친 이강진은 다시 대기 장소로 돌아왔다.
이강진과 같은 진료 과목에 나란히 예약을 걸어 둔 허인강, 이 웅헌은 이강진이 나오자마자 차례대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가기 전에 이강진은 두 사람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진료 보시는 군의관님한테 거수경례하는 거 잊지 말고. 부대 안이든 밖이든 간부님 보면 거수경례해야 하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만 기억해 둬."
이러이러한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걸 교육시켜 줬다.
괜히 밖에서 욕먹을 만한 짓을 했다가 나중에 중대장이나 행 보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잊어선 안 된다. 부대를 나온 순간, 자신들이 1075대대를 대 표하는 얼굴이 된다는 사실을.
대기실로 돌아온 이강진은 티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래 걸리진 않겠군.'
아까 군의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처음에는 무조건 피해 다녀야 할 대상 1순위로만 생각했던 행 보관.
하지만 군의관의 말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부대로 돌아가면 행보관님 말 잘 들어야지.'
착한 병사가 되기로 했다.
진료가 다 끝나고 보니 시간이 어느덧 12시 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3시간 반이나 남은 셈이다.
허인강과 이웅헌은 난감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은 거 같은데……."
"3시간 반 동안 저희, 뭐 하면 됩니까?"
어디 가서 몰래 잠이 라도 자야 하나?
그랬다가 간부한테 들키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이다. 이강진은 마치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이들을 이끌었다.
"밥 먹으러 가야지. 따라와라. 너희들에게 천국을 보여 줄 테 니까."
밥 먹는 데 천국이라는 말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허인강, 이웅헌은 그렇게까지 기대가 높은 편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군대 밥은 맛이 없다는 인식이 강한데, 심지어 여긴 병원이지 않은가.
맛없는 밥에 맛없는 밥이 더해지면 얼마나 형편없는 결과물 이 나올지 이들은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식당은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근처에 매점이 보였다.
이웅헌은 앞서 걸어가는 이강진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이강진 병장님, 병원 밥, 맛없지 않습니까? 저희, 그냥 매점 에서 라면 먹으면 안 됩니까?"
"누가 병원 밥 먹으러 간다고 그랬냐. 라면보다 헐씬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길이니까 안심해도 돼. 그보다 너희, 치킨하고 피자 중에 어느 걸 더 좋아하냐?"
"잘 못 들었습니다?"
이웅헌은 이강진의 말을 의심했다.
갑자기 치킨과 피자?
그것도 병원에서?
처음에는 이강진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의심은 얼 마 안 가 바로 풀렸다.
"양수병원 매점 옆에 치킨, 피자파는 곳이 있거든. 저기 봐라."
"……세상에!"
이강진의 말대로였다.
한쪽은 치킨, 한쪽은 피자.
타 부대에서 온 병사들은 이것들을 먹기 위해 일찌감치 대기 표를 뽑아 뒀다.
이것이 바로 양수병원의 명물이다!
"양수병원에 왔으면 양수치킨은 무조건 먹어 봐야지. 일단 치 킨은 기본으로 깔고 가고. 피자 먹을 사람?"
두 병사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먹고야 싶다.
먹고는 싶지만…….
이등병, 그리고 이제 막 일병을 단 병사들의 월급으로는 이런 사치를 부리기에 조금 부담스러웠다.
둘의 지갑 속 사정을 잘 아는 이강진은 이들을 안심시켰다.
"형이 사는 거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골라라."
"감사합니다, 이강진 병장님!"
"역시 이강진 병장님! 최고십니다! 사랑합니다!"
충성심 넘치는 그들을 보면서 이강진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대대장님, 연대장님 앞에서나 해라. 어디 보자. 주문 받는 곳이……."
회귀 이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문대를 찾는 이강진.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진 않았다.
하나 싼 맛에 먹는 치킨이라고 오해하면 큰일이다.
이래 봬도 상당한 맛을 자랑한다.
치킨 두 마리, 피자 한 판. 이렇게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강 진은 후임들과 함께 매점에 들렀다.
치킨, 피자에는 역시 탄산이 제격이다.
각자 마시고 싶은 탄산을 사온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한창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그럼에 도 이강진 일행은 창가 쪽이라는 비교적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티비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띵동!
호출음이 들렸다.
"297 번…… 우리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허인강이 곧장 행동에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혼자서 다 가져올 순 없는 양이다. 이웅헌까지 붙어서 두 명이 치킨과 피자를 영접하러 나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치킨과 피자.
그것을 보자마자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양수병원에 오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양수치킨부터 먼저 맛 보기로 했다.
이강진은 가슴살을 먼저 택했다.
입으로 씹자마자 튀김의 바삭함이 이강진의 입을 즐겁게 만 들었다.
보통 닭 가슴살은 특유의 퍽퍽함 때문에 '퍽퍽살'이라 불리는 부위다.
그러나 양수병원에서 판매하는 양수치킨은 달랐다.
마치 입에서 사르르 녹는 듯한 그런 착각마저 들게 만들 정도 로 부드러웠다.
가슴살도 이렇게 부드러운데, 날개와 닭 다리는 오죽할까.
허인강이 먼저 양수치킨을 처음 맛본 소감을 꺼냈다.
기
"제가 지금까지 먹었던 치킨 중에서 단연 1등입니다, 1등!"
가식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진짜다!
이웅헌의 생각도 허인강과 같았다.
"선임들이 괜히 양수치킨, 양수치킨 노래를 불렀던 게 아니었 다는 걸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병원에서 파는 치 킨이라고 해서 기대 많이 안 했었는데…… 제가 멍청했습니다. 많 이 먹으면서 많이 반성하겠습니다!"
이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생각했다.
군인이어서 행복하다고.
양수치킨이 너무 맛있어서일까.
피자가 맛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상대적으로 치킨이 맛이 워 낙 좋다 보니 피자 쪽에는 손이 잘 안 갔다. 그러다 보니 반절이 남은 상황이었다.
기왕 남은 거, 식당에서 대충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가 소화가 될 때마다 한 조각씩 집어 먹기로 했다.
어차피 버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 다. 그래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게 가능했다.
이강진의 카드를 가지고 매점에서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사온 허인강.
디저트와 함께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면서 담소를 나눴다.
시간이 지나 차갑게 식은 피자도 맛있게 느껴지는 그런 시간 이었다.
이웅헌이 피자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러다가 외진에 푹 빠질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프지도 않은데 계속 외진 나오거나 그러진 마라. 너희는 모르겠지만, 선임들의 눈에는 후임이 꾀병 부리는 게 다 보이거든."
산전수전 다 겪은 이강진이 하는 말이다. 이웅헌은 그의 말을 깊게 새겨듣기로 했다.
사온 것들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허인강이 이강진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강진 병장님은 진료를 오래 보시던데, 발목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같은 분과 후임이다 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두 후임들과 다르게 이강진의 진료 시간은 유독 길었다.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행보관의 과거 이야기를 듣느라 그랬다.
하나 군의관과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에 이강진은 구태여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좀 더 정밀하게 진료 보고 싶다고 하셔서 더 걸렸어."
대충 둘러댔다.
어차피 두 사람은 의료 지식이 높지 않다. 군의관이 그랬다면 그렇겠지 하고 넘겼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하나 아직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2시간이나 남았다.
이 시간은 어떻게 보낼까?
소화가 다 되었다 싶을 때, 이강진이 먼저 일어섰다.
"가자, 이제 남은 거 즐기러 가야지."
"병원에서 할 만한 게 또 뭐 있습니까?"
"있지."
아직 이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게 남았다.
* * *
양수병원에도 사이버 지식정보방이 존재한다.
심지어 부대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사양도 좋다.
이곳도 원래는 병사들이 항상 붐비는 곳 중 하나다.
그러나 오늘은 외진 나온 병사들의 숫자가 많지 않은 모양인 지 자리가 아주 약간 남았다.
'예전에는 이용하고 싶어도 못 하던 곳이었는데.'
회귀 이전에 이강진은 양수병원을 두 번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사지방을 이용해 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 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봤다.
딱 두 자리가 남아 있었다.
이웅헌이 먼저 이강진에게 한 자리를 양보했다.
"이강진 병장님이 옆쪽에서 계속 컴퓨터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저하고 인강이는 시간마다 교대하거나 아니면 의자 하나 가 져와서 같이 하든가 하겠습니다."
"그래도 돼?"
"예! 물론입니다!"
애초에 이강진이 이곳에 사지방이 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 더라면, 이들은 컴퓨터의 컴 자도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임들의 소소한 배려에 이강진은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컴퓨터로 할 거라고는 인터넷밖에 없었다.
게임은 애초에 깔려 있지도 않고, 깔려고 해도 걸리면 바로 군 기교육대행이었기 때문에 시도조차 안 하는 게 좋았다.
컴퓨터를 하던 도중에 허인강과 이웅헌은 이상한 광경을 목 격했다.
환자복을 입은 병사들이 단체로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르는 장 면이었다.
"이강진 병장님."
"어, 왜?"
"저 사람들, 환자 아닙니까? 근데 왜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 저거?"
이강진은 쓴웃음을 흘렸다.
"군 병원 환자는 환자가 아니야. 우리처럼 움직이는 데 지장 이 없다 싶은 병사들은 저렇게 일하곤 해."
일반 병원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치킨을 먹을 때에는 군인이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군대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k -k -k
양수치킨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1중대 병사들.
다시 버스를 타고 1075대대로 복귀한 이들은 아쉬움 때문인 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상황이 벌써부터 많은 스트레 스를 야기했다.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부대로 복귀한 세 병사는 금일 당직사 관을 맡은 행보관에게 복귀 신고를 했다.
"충성. 병장 이강진 외 2명, 외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나?"
"예, 그렇습니다. 멀쩡하다고 합니다."
이강진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특별히 큰 이상은 없었다.
"그렇군."
내심 티는 내지 않으려 했으나, 이강진은 행보관의 눈빛에서 '별 탈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군의관이 했던 말이 재차 떠올랐다. 동시에 행보관의 말을 앞 으로 잘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하나 잠시 뒤.
"멀쩡하다니까 잘됐군. 안 그래도 아직 마무리 못 지은 작업 이 있었는데. 가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삽 들고 사열대로 집 합해라."
"자, 잘 못 들었습니다?"
"잘 못 듣긴 뭘 잘 못 들어. 젊은 것들이 귓구녕이 벌써 막혔 나. 뭣들 해! 퍼뜩 안 움직이고!"
행보관의 불호령에 이들은 후다닥 행정반을 나섰다.
'말을 잘 듣긴, 개뿔!'
병사와 간부는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관계다.
특히 말년 병장과 행보관은 더더욱 그렇다.
이강진은 그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 제91화. 외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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