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4화. 편할 날이 없다 (2) >
제94화 편할 날이 없다 (2)
위 병소를 나온 순간.
병사들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와…… 이거, 대체 뭐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흰색, 흰색, 흰색.
눈뿐이었다.
누군가가 붓을 들고 하얀 물감으로 이 주변 일대를 전부 새하 얗게 칠해 놓은 것만 같았다.
군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옥이었다.
하나 이 눈들을 오늘 안으로 다 치우지 못한다면, 이강진에겐 더한 지옥이 찾아올 것이다.
"넉가래부터 먼저 앞으로!"
척!
넉가래 부대가 가장 먼저 선두에 섰다. 그 뒤로 눈삽을 든 병사들이, 그리고 싸리비가 가장 후방에 서서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기로 했다.
이미 한번 제설 작업을 해 봤던 선임들은 굳이 말 안 해도 알 아서 자신의 포지션을 잡았다.
하나 이제 막 입대한 신병들의 경우에는 지금의 사태에 정신 이 하나도 없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쌓인 눈밭을 바라봤다.
과연 이걸 인간의 손으로 치울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강진은 멍하니 서 있는 후임들을 향해 외쳤다.
"정신 차리고 눈부터 쓸어라! 다시 눈 내리기 전에 후딱 해치워야 하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출퇴근을 하는 간부들은 도로 사정으로 인해 부대로 들어올 수가 없게 되었다.
당직사관, 당직사령, 그리고 오대기 소대장을 맡은 간부들만 으로는 병력을 전부 통제할 수 없다.
이럴 때, 분대장급 선임들이 힘을 발휘해야 한다.
도로 제설 작업팀은 이강진이 직접 통제하기로 했다.
"1 분대하고 3분대가 넉가래로 눈을 쭉 밀고 나가라. 그리고 수송이 남은 눈들 다 사이드로 치워.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예,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이강진의 카리스마.
병사들은 1중대의 전설이 귀환했음을 실감했다.
무엇이 이강진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만들었을까?
보나 마나 뻔했다.
'내일은 어떻게 해서든 휴가 나가야 해!'
이강진이 쓰러지든, 눈이 쓰러지든.
둘 중 하나가 백기를 들어야 이 싸움이 끝나리라.
눈을 뜨자마자 바로 제설 작업에 투입된 1075대대.
작업이 시작된 지 벌써 2시간이 흘렀다.
멀리서 당직병이 빠른 속도로 뛰어왔다.
"이강진 병장님 통신반장님이 식사부터 하고 그다음에 다시 작업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순간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라고 외칠 뻔했던 이강진이 었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병사들을 계속 굶길 수는 없었다.
결국 이강진은 알았다고 답한 뒤에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아침밥 먹고 난 다음에 다시 작업 시작할 테니까, 제설 도구, 저쪽 구석에 모아 둬라. 그리고 발 젖은 사람 있으면 막사로 돌 아갔을 때 양말 꼭 갈아 신고. 난 괜찮다고 방치했다가 동상이 라도 걸리면 책임 못 진다. 자기 몸은 군대가 안 챙겨줘. 스스로 가 챙겨야 한다는 거, 잘 기억해라."
"예,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부대로 복귀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까진 눈이 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 었다.
한창 눈을 치우고 있는데 위에서 계속 눈이 내리면, 그것만큼 의욕이 떨어지는 일도 없다.
눈이 안 오는 틈을 노려서 일단은 재정비를 한다.
기력을 보충한 다음에 다시 열심히 달리면 된다.
병사들과 함께 막사로 복귀한 뒤, 각 분대별로 모여서 병사 식 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 달콤한 라면 냄새가 병사들의 코를 자극 했다.
취사병이 병사들을 향해서 외쳤다.
"라면 많이 끓였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알아서 가져가시면 됩 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역시 제설 작업엔 라면만 한 먹거리가 없다.
후르릅!
따끈한 면발과 국물이 병사들의 얼어붙은 속을 녹였다.
갑자기 몸이 나른해졌다. 이 상태로 자라고 해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노곤함이 병사들을 짓눌렀지만, 그렇다고 계속 식당에 눌러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아직 많은 눈들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이강진의 젓가락질이 무거워 보였는지 백우호가 넌지시 물었다.
"휴가 못 나갈까 봐 그러는 거야?"
"어."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 뭐, 내일 정도 되면 다 원상 복구 되 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긍정적으로."
이강진도 그러고 싶었지만, 휴가가 취소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다못해 부대와 시내를 연결하는 도로만이라도 정상화되었 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휴가는 나갈 수 있지 않겠나.
그러나 도중에 눈이 내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다 끝이야.'
눈앞에 백색 지옥밖에 보이지 않았다.
* * *
다시 시작된 제설 작업.
작업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강진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중에 눈이라도 내리면 끝장이다.
하나 이강진의 우려와 다르게 눈은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먹구름이 사라지고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으로 햇빛이 하늘에 비쳤다.
그것을 본 병사들은 마치 희망의 빛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 았다.
"이강진 병장님! 햇빛입니다!"
"그래, 나도 보여!"
내일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 날씨가쭉 이어지기를 진 심으로 바랐다.
그렇게 희망하면서 다시 제설 작업에 박자를 가했다.
날씨가 맑아졌다는 것 때문일까, 축 처졌던 병사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강진도 기운을 차리고 열심히 눈삽으로 눈을 퍼 날랐다.
한창 정신없이 제설 작업에 몰입하던 순간이었다.
한 대의 차량이 눈밭을 뚫고 병사들에게 다가왔다.
많이 보던 차량이었다.
"저거, 행보관님 차 아닙니까?"
"행보관님 맞네!"
1 중대 병사들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행보관은 차에서 내려 이 들에게 다가왔다.
이강진이 대표로 그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네가 병력들 통제하고 있었냐."
"병장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행보관님은 어떻게 여 기까지 차를 끌고 오신 겁니까?"
갑작스러운 폭설 탓에 시내 도로를 이용할 수 없었을 터.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도 간부들이 출근을 못 하고 있었다.
행보관이 출퇴근을 하는 1075대대 간부들 중에서 가장 처음 으로 출근 도장을 찍은 간부가 된 셈이었다.
행보관이 들려준 건 희소식이었다.
"저쪽은 지금 거의 복구 끝났다. 아마 30분 내로 다른 간부들도 다 출근 완료할 거다."
조금만 더 힘내면 된다!
거의 코앞까지 왔다. 이강진의 의욕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얘들아, 들었지? 질질 끌 거 없이 빡세게 한 번에 끝내고 들어가자!"
"예!"
파이팅이 넘치는 대답이 계속 이어졌다.
넉가래를 든 이강진이 가장 선두에 섰다.
"빌어먹을 눈! 꺼져라!"
마치 눈에게 분풀이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강진이 쭉 눈들을 밀고 나가면서 길을 텄다. 그 뒤로 후임들이 빠르게 나머지 눈들을 처리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당해 낼 수 없다.
하지만.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이강진과 1중대가 지금, 그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 * *
107S대대의 노력 덕분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로에 있는 눈을 전부 치울 수 있었다.
병사들이 열심히 제설 작업에 매진하는 동안, 인근에 있는 시 골 주민들도 그들을 열심히 도왔다.
모두가 다 합심한 덕분에 차들이 정상적으로 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왔다 갔다 하는 차들의 모습을 보고 이강진은 그제야 안심을 했다.
'이제 당당하게 휴가를 나갈 수 있겠구나!'
혹시 몰라서 이강진은 행보관에게 재차 확인을 받았다.
이 상태라면 내일 휴가 나갈 수 있냐고.
행보관은 굳이 본부에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 했다.
가능하다.
큰일을 해치운 이강진은 당장 막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일단 잠부터 자야겠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너무 긴 고생길을 걸었다.
내일 휴가 출발을 위해서라도 푹 쉬어 둬야 한다.
휴가를 나가고 나서도 바짝 일해야 하니 말이다.
생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사들은 곧장 병사 식당으로 향했 다.
저녁을 빠르게 먹은 뒤, 샤워실로 향했다.
온수 샤워를 하고 돌아오니 아직 8시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
통신반장의 뒤를 이어 당직사관 완장을 차게 된 행보관이 분 대장들을 소집했다.
방송을 들은 기운상은 곧장 수첩을 챙겼다.
"이강진 병장님, 저 분대장 회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분대장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강진은 내일 휴가를 어떻게 나갈지 고민했다. 공교롭게도 내일 휴가 출발자는 이강진 단 한 명뿐이었다.
'택시 타고 나가는 게 가장 무난하겠지.'
시내버스의 배차 간격은 너무 길다. 한번 놓치면 오랫동안 기 다려야 했기 때문에 좀 더 돈을 들여도 안전하게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좋아 보였다.
"콜택시 번호가 어디 있더라……."
미리 찾아서 예약을 해 둘 생각이었다.
그때, 분대장 회의에 참석하러 나갔던 기운상이 돌아왔다.
"뭐야, 왜 벌써 와? 회의 끝났어?"
"예, 오늘 병력들 고생했다고 취침 시간 9시로 당겨서 실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전파 사항은 없었습니다."
"이런, 빨리 전화해야겠네."
취침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콜택시 예약을 해 둬야 한다.
자기 전까지도 이강진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 * *
새벽 6시.
어김없이 기상나팔 소리가 울렸다.
눈을 뜬 이강진은 A급 전투복으로 환복하려고 했다.
그 순간.
행보관이 생활관을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아침점호는 생략할 테 니까, 제설 도구 가지고 사열대 앞으로 집합한다, 실시!"
'제설 도구?' 이강진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창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조은석이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뭐, 뭐야! 왜 눈이 다시 쌓여 있어!"
바깥 풍경을 보자마자 병사들은 기절할 뻔했다.
분명 어제 눈을 다 치워 뒀건만, 그대로 원상 복구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강진은 자신의 볼을 강하게 꼬집었다.
이건 꿈이다!
그렇게 눈앞에 펼쳐진 풍경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으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이다.
* * *
병력들에게 제설 작업을 지시한 뒤, 행보관은 이강진을 따로 불렀다.
"알아보니까 우리 부대 일대에만 눈이 내렸다고 하더라. 시내 근처는 멀쩡하다고 방금 연락 왔다."
"……그렇습니까."
1075대대가 있는 곳까지 버스와 택시가을 수 없었다.
뒤늦게 제설차가 출동했다고 하지만, 점심쯤이 되어서나 이 곳에 도착할 거 같았다.
"어떻게 할 거 냐, 강진아. 네가 원한다면 휴가를 다음 주로 미 루게끔 조치를 취해 주마."
그건 안 된다.
이미 미 팅을 다 잡아 놨다. 이제 와서 못 가겠다고 일일이 다 연락을 돌리기에도 미안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나가 봤자 의미가 없다. 반드시 오늘 나가 야 한다.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지윤 씨랑 스키장 가기로 했는데, 절대로 포기 못 하지!'
이번 휴가 때, 이강진은 한지윤과 함께 스키장에 놀러 가기로 약속을 잡아 뒀다.
이미 예약까지 다 완료했다. 눈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었다.
이강진은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행보관님."
"어, 말해 봐라."
"오늘 휴가 나가겠습니다."
행보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교통편이 없어. 정 오늘 나가고 싶다면, 제 설차가 와서 눈 치워 줄 때까지 기다리든가. 그거 아니면 무슨 수로 나가려고 그러냐?"
그러자 이강진은 자신의 두 다리를 가리켰다.
"시내까지 걸어가겠습니다."
나 홀로 눈밭 행군의 시작이다.
< 제94화. 편할 날이 없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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