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화. 마지막 훈련 (5) >
제98화. 마지막 훈련 (5)
갑자기 임시 진지를 찾아온 의문의 레토나를 두고 1분대 텐 트에선 한창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무의미한 대화라고 판단한 이강진과 1분대원들은 각자 자리 로 돌아가서 잠을 청할 준비를 서둘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래, 너희도 잘 자고."
"이틀만 잘 버티자."
그러면 이강진과 백우호의 마지막 훈련이 끝나게 된다.
훗날을 기약하면서 편하게 잠에 빠져들려고 하던 순간.
갑자기 밖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에에에에엥!
위급할 때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병사들을 벌떡 일으켰다.
기상 나팔소리도 아니고 뜬금없이 웬 사이렌?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레토나 한 대가 이곳에 왔다는 그 말이 불현듯 이강진의 뇌리를 스쳤다.
뒤이 어 불침 번 근무자들이 텐트를 돌아다니 면서 소리 쳤다.
"오대기 비상!"
"오대기 비사아앙!"
말 그대로 비상이다.
갑자기 어수선해진 분위기. 1분대 텐트는 특히나 더 혼란스러 웠 다.
분대장인 기운상조차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이 런 상황을 겪 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강진이 나서기로 했다.
"오대기 누구야!"
"사, 상병 성태강!"
"그럼 태강心I, 너부터 먼저 뛰어나가! 다른 애들은 태강이 나 가기 쉽게 도와주고!"
이강진의 명령에 따라 후임 분대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성태강이 단독군장과 방탄모를 착용하는 동안, 곽분섭이 센 스 있게 성태강의 전투화를 미리 찾아 뒀다.
"성태강 상병님! 이거 신으시면 됩니다!"
"고맙다, 분섭아!"
재빨리 밖으로 튀어 나간 성태강
그사이 에 이 강진은 막걸 리병을 있는 힘 껏 밟았다.
꽈직!
순식간에 납작쿵이 된 술병. 이강진은 그것을 오른쪽 건빵 주 머니에 넣어 뒀다.
기회를 틈타서 밖에 몰래 버릴 생각으로 술병을 챙겼다.
'원래는 땅 파서 묻어 둘 생각이었는데……."
그래야 이강진이 구상했던 완벽한 뒤처리가 성사된다. 하나 최선책이 안 된다면 차선책이라도 골라야 한다.
이번에 걸리면 정말로 영창행일 테니까.
이강진이 발로 술병을 납작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서 허인 강도 눈치껏 따라 했다.
"이강진 병장님, 이거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원래는 두 병 다 이강진이 챙기려고 했으나, 주머니에 여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강진은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대신에 그거, 흘리면 안 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강진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부소대장을 찾았다.
"부소대 장님!"
"강진아, 지금 애들 데리고 목진지 투입해라, 어서!"
다급하게 지시를 내리는 부소대장. 그 또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시간에 갑자기 상황이 다 걸리고……."
"그게 말이다."
부소대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연대장님께서 오셔서 상황 걸었다고 하더라."
사단장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또 하나의 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일단 이강진은 허인강과 함께 오후에 투입되었던 호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간에 기습적으로 상황이 걸린 적은 몇 번 있었다. 하나 혹 한기 도중에 갑자기 연대장이 쳐들어와서 상황을 건 적은 이번 이 처음이었다.
겨우 호로 들어온 허인강은 짙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연대장님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쉬는 시간도 아니고 취침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이런 난리를 피우시다니."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이곳은 군대니까.
상급자가 이래라 하면 이래야 하고, 저래라 하면 저래야 한다.
"연대장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일단 주변 경계 단단히 해라."
"예, 알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이강진은 크레모아, 부비트랩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했다.
허인강을 시켜도 될 일이었지만, 이등병이 하는 것보다 병장 이 직접 하는 것이 보다 더 안심되고 확실했다.
털리고 싶지 않으면 이강진이 부지런해야 한다.
'이번 훈련만 무사히 넘기면 되니까!'
며칠만 고생하면 된다. 그러면 말년휴가와 전역일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강진을 찾아올 것이다.
숨을 죽인 채 경계 근무를 서는 이강진과 허인강.
두 사람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곳에서 믿을 거라고는 오로지 청각뿐이었다. 그래서 잡담조차 나누지 않았다.
혹여나 연대장이 이곳에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상황이 걸린 뒤, 2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강진은 여전히 경계를 유지했다.
그 순간.
짤랑!
허인강이 서 있는 방향 쪽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돌고래!"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
이강진은 거수자의 정체가 연대장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어를 댈 때까지 계속해서 문어를 외쳤
"돌고래!"
"연대장이다."
"돌고래!"
이런 상황, 이강진에게는 상당히 익숙하다.
한 번만 더 답어를 대지 않으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 늉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대장은 상황을 거기까지 끌고 갈 생각이 없던 모양 인지 마침내 답어를 말했다.
"바위."
"누구냐!"
"연대장이다."
"용무는!"
"순찰."
"신원 확인을 위해 10보 앞으로 전진!"
마지막까지 이강진과 허인강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연대장의 뒤에 서 있던 대대장과 중대장은 목진지에 있는 근무자가 이강진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강진이라면 연대장이 아니라 사단장이 와도 절대로 안 털 릴 자신이 있다.
그의 존재는 1075대대에서 보증수표나 다를 바 없었다.
연대장은 호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 크레모아와 부비트랩 상 태를 확인했다.
"방향에 맞춰서 잘 설치되어 있군. 근무 수칙도 다 알고 있겠 지?"
"예, 그렇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진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술술 나오는 이강진의 멘트. 대대장과 중대장은 마치 이강진 이 노래를 부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듣기가 너무 편하고 좋았다.
역시, 믿음의 이강진다웠다.
연대장은 이번엔 타깃을 바꿔서 허인강에게 질문을 했다.
"거수자를 발견했을 때, 후임 근무자가 해야 할 수칙을 말해 보게."
"이병 허인강! 예, 알겠습니다! 우, 우선 거수자를 발견했을 경우..W 약간 버벅이긴 했지만, 그래도 연대장이 원하는 기준치는 만 족시킬 만한 수준이었다.
둘 다 완벽하다.
이것이 연대장이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대대장, 아까 오대기 상황 대처도 그렇고, 1075대대가 전반 적으로 준비가 잘되어 있는 느낌이군."
"중령 오승진! 감사합니다!"
"이쯤 살펴봤으면 된 거 같으니까, 다들 돌아가……. 음? 잠깐."
갑자기 연대장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이강진과 허인강의 심장이 헐렁할 만한 발언을 꺼 냈다.
"어디서 술 냄새 안 나나?"
막 자리를 뜨려고 하던 순간, 연대장의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가 느껴졌다.
술 냄새라는 말에 대대장 일행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은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와서 자네들도 맡아 보게."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웬 술?
일단 연대장이 부르니,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와서 연대장이 한 것처럼 킁킁거리기 시작하는 1075대대 간 부들.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안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그러나 연대장은 가히 확신했다.
"틀림없어. 이거, 백 퍼센트 술 냄새야. 가만 있어 보자. 막걸리 냄새 같은데?"
설마 연대장이 저렇게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이강진은 연대장의 후각 능력 때문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 켰다.
'씨발, 좆됐네!'
그래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하나 허인강은 벌써부터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강진 병장님, 어쩌면 좋습니까……!"
"쉿! 조용히 하고 있어."
연대장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두 사람의 숨이 턱 막혔다.
끈질긴 노력 덕분일까, 마침내 연대장은 술 냄새의 줄처를 알 아내고 말았다.
"호 근처에서 나는 거 같은데."
연대장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너희 둘, 간부들 몰래 술 마셨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도래했다!
영하의 날씨 임에도 불구하고 허 인강의 이마에 땀방울들이 송 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를 어쩐다?
허인강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강진을 바라봤다.
이등병인 허인강이 할 수 있는 건 자백밖에 없다.
모든 걸 포기한 허인강. 잘못을 빌려고 하려던 순간.
이강진이 먼저 칼을…… 아니, 건빵 주머니에서 구겨진 막걸리 병을 뽑아 들었다!
막걸리 병을 보자마자 대대장과 중대장, 1075대대 간부들은 기 겁을 했다.
"저, 저 미친……!"
"야, 이강진! 너, 정신 나갔냐! 후, 훈련 중에 수, 술을 마셔?"
있으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범 병사로 불리는 이강진이 저런 기행을 저지를 줄이야.
믿었던 만큼 더 큰 분노의 파도가 1075대대 간부들을 감쌌다.
이 순간, 허인강은 모든 걸 포기했다.
이제 끝났구나.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영창을 체험하게 생겼다.
하나 이 또한 이강진의 계획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쇼맨십에 불과하다.
"저희가 마신 게 아닙니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막걸리병입니다."
"떨어져 있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강진의 머릿속에 어느덧 시나리오 하나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오던 중에 허인강 이병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막걸리 병을 밟고 미끌어져 넘어질 뻔했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붙잡았 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발목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 릅니다. 그치, 인강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나 허인강은 눈치껏 이강진의 연극 에 박자를 맞춰 주기로 했다.
"예, 그, 그렇습니다!"
뒤이어 이강진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어두워서 바닥이 잘 안 보이는데, 혹시나 연대장님께서 허인 강 이병처럼 이 구겨진 막걸리병을 밟고 크게 다치시진 않을까 걱정돼서 제가 나중에 치울 생각으로 일단 건빵 주머니 안에 넣 어 뒀습니다. 근데 안에 아직 막걸리가 조금 남아 있었나 봅니다."
이강진은 젖은 자신의 건빵 주머니 밑부분을 가리켰다.
"군복이 막걸리에 젖어서 냄새가 풍긴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 다!"
이것이 이강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이 수가 과연 통할까?
그건 연대장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렸다.
일단 1075대대 간부들은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연대장의 선택은…….
"하긴, 건너편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가끔 새참 드시고 그대로 길가에 버려두고 가시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연대장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닥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몇 개 봤었다. 이강진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강진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자신의 군복이 젖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연대장의 안전을 생 각한 셈인데, 누가 그에게 쓴소리를 하랴.
연대장은 그렇게까지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강진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배려심이 많은 친구구만! 하하하!"
병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대장이 또 한번 대대장을 불 렀 다.
"대대장."
"중령 오승진!"
"여기 병사들에게 소소하게 포상 휴가 하나씩 주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포상 휴가에 허인강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를 높이며 연대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연대장님! 사랑합니다!"
"나야말로 고맙네."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 허인강과 다르게 이강진은 그렇게까 지 기쁘진 않았다.
'휴가는 더 이상 필요 없는데.'
다시 한번 위기를 포상 휴가의 기회로 만들어 버린 이강진.
그의 전설적인 일화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 제98화. 마지막 훈련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