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9화. 말년휴가 (3) >
제99화. 말년휴가 (3)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 이강진은 바라 코리아에 관련된 밀 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표님, 이것도 결재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두석이 이강진의 책상 위에 두꺼운 종이 다발을 올려 뒀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내려놓을 때 '쿵!'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것을 보면서 이강진은 기겁을 했다.
"이만큼이 또 남아 있다고?"
"네, 대표님이 휴가 나올 때까지 전부 미뤄 뒀던 사안들이에요. 이제 오셨으니 일하세요."
"이런 사악한 녀석……."
혹시 스키장 이벤트 때 그에게 뭐라고 한 일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복수극을 펼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나 그렇진 않았다. 나두석만큼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회귀하기 이전에도 나두석은 그랬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너무 이입시키지 않는다.
다시 말한다면…….
"오늘 이거, 다 검토하실 때까지 퇴근은 없으니까 그런 줄 아 세요."
동정심이나 자비 따윈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강진의 입에서 자동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가가 휴가가 아니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 *
원래 이강진은 말년 휴가만큼은 작정하고 쉴 계획이었다.
하나 인생이라는 것이 계칙대로 순탄하게 진행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이강진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오늘 여실히 깨달은 기 분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기적처럼 모든 업무를 마친 이강진.
"어휴, 죽겠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이강진의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서 들어오는 한 여인.
최영고의 넷째 누나, 최영혜였다.
"수고하셨어요, 강진 씨…… 아니, 대표님. 이거 마시세요."
"이게 뭔가요?"
"커피예요. 두석 씨가 대표님한테 대신 가져다 달라고 저한테 부탁하더라고요, 호호."
이강진이 결재 서류들과 씨름하는 동안, 나두석은 두 건의 업 체 미팅을 소화하기 위해 라인혁과 함께 외근을 나갔다.
최영혜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든 이강진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 답했다.
"잘 마실게요."
"업무가 많았나 보네요. 아까 두석 씨가 A4 용지를 다발로 들 고 가는 모습이 몇 차례나 보이더라고요. 대표님 비명 소리가 들 린 건 덤이고요."
"하하하하하……."
대표 사무실에 방음 처리가 잘 안 되어 있나 보다.
아니면 이강진의 고된 비명 소리가 너무 컸다든지.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영고한테 들었어요. 곧 전역하신다면서요?"
"예, 내년 1월 1일에 할 예정입니다."
"어머, 그러면 12월 31 일에 부대로 복귀하시나요? 전역 하루 전에 다시 부대로 돌아간다고 들었거든요."
"네, 그렇죠."
얼마 안 남았다.
그때 이강진은 중대원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예정이다.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역은 특별하다.
이강진의 새 출발을 화려하게 알리는 분기점이 될 테니 말이
"그럼 내년부턴 정식으로 출근하시는 거예요?"
"그렇죠. 저 첫 출근 때, 직원들 모아 두고 회식이나 할까 고민 중이에요."
"회식 좋죠!"
최영혜의 눈빛이 반짝였다.
바라 코리아의 회식은 특별하다.
요식업 회사다 보니 회식도 맛난 곳에서 한다.
청주에서 가장 맛있는 한식점.
바라 식당을 아예 반나절 동안 전세를 낼 예정이었다.
"그때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혜 씨."
"저야말로요. 그리고 대표님…… 아니, 강진 씨, 혹시 크리스마스 때 시간 되세요?"
"크리스마스 때요?"
최영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그때 괜찮으시다면 저하고……."
용기를 내보려고 했으나, 그녀의 시도는 이강진의 사무실을 찾아온 또 다른 직원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었다.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누군데요?"
"김원홍 씨에요."
"아, 그래요? 바로 이쪽으로 안내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영혜씨. 원홍 씨하고 잠시 미팅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최영혜는 아쉬움에 몰래 입맛을 다셨다.
"어, 어쩔 수 없죠. 미팅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황급히 대표 사무실을 나서는 최영혜.
시도는 좋았으나, 아직 그녀가 깨닫지 못한 게 있었다.
이강진에겐 이미 임자가 있다는 사실을.
* * *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이브가 찾아왔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강진에게 반가운 전화 한 통 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지윤 씨?"
-안녕하세요, 강진 씨. 죄송해요. 제가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 고 했었는데, 요즘 시간이 너무 안 나다 보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지윤 씨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좋은데요, 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이강진의 적극적인 멘트. 덕분에 한지윤은 수줍게 웃음을 흘렸다.
스케줄이 워낙 바쁘다 보니 이강진과 한지윤은 올해 크리스마스를 각각 서울과 청주에서 따로 보내게 되었다.
한지윤은 상당히 아쉬워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강진 씨 어떻게든보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일정을 빼 둘 걸 그랬어요.
"아닙니다. 방송 쪽 일도 중요하니까요. 너무 그렇게 미안해 하지 마세요."
이렇게 통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강진은 충분히 만족했다.
만약 부대에 있었더라면, 제대로 통화조차 못 했을 것이다.
-강진 씨는 크리스마스 때 뭐 하시기로 했어요?
"아는 사람들하고 같이 모여서 술 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그 자리에…… 여자도 있나요?
약간의 질투 어린 목소리였다. 이강진은 혹여나 한지윤에게 들릴세라 몰래 웃음을 흘렸다.
"형들, 동생들뿐이에요."
-그, 그렇군요. 아, 맞다. 저번에 제가 녹화했다고 말씀드렸던 예능 프로그램 있잖아요? '익명 상담소' 내일 그거 방송될 거예요.
황급하게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리는 한지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많이 부끄러워하는 거 같으니, 이강진은 그녀의 말에 얌전히 어울려 주기로 했다.
"술자리가 일찍 끝난다면 챙겨 볼게요."
훗날을 기약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달력을 바라보던 이강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 아쉬워."
일부러 크리스마스 때 맞춰서 말년 휴가를 나왔건만.
정작 한지윤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그저 아쉽기만 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도 이강진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해야만 했다.
'휴가 나와서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 휴일까지 일하니까 왠지 더 억울하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남의 회사도 아니고 자신의 회사 일 아닌가. 이강진이 나 몰라라 내팽개치면 큰일이다.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이강진은 슬슬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인혁이 형도 출발했을 테니까 지금 나가면 거의 비슷하게 도 착하겠네.'
솔로들의 파티가 오늘 오후 6시부터 개최될 예정이다.
주최자는 라인혁.
바라 코리아, 바라 식당 직원 몇몇까지 총 일곱 명의 솔로들 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회식 장소에 도착한 이강진. 직원을 따라 3번 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라인혁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오, 왔냐?"
"형 혼자야?"
"나머지는 늦어지고 있대. 하여튼 게으른 놈들이라니까. 회사 대표님도 이렇게 일찍 일찍 다니시는데, 그 밑에 있는 부하 직 원들이 왜 이리 굼뜬지 모르겠다."
"뭐, 부!에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그러니까 길이 막혀서 늦어 지는 걸지도 모르지."
오늘 같은 날에는 웬만하면 너그럽게 이해할 생각이었다.
"근데 여기 가게는 특이하네? 룸인데 티비도 달려 있고."
바라 식당에도 이런 구조를 적용시켜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사업을 하다 보니, 그쪽에 연관된 걸 접하기만하면 허투루 지 나치지 않는다.
"애들 오기 전에 티비나 볼래? 티비 틀어 놓으면 덜 심심하니 까."
"좋지. 아, 채널 기 번으로 맞춰줘."
"응? 왜?"
"지윤 씨가 이번에 '익명 상담소'에게스트로 출연했다고 하 더라고. 그게 오늘 저녁에 방송된대."
"그래? 본방사수 해야겠네."
한지윤이 막 방송계 일을 시작했을 때, 1075대대 병사들은 의 리로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 예능을 다 챙겨 봤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라인혁은 직접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 * *
6시 15분이 되어서야 모든 솔로 파티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술과 안주도 세팅되었으니.
이제 신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자, 건배!"
"솔로들을 위하여!"
"위하여!"
한지윤과의 데이트를 노리고 말년 휴가를 나왔던 이강진은 어 느새 솔로 부대에 합류해서 이들과 같이 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가슴 아픈 현실을 달래 주는 건 역시 술이다.
꿀꺽, 꿀꺽!
뜨거운 알코올이 이강진의 목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여기에 맛 좋은 회까지!
'이 정도면 솔로 파티, 나쁘지 않은데?'
약간 부정적이었던 이강진의 선입견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태 세를 변환하기 시작했다.
* * *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가기 시작했다.
저녁 7시.
티비에서 익숙한 여배우의 모습이 비쳤다.
"강진아, 지윤 씨다!"
이강진의 고개가 빛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한지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라인혁이 말한 건 다른 여배우였다.
"천하의 이강진이 이런 거짓말에 다 속아 넘어가다니, 크크 큭!"
한지윤을 인질로 잡으면 속는 걸 알면서도 볼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정말로 한지윤의 모습이 카메라앵글에 제대로 담기 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게스트로 오게 된 한지윤입니다. 익명 상담소는 첫 출연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진행자와 패널들이 그녀를 박수로 환영했다.
이 번에 한지윤이 출연하게 된 예능 프로그램, '익 명 상담소'는 익명의 시청자들로부터 사연을 받고, 그 사연에 대한 자신의 견 해, 혹은 해결책이나 극복할 수 있는 노하우 등을 패널과 게스 트 들이 알려 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어느새 솔로 부대원들은 티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 다음 사연입니다. 이 사연, 특이하네요. 24세 익명의 여성분이 보내 주셨는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주말마다 군부대 에 기독교 종교 행사로 봉사를 나가는 대학생입니다. 성가대 일원으로 종교 행사에 자주 참여하는데요. 그곳에서 일하는 군종병 남성분을 좋아하게 된 거 같습니다. 그 사람도 저에게 관심 이 있을까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연이 마치 이강진과 한지윤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지윤은 성가대는 아니었다. 그 차이밖에 없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 남성분은 지금 군인이라는 거죠?
-네, 군종병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되는 거죠.
-의견 들려주실 분, 계신가요?
진행자가 패널과 게스트 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때, 용감하게 손을 드는 이가 있었다.
한지윤. 그녀가 용기를 냈다.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하잖아요? 사연 보내신 분 은 그분이 군인이어서 고민하는 거 같은데, 솔직히 그런 건 사랑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 아니, 제가 아는 지인도 사연 보내 주신 분하고 비슷한 입장인데요.
-어머, 정말요?
-신기하네요.
본능적으로 이강진은 그 '지인'의 정체가 한지윤임을 알아차 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은 보나 마나…….
'나겠지.'
실제로 이강진 또한 사연에 나오는 주인공의 짝사랑처럼 군종병으로 일했었다.
한지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분도 사연 보내 주신 분처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까 말까 고민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럴 때에는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솔직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보여 주시면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어차피 병사분이시 니까 나중에 전역하실 거잖아요? 전역하면 마음 편히 사귀면 되죠. 좋아하는 감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분도, 그리고…… 상대방도.
그 말을 들은 순간, 이강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펼쳐졌다.
갑자기 그가 솔로 부대원들에게 외쳤다.
"자, 모두 잔 듭시다!"
"엥?"
"갑자기요?"
"제가 축하받을 일이 생겼거든요."
내용은 이렇다.
이강진의 솔로 부대 전역(예정).
< 제99화. 말년휴가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