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0화. 전역 (2) >
제100화. 전역 (2)
1분대원들 모두가 다 생활관에 있던 건 아니었다.
몇몇은 작업을 하러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곽분섭이 이강진과 백우호에게 분대원들이 어디 갔는지 알려 줬다.
"행보관님이 시키신 벌목 작업 하러 갔습니다."
"이 날씨에 벌목 작업? 어휴, 상상하기도 싫네."
백우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톱을 쥐는 것조차 싫었다.
아무리 행보관이 작업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막 휴가에서 복귀한, 그리고 내일 전역하는 말년 병장들에게 작업을 시키진 않았다.
한가해진 이강진은 활동화를 신었다.
"우호야, 부대 근처나 둘러보고 오자."
"그럴까?"
전역하기 전에 이강진은 자신의 20대 청춘 일부를 바친 이곳을 눈에,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에 담아 두고 싶었다.
괴로웠던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이 들은 생활관을 나섰다.
* * *
휴게실을 비롯해서 건조대, 분리수거장을 쭉 둘러보는 이강 진과 백우호.
분리수거장을 보던 이강진은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우리 1분대가 분리수거장 청소 맡았을 때, 다른 부대 가 우리한테 복수하려고 분리수거 안 하고 막 버렸던 거를 우 호, 네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몰래 염탐했었지. 기억나지?"
"염탐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들렸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건조대에도 나름의 추억이 어려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세탁물들.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했 던 이강진의 과거 행적이 떠올랐다.
휴게실에선 틈만 나면 FIFA 내기를 벌였다.
비디오게임기 옆에 붙어 있는 코인노래방은 병사들의 스트레 스를 풀어 주는 역할을 했다.
휴게실 옆에 있는 헬스장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강진의 몸매 관리에 많은 도움을 준 곳이다.
하나 무엇보다도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바로 공중전화 박스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추억거리다.
"초소에도 올라갔다 올까?"
"그러지, 뭐."
탄약고 초소도 이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다.
산길을 타고 초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탄약고 초소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강진 병장님, 백우호 병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성태강이었다.
그가 마침 탄약고 초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백우호도 성태강을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전역하기 전에 그냥 한 번씩 쭉 둘러보고 있다."
"탄약고 초소 안쪽도 보시 겠습니까?"
"그럴까?"
좁은 곳에 네 사람이 들어서니 상당히 복잡하고 좁았다.
이강진은 많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곳에서 용케도 1시간씩 근무를 섰었구나.'
다음에 또 해 보라고 하면 이강진은 절대로 못 할 거 같았다. 잠자다가 도중에 깨서 산을 타고 이곳까지 올라와 찬 바람을 맞 으면서 1시간 동안 서 있어야 하는 일을 누가 즐기면서 할까.
게다가 무거운 종까지 들고 말이다.
갑자기 백우호가 싱긋 웃었다.
"강진아, 사진이나 한 방 찍자."
"여기서?"
"안 들키면 그만이지."
맞는 말이다.
성태강과 같이 초소 근무를 서 던 후임 근무자가 백우호의 스 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 주기로 했다.
이강진과 백우호가 초소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뒤 로 성태강이 좌경계종 자세를 취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이강진이 현역으로서 먹을 마지막 짬밥은 참 간소했다.
김치찌개에 오징어무침, 배추김치, 김 그리고 밥.
만약 오늘 저녁에 이강진과 백우호의 전역 기념 파티가 예정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이강진은 곧장 PX로 직행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막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1 분대원들 은 병사 식당에 계속 남아 있었다.
"먹을 거 가져오겠습니다!"
후임들이 세팅에 들어간 동안, 기운상은 두 말년 병장에게 다 가왔다.
"이강진 병장님, 백우호 병장님,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생활관에서 좀 쉬시다 오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 우리도 같이 준비하면 더 빨리 끝날 텐데. 그 치, 우호야?"
"뭐,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는 건데, 당연히 도와야지. 라면 끓 이는 건 나한테 맡겨라. 기가 막히게 끓여 줄 테니까!"
전투복 소매를 걷어 올리는 백우호. 의욕이 철철 넘쳐흘렀다.
두 말년들이 솔선수범하면서 도와준 덕분에 파티 준비는 예정보다 빠른 시간 내에 완료되었다.
종이 잔에 음료를 가득 채운 두1,1분대원들이 드디어 한자리 에 모여들었다.
기운상이 먼저 선창을 했다.
"이강진 병장님, 백우호 병장님의 전역을 축하하며, 다 같이 건배!"
"건배!"
꿈에도 그리던 전역 파티의 주인공이 된 이강진.
잔을 부딪치자마자 병사들이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전역 축하드립니다, 이강진 병장님!"
"이강진 병장님 떠나면 엄청 섭섭할 거 같습니다."
분대원들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달아도 돌아간 다는 말이 있으니까.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나 없어도 다들 잘할 거다. 혹한기 훈련 때, 사고 없이 잘 소 화했잖아? 그러니까 다들 운상이 말 잘 듣고 무사히 전역해라.
나 찾아오면 내가 한턱 쏠 테니까."
"정말입니까?"
"저, 반드시 찾아갈 겁니다!"
까짓것 술 한잔 못 사줄까.
옛 전우들과 다시 한번 재회할 수 있다면, 이강진은 얼마가 나 가든 후한 대접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 * *
마지막 저녁점호.
군복을 입은 이강진이 빠른 손놀림으로 전투화 끈을 조였다.
잠시 뒤.
행보관이 1생활관에 들어섰다.
"부대, 차렷!"
이강진의 외침에 1분대원들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충성! 1생활관 저녁점호 인원 보고. 종원 여 덟! 열외 무! 현재 인원 여덟! 번호!"
"하나!"
"둘!"
"셋!"
고개를 옆으로 꺾으면서 번호를 외치는 분대원들.
백우호가 마무리를 담당했다.
"여 덟 번호 끝!"
"이상 1분대 저녁점호 준비 끝!"
"쉬어."
"쉬어!"
행보관은 오랜만에 생활관 책임자 역할을 맡은 이강진을 보 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각이 제대로 살아 있군. 그냥 이대로 부사관 지원하는 건 어떠 냐?"
"죄송합니다, 행보관님! 그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씨알도 안 먹혔다.
미련을 버린다, 버린다했지만 이강진이 너무 탐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부사관으로 진급시켜서 자기 밑으로 데리고 있으면 참 든든 할 거 같은데.
아쉽지만 이쯤에서 이강진을 놓아주기로 했다.
"환자는 없나?"
"없습니다!"
"그럼 저녁점호는 이것으로 마친다. 그리고 예비 전역자 둘은 점호 끝나고 행보관실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두 말년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예비 전역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 중에 특권.
행보관과의 치맥 타임.
드디어 이강진과 백우호에게도 이런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강진, 백우호, 그리고 김철.
세 남자는 행보관실에 세팅되어 있는 치킨과 맥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와서 일단 잔부터 받아라."
"예!"
맥주병을 들고 예비 전역자들의 잔을 손수 채워 주는 행보관. 그의 잔은 이강진이 채워 줬다.
"자, 한 잔 하자."
종이컵으로 조심스럽게 건배를 했다.
이후, 그토록 바라던 치맥 타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행보관은 셋을 마치 아들을 바라보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응 시했다.
작업을 시킬 때 보던 표독스러운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그간 이 행보관 밑에서 일하느라 고생 많았다. 서운했던 일 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너희가 싫어서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저희도 행보관님이 해 주신 말씀의 뜻, 잘 알고 있습니다. 행 보관님한테 원한 가진 사람 아무도 없으니 너무 신경 안 쓰셨으 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전역을 앞둔 병사들과 마주할 때마다 행보관은 후회와 죄책 감을 느꼈다.
좀 더 잘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행보관은 그런 위치가 아니었다. 병사들을 닦달하고, 쪼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이강진은 다 이해한다고 대답해줬다. 그저 고마을 따름이었다.
"강진이는 사업할 거라고 했고, 철이는 웹툰인가 뭔가하는 공 모전 붙었다고 했으니 사회로 나가면 그림 그릴 테고. 우호는 나 가면 뭐 할 예정이냐?"
"오디션 준비할 생각입니다."
"오디션?"
"예, 가수가 꿈이어서 그 꿈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체크 인 아웃 오디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백우호도 이강진, 김철처럼 전역하자마자 바로 준비를 서둘 러야만 했다.
어쩌면 이 셋 중에서 백우호가 가장 바쁠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들 성실하게 준비한 거 같아서 안심이군. 예전에 마 등이, 그 녀석은 나가서 뭐 할 거냐고 물어보니까 모르겠다고 그 러던데.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예전 전역자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듯했다.
그렇게 1시간가량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올해도 얼마 남지 않 게 되었다.
해가 바뀌기까지 남은 시간은 55분.
행보관은 세 사람에게 자러 가거나, 잠이 안을 거 같으면 행 정반에서 당직들이랑 같이 이야기 좀 하고 가라는 말을 남겼다.
김철은 곧장 자러 갔다. 아무래도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이강진과 백우호는 해가 바뀌는 걸 티비로라도 보고 자기로 했다.
두 사람은 금일 당직들, 그리고 오대기 소대장 때문에 막사에 서 대기 중이던 1부소대장과 함께 티비 앞에 모여들어 시간을 보냈다.
마이크를 든 아나운서가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 1분 후면 새로운 해가 찾아옵니다!
화면 상단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서 이강진은 생각에 잠겼다.
올해,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군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겪은 일화들을 추억이라는 이름 으로 가슴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곧 다가올 신년을 맞이하기로 했다.
-자, 다 같이! 10! 9! 8! 7! 6…….
아나운서의 외침에 이강진과 병사들, 그리고 1부소대장도 카 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했다.
"5! 4! 3! 2… 1!"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얘들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1월 1일.
이강진에게 드디어 전역의 날이 찾아왔다.
오전 9시.
아침 집합이 시작되기 전에 1075대대 1중대 병사들이 꼭 해 야 할 일이 있었다.
병사들 대표로 기운상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부대, 차렷! 전역자들께 대하여 경례!"
"충! 성!"
이강진과 백우호, 김철 또한 이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세 사람의 전역을 축하하기 위해 중대장을 비롯해서 행보관, 소대장, 통신반장과 부소대장 들이 종집합했다.
행보관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전역 소감 한마디씩 하고 내려가서 애들이랑 작별 인사 나눠 라."
가장 먼저 김철이 단상에 섰다.
"죽하해 줘서 고맙다. 나중에 강진이하고 우호하고 같이 언제 한번 부대로 면회 오기로 했으니까, 그때 맛있는 거 사 올게. 그 리고 우리 행정분과, 앞으로도 고생하고. 궁금한 거 있다고 나한테 막 전화하고 그러면 안 된다?"
병사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다음은 백우호의 차례였다.
"티비에서 내 얼굴 나올 테니까 꼭 챙겨 봐라. 본방사수! 오케 이?"
"오케이!"
마지막으로…….
이강진의 차례가 도래했다.
"다들 남은 군 생활, 후회 없이 잘 보냈으면 좋겠다. 후회를 남 겨 두면, 나중에 입대 전날로 강제 회귀할지도 모르니까."
"에이, 그게 말이 됩 니까?"
"전 재입대하라면, 그냥 자살할 겁니다."
"이강진 병장님, 끔찍한 소리는 사양하겠습니다!"
이들은 모를 것이다. 이강진이 그 끔찍한 상황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사열대 계단 밑으로 내려간 이강진은 마지막으로 1분대원들 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막내 허인강과 조은석이 눈시울을 붉힌 채 이강진을 바라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인강이, 너도 고생했어. 그리고 은석아, 아니 은석이 형. 내가 형 대접 제대로 못 해 줘서 미안해. 나중에 사죄의 뜻으로 맛있 는 거 사줄 테니까 언제든 찾아와."
다음으로 죄영고와 곽분섭을 찾았다.
두 사람 또한 허인강과 조은석처럼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강진이 형, 청주 내려가면 누나들이랑 꼭 찾아갈게!"
"나중에 저하고 같이 야구 보러 가기로 한 거, 약속 꼭 지키셔 야 합니다!"
"알았어. 안 잊고 있을게."
성태강도 잊어선 안 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강진 병장님."
"나보다 네가 더 수고 많았지. 무사히 전역하기를 바랄게. 그 리고 꼭 세계적인 스타가 되도록 해. 그래야 내가 어깨 펴고서 '태강이가 내 후임이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운상과 마주하게 된 이강진은 씨익 웃었다.
"야, 기운상, 왜 울고 있냐?"
"죄, 죄송합니다……!"
이강진과 가장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보낸 후임이 바로 기운 상이다.
그래서인지 이강진은 유독 기운상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그리고 아버지의 후광 없어도 넌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을 거야. 네가 여태껏 그걸 증명해 왔으니까. 그러니까 다 괜찮을 거다. 자신감을 가져.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바로 그 목소리야."
중대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이강진은 백우호, 김철과 함께 위병소 경계선 앞에 섰다.
천천히, 한 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대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세 사람의 전역을 축하해 주는 중대원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이강진.
'잘 있어라, 망할 놈의 군대.'
고생 끝에 마침내 그에게 두 번째 전역이 찾아왔다.
< 제100화. 전역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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