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1화. 새 출발 (1) >
제101화. 새 출발 (1)
위병소를 나서자, 한 남자가 이강진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 왔다.
"전역 축하드립니다, 형 님!"
나두석이 밝은 표정으로 이강진의 전역을 축하해줬다.
형님이라는 표현에 김철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강진을 응 시했다.
"너, 사업한다는 게 혹시? …?"
"그런 거 아니야. 요식 업이라고, 요식업. 법에 저족되는 거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그냥 두석이, 얘가 날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것뿐이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마."
"아, 그래? 난 또."
친한 친구가 혹여나 어긋난 길로 들어선 건 아닐까 걱정했었 으나,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원래 나두석이 부대 앞으로 마중을 나오는 건 계획에 없던 일 이었다.
거리가 멀기도 했기에, 이강진은 굳이 안 와도 된다고 말했지 만, 나두석이 '형 님 전역하시는데 제가 당연히 모시 러 가야죠!'라 고 하도 고집을 부려 댄 탓에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차를 끌고 직접 부대 앞까지 온 나두 석.
보통 애정이 아니면 이런 행동을 자처해서 하진 못한다. 이강 진을 향한 나두석의 충성도가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 이었다.
이강진은 자신의 동기들에게 나두석을 소개해줬다.
"인사해. 나두석이라고, 내가 저번에도 말했었지?"
"어, 기억하고 있지. 안녕하세요. 백우호라고 합니다."
"김철입니다."
"반갑습니다, 형님들. 나두석입니다."
자신이 형님으로 모시는 사람의 동기니, 나두석에겐 두 사람 도 형님인 셈이었다.
"일단 날씨도 추운데, 차로 가시죠. 어디로 가실지 말씀해 주 시면, 제가 목적지까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아 보였다.
언제까지 계속 위병소 앞에서 알짱거릴 수는 없으니까.
탑승하자마자 이들이 탄 차는 1075대대 위병소 앞을 벗어났 다.
이강진은 창을 통해 점점 멀어지는 1075대대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응시했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지긋지긋했던 군 생활.
그러나.
막상 헤어지려고 하니 이유 모를 씁쓸함과 아쉬움이 뒤늦게 몰려왔다.
* * *
시내에 들른 이들은 그냥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 전역을 기 념해서 술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운전을 하고 온 나두석의 앞에는 술 대신 사이다가 세팅되었 다.
백우호가 잔을 들고서 외쳤다.
"우리의 전역을 축하하며, 다 같이 건배!"
술잔을 부딪친 뒤, 그것을 그대로 원샷했다.
이보다 더 맛 좋은 술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백우호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술을 잘 못하는 김철은 백우호에게 경고했다.
"그러다가 취할라. 천천히 마셔."
"오늘 같은 날에는 취해 줘야 매너인 거야. 알쥐?"
"알긴 뭘 알아."
김철은 공감이 잘 안 갔다.
하나 이강진은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꽐라'가 될 때까지 마시고 싶진 않았다.
내려가면서 한지윤과 통화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취해서 이상한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강진은 양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시기로 했다.
그래도 동기들 중에선 이강진이 주량이 가장 센 편이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다는 느낌을 받을 때쯤.
갑자기 백우호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김철이 백우호를 달랬다.
"뭐야, 너, 갑자기 왜 울어?"
"그냥…… 흑! ……애들이 보고 싶어서……."
"벌써? 얼굴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전역 소감을 말할 때에는 웃으면서, 당당하게 나섰던 백우호.
그러나 술에 취하니 이별에서 오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뒤늦 게 폭발했다.
군대는 좆같았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함께해 온 전우들은 정 말로 소중한 인연들이다.
이강진도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백우호의 등을 토닥여 줬다.
"괜찮아. 2월 초에 부대 한번 찾아가기로 했잖아? 그때 애들 얼굴 다시 볼 수 있으니까,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니다.
군대처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원하는 때에 언제든 날 잡아서 만날 수 있다.
물론.
서로 연락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리긴 하겠 지만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회귀 이전에 이강진은 다른 동기들과 연락이 싹 다 끊겼었다. 동기뿐이랴. 친하게 지냈던 선임, 후임 들까지 전부 다 스쳐 지 나가 잊힌 인연으로 남게 되었다.
하나 이 번 생에는 다르다.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 갈 것이다.
* * *
술에 잔뜩 취한 백우호를 집으로 바래다준 뒤에 다음으로 김철의 집으로 향했다.
백우호와 김철의 집은 의외로 서로 가까웠다.
차에서 내린 김철은 이강진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서울 올라오면 연락해. 그때 우호하고 같이 셋이서 또 한잔하자."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너도. 두석 씨도요."
"네, 들어 가세요!"
동기들을 무사히 집까지 돌려보낸 뒤에야 이들은 청주로 향할 수 있었다.
내려가던 도중에 이강진은 나두석에게 양해를 구했다.
"두석아, 나, 전화 한 통화만 할게."
"어머님한테 하시게요?"
"아니, 지윤 씨."
나두석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아아, 형수님한테 전화 거시는 거였군요. 알겠습니다."
"이상한 말 하지 마라. 그러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아직 사귀는 단계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 런 말을 흘리면 크나 큰 오해를 살 수가 있다.
게다가한지윤은 연예인이다. 한 번의 말실수가 돌이킬 수 없 는 여파를 만들지도 모른다.
이강진이 한지윤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나두석은 오디오 소리를 아예 꺼 버렸다.
혹여나 두 사람이 통화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
-여보세요?
한지윤의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윤 씨, 저, 이강진입니다."
-어머, 강진 씨. 전역은 무사히 하셨나요?
"예, 지금 두석이 차 타고 내려가는 길입니다."
옆에서 나두석에 '안녕하세요!'라며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스키장 건 때문에 한지윤은 나두석을 알게 되었다. 나두석의 목소리를 듣자, 한지윤도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저번에 스키장에서 강진 씨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었 어요. 고마워요, 두석 씨!
"천만에요. 나중에 형님하고 같이 스키장에 한 번 더 놀러 가기로 하셨다면서요? 제가 이 번에도 아는 동생들 시켜서 준비시 킬 테니까, 지윤 씨는 형님한테 시간만 내주세요!"
-호호, 알았어요.
이강진의 연애 사업이 잘되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나두석.
그것이 쓸데없는 참견이 될지, 아니면 나이스 어시스트가 될 지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온 이강진을 기다리고 있던 건 행복이, 그리고 그 의 어머니였다.
"어서 오렴."
"다녀왔습니다."
군대에서 벗어나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강진은 문득 회귀한 당일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날짜가 입대 전날이 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때 당시를 생각하니,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그의 어머니는 이강진의 반응이 이상 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니?"
"그냥 웃긴 일이 생각나서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긴 에피소드지만, 당시의 이강진에게 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지, 일이 조 금이라도 꼬였더라면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군대 덕분에 호만이 형이나 인혁이 형, 그리고 원라원 같은 인맥들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살다 살다 군대가 이강진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이 올 거라 고는 생각 못 했다.
"강진아, 이 신발은 어떻게 하니?"
이강진의 어머니가 전투화를 가리키 면서 물었다.
"그거, 나중에 신고 가야 하니까, 제가 신발장 구석에 짱박아 둘게요."
버리면 큰일이다. 그렇게 되면 동원 훈련을 못 받게 될지도 모 르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간 이강진은 마침내 군복을 벗었다.
벗은 군복 또한 전투화와 마찬가지로 옷장 안쪽에 걸어 두기 로 했다.
평상시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걸어 두는 것이 핵심이다.
'앞으로 당분간 국방색은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커버라도 씌워 둘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 봤다.
하나 지금은 마땅히 쓸 만한 옷 커버가 없었다.
'나중에 따로 구입하든가 해야겠네.'
천천히 옷장을 닫았다.
침대 위에 그대로 드러누운 이강진.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먹은 낮술 때문인지 벌써 부터 잠이 솔솔 밀려오기 시작했다.
'군대에 있을 때에는 이 시간대에 잔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야간 행군이 있던 날이라든지, 무박 3일 훈련이 아니면 오침 은 어림도 없었다.
하나 이강진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민간인 이강진이다.
자신이 자고 싶을 때 자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전역도 했으니, 자유를 만끽해 볼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강진은 벙찐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두 번 다시 국방색은 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건만. 여길 둘러봐도 국방색, 저길 둘러봐도 국방색이었다.
심지어 이강진 본인도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씨발, 이걸 내가 왜 입고 있어!"
황급히 벗으려고 했다. 그 순간, 옆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125번 훈련병,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정신 똑바로 안 차립니까!"
"얄외당하고 싶어서 환장했나!"
조교로 보이는 이들이 이강진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문에 이강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랐다.
"저, 저기요! 저, 방금 전역했어요! 훈련병 아니라고요!"
"뭐? '요'라고?"
"훈련병, 미쳤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엎드려뻗칩니다, 실 시!"
"시, 실시!"
일단은 시키니까 할 수밖에 없었다.
어정쩡하게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는 이강진.
그러자 조교가 다가와 이강진에게 명령했다.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아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설마…… 세 번이나 입대한 거냐!'
지옥이 따로 없다.
* * *
"아, 안 돼……!"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번쩍 떴다.
방금 전과 다르게 주변은 조용했다.
흠뻑 땀으로 젖은 이강진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저 녁 7시 반.
"깜빡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 갑자기 자신이 훈련병이 되었다.
하나 다시 눈을 뜨니 자신의 방이었다.
그제야 이강진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전역하자마자 재입대하는 꿈을 꿨나."
뒤늦게 안도했다.
하나 동시에 억울함도 들었다.
"재입대 꿈을 벌써부터 꾸냐. 이런 미친."
안 그래도 당분간 군대 PTSD에 시달릴 텐데, 전역한 날부터 이런 악몽을 꾸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망할 놈의 군대는 전역했는데도 날 괴롭히네."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 제1이화. 새 출발 (1) > 끝
제101화. 새 출발 (2)
전역한 지 1주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그중 4일을 재입대하는 꿈을 꿨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당분간 잠을 안 자고 생활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재입대는 이강진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겼다.
심지어 이강진은 재입대 경험까지 있다. 그렇다 보니 너무 리 얼하게 재입대 꿈을 꾼다는 게 문제였다.
"그놈의 군대는 전역하고 나서도 날 괴롭히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 한다.
도대체 언제쯤 재입대 꿈에서 벗어나게 될지, 그게 의문이었다.
"긍정적인 생각만하자. 부정적인 생각을 하니까 꿈을 계속 안 좋은 걸로 꾸는 것일지도 모르지."
요즘 이강진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바로 한지윤과의 스키장 데이트다.
"생각해 보니까 스키장 데이트도 두 번째네."
재입대도 2. 스키장 데이트도 2.
2의 저주가 떠올랐다.
"아니지. 스키장 데이트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으니까."
물론 상대가 한지윤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걸려 있다.
모레에 스키장에 놀러 갈 계획을 짜야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랐다.
달력에 스키장으로 놀러 가는 날짜를 따로 표기해 둔 이강진.
스키장 데이트가 하루가 아니라 이틀로 표시되어 있었다.
왜 이틀로 적혀 있냐?
뻔하지 않은가.
"이번에는 1박 2일이지."
그렇다고 같은 방을 잡은 건 아니다. 방은 당연히 따로 잡았다.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닌데 한 방을 쓴다는 건 다소 무리가 있 기 때문이다.
1박 2일로 일정을 잡은 덕분에 이강진은 여유롭게 서울로 올 라갈 수 있었다.
저번에는 이른 새벽이었지만, 이번에는 늦은 저녁이다.
이강진의 계획은 이렇다.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늦은 시간대를 틈타서 스키를 즐기다 가지윤 씨하고 같이 야식을 하든 술 한잔을 주고받든 하면 되 겠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완벽하다.
한지윤과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지윤 씨의 정체는 최대한 숨겨야지.'
요즘은 미디어가 하도 발달한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 의 스마트폰에 찍혀서 인터넷에 올라가 있거나 하는 경우가 있 다.
실제로 이강진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강진이 국민 영웅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시기였다. 청주로 휴가를 나왔을 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이강진을 보고 찍었다는 사진이 SNS,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초상권 침해니 뭐니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자랑용으 로 막 올린다.
이강진은 그걸 최대한 견제해야만 했다.
'지윤 씨가 잘 대비해 오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강진은 한지윤의 얼굴을 가려 줄 마스크를 대신 챙기기로 했다.
'여기에 스키 고글까지 쓰면 웬만하면 못 알아보긴 하겠지.'
웬만한 눈썰미가 아니고선 한지윤을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 능할 것이다.
'좋아, 이 정도로 하고………'
캐리어에 이강진의 짐도 같이 미리 넣어 뒀다.
옷장을 열고서 여분의 옷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응."
의도치 않게 보고 말았다.
군복을.
반사적으로 옷장 문을 닫아 버린 이강진은 몸서리를 쳤다.
"이 러다가 오늘도 재입 대하는 꿈을 꾸겠네."
한지윤과 스키장에 놀러 가기로 한 날이 밝아 왔다.
줄발은 오후 1시에 할 예정이었다. 일찍 출발하는 이유는 김원홍과의 미팅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이강진은 바라 코리아 사무실에 들러 오늘 치, 내일 치 업무를 미리 처리할 생각이었다.
도중에 나두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대표님, 아니 형님, 오늘 지윤 씨하고 데이트하러 가시지 않 습니까? 준비는 잘하셨나요?"
"준비랄 게 뭐 있어."
"반지 정도는 준비해야죠. 반지 상자 꺼내면서 탁 열고 '저하고 결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프로포즈해야죠. 여자들, 은근히 그런 거 좋아해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 는 고백보다는 단둘이 있을 때 하는 고백이 더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해서 결혼했습니다."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난 고백을 하려는 거 지, 프로포즈를 하려는 게 아니라고, 인마."
나두석은 자꾸 너무 앞질러 가려는 경향이 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나두석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속내를 흘렸다.
"형님이 지윤 씨하고 잘돼야 지윤 씨를 우리 바라 코리아 공식 홍보 모델로 모시고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넌 지윤 씨한테 홍보 모델 맡기고 싶어서 내 고백을 응원하 는 거냐?"
"겸사겸사죠, 하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나두석은 영 믿음이 안 간다.
이강진은 나두석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이상한 이벤트 준비하게끔 한 건 아니겠지?"
"지난번에 형님이 하도 뭐라고 하셔서 이번에는 안 하기로 했 어요."
"그래, 잘했다."
이 말만 들어도 안심이다.
괜히 기분 좋게 놀러 갔다가 '갑분싸'가 되긴 싫었기 때문이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이강진은 서울로 향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 전에 나두석이 이강진에게 점심을 제안했다.
"어차피 1시에 출발하시지 않나요? 같이 점심이라도 하고 가시면 어떻습니까?"
대답 대신 이강진은 자신이 챙겨 온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포장된 닭 가슴살과 바나나였다.
"이게 내 점심이다."
"다이어트하세요?"
"어, 말년에 너무 놀아서 살이 좀 쪘거든."
조만간 헬스장도 등록할 생각이다.
군대에 있을 때 열심히 몸매 관리를 했건만. 막판에 자신도 모 르게 너무 해이해지고 말았다.
데이트하라, 회사 운영하랴, 다이 어트하랴.
군대에 있을 때보다도 더 바쁜 시간을 보내는 이강진이었다.
오늘은 한지윤과 데이트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지만, 동시에 에일 밀크티를 비롯해 추가로 티날레의 판매 메뉴들을 최종 확 정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중요한 일인 만큼 이강진은 심사숙고하면서 김원홍과 머리를 맞댔다.
"그나와는 빼는 게 어떨까요? 지금 당장은 메뉴를 확 늘려서 판매하는 것보다 티날레의 색깔이 이렇다는 것을 대중에게 각 인시킨 그다음에 메뉴를 확장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김원홍이 판매하고자 하는 음료 개수가 너무 많다. 이강진은 이걸 지적하고 싶었다.
카페 음료에 대한 열정이 높은 건 좋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 침은 미치지 못한 것보다 더 안 좋을 때가 있다.
이강진은 그때를 사업 초기라고 생각했다.
"메뉴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번잡하기만 할 거예요. 초반에는 주력 음료 몇 개만 내세우도록 하죠."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 대표님 말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김원홍은 고집이 강한 편이 아니다. 이강진은 그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사업에 대해선 이강진이 자신보다 전문가라는 걸 전제 로 깔고 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판매 방식이라든지 수익 구조, 마케팅 등은 이강진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태도 를 보였다.
덕분에 이강진은 김원홍과의 협업을 원만하게 이어 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 말이다.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이 2월 중에 오픈될 겁니다. 그건 들으 셨죠?"
"네, 두석 씨한테 그때 맞춰서 티날레 본점도 오픈하게끔 일 정을 잡을 거라는 말도 같이 들었습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두석이 말대로 진행될 겁니다. 대신, 시간 차는 조금 둘 거예요. 두 가게가 동시에 오픈하는 것보다 먼저 바라 식 당이 오픈을 하고, 그다음 티 날레 본점을 오픈해야 사람들의 이목을 더 오래 끌 수 있을 테니까요."
오픈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오픈빨의 기회를 두 번이나 사용할 수 있는데, 이강진은 그 두 번을 한 번으로 죽약 하고 싶지 않았다.
"가게 인테리어는 보셨어요?"
"네, 깔끔하고 종더군요. 제 마음에 쏙 듭니다."
"다행이네요."
이강진은 군대에 있는 동안 나두석에게 최대한 김원홍의 취 향을 반영한 인테리어로 가게를 꾸며 달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가게를 책임질 김원홍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우선은 1 단계는 클리어다.
미팅은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오후 4시.
한지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슬슬 출발해야 한다.
"그럼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더 궁금한 건 없나요?"
"아, 맞다. 이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허겁지겁 뭔가를 찾아 나선 김원홍.
잠시 후에 그는 도시락 같은 것을 이강진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오늘 이 대표님 데이트하러 가신다고 들어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에일 밀크티하고 샌드위치, 그리고 초코, 고구마 티라미수 몇 조각 넣었어요. 데이트 같이하실 여성분이 누구인지는 모르 겠지만,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하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이강진.
"원홍 씨, 혹시 제가 오늘 데이트할 거라는 말, 누구한테 들으 셨습니까?"
대충 예상은 간다.
아니, 그 녀석밖에 없다.
"두석 씨한테 들었습니다만."
역시나였다.
한숨을 길게 내쉰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 가서 또 한 소리 해야겠군.'
이강진의 어머니도 이렇게까지 그의 연애사에 간섭을 안 하 건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겨울은 해가 짧다.
5시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해가 모습을 감 췄다.
차를 몰아가던 이강진은 인도 쪽을 빠르게 훑었다.
'이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저기 있군.'
마스크를 쓴 한지윤이 이강진의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볼세라 문을 열고 얼른 보조석에 탑승한 한지윤. 그녀는 놀란 눈초리를 하면서 물었다.
"저라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마스크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웬만하면 그녀를 못 알아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강진은 단번에 한지윤을 알아봤
"딱 보면 알죠. 가방은 뒤에 두시면 됩니다. 안전벨트도 매시고. 슬슬 출발할까요?"
"네!"
한지윤의 목소리는 기운이 넘쳤다.
그동안 영화 촬영에 매진하느라 그녀는 바쁜 스케줄을 보내 야만 했다.
촬영 끝나면 놀러 가야지, 놀러 가야지 하면서 벼르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기분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사람이 이강진이라는 사실 이 기쁨을 두 배로 만들어 줬다.
차를 몰아가던 이강진이 뒷좌석을 가리켰다.
"안에 에일 밀크티 있는데, 마실래요?"
"강진 씨가 저번에 말했던 그 음료죠?"
"네. 조만간 오픈할 티날레의 주력 음료입니다. 제가 받아 온 게 가게에서 판매되는 것하고 동일할 거예요."
"어머, 그럼 미리 마셔 봐야겠네요."
이강진이 맛있다고 그토록 자랑을 했던 에일 밀크티. 그녀도 드디어 마실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종이컵에 음료를 따라서 한 모금을 음미했다.
"제 입맛에 딱?인데요."
"다행이군요."
"강진 씨도 마실래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한지윤이 주는 종이 컵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지윤은 그 전에 이강진의 입가에 자신이 마시던 종이컵을 먼저 가까이 가져갔다.
순간 이강진은 갈등했다.
'이거, 간접 키스인가?'
한지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으니, 일단은 마시기로 했다.
후릅.
한지윤이 마셨던 잔이어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거 같네.'
< 제101화. 새 출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