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3화. 1분대 면회 (2) >
제103화. 1분대 면회 (2)
"운상아, 나다."
-설마…… 강진이?
"그래, 짜샤. 오랜만에 내 목소리 들으니까 어떠냐. 좋지?"
이강진과 기운상은 서로 동갑이다. 군대에 있을 때에는 계급 차 때문에 기운상이 이강진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었지 만, 전역한 이강진을 상대로 굳이 존댓말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
사회가 군대도 아니고 말이다.
건너편에서 기운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반갑긴 한데, 타이밍이 좋진 않았네.
"왜. 부대에 무슨 문제 있어?"
-아니. 어제 야간행군 했거든.
어쩐지. 그래서 기운상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근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나 전역할 때 말했었잖아. 나중에 면회 한번 가겠다고. 이번 주 토요일에 갈까 하는데, 괜찮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웬만하면 면회는 가능하다. 주말에 훈 련을 받거나 하진 않으니까.
그래도 미리 간부들에게 보고는 해야 했다.
-잠깐만. 지금 당직사관님이 행보관님이시거든. 가능한지 바로 여쭤볼게.
타이밍이 좋았다.
스마트폰 너머로 기운상과 행보관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보관님, 강진이가 이번 주토요일에 면회 오겠다고 합니다.
-면히? 누구 만나러 오겠다는 거냐.
-그건…….
망설이는 기운상을 위해서 이강진이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 이면서 크게 외쳤다.
"1 분대 단체 면회입니다!"
행보관도 이강진의 외침을 들은 모양인지 곧장 대답했다.
-토요일에 누구누구 오냐! 너 혼자냐?
"저하고 우호, 철이. 이렇게 셋이서 갈 예정입니다!"
-그래, 그럼 그때 와라!
"예, 알겠습니다! 충…… 아니, 그때 뵙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충성'이라고 외칠 뻔했다.
군대에서 든 물이 좀처럼 빠지지 않아서 걱정이다.
얼마 전에는 편의점에 갔을 때 점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못 들었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걸 말하고 나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오래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그때 당시만 떠올리면 절 로 몸이 떨렸다.
다시 수화기를 든 기운상이 이강진과 계속 통화를 이어 갔다.
-그럼 토요일에 봐
"오냐. 맛있는 거 많이 사 갈 테니까, 아침에 짬밥 너무 많이 먹지 마라."
-하하하, 알았어. 애들한테도 미리 말해 둘게. 우리 옛 분대장 님이 맛있는 거 사 올 테니까 잔뜩 기대하라고.
사회의 음식에 굶주려 있는 후임들을 위해서 이강진이 힘을 쓰기로 결심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
이강진은 백우호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소에 타던 이강진의 스포츠카를 그대로 지나쳤다. 뒤따라 가던 백우호가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네 차, 이거잖아. 어디 가?"
"오늘 그거 못 타. 2인승인데, 철이를 어디에다가 태우려고? 자리 없다고 트렁크에 태울 수는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럼 뭐 타고 가게?"
"이쪽으로 와. 다 방법이 있으니까."
블랙 컬러의 준대형 세단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이강진.
"오늘은 이거 타고 갈 거다."
"회사 차야?"
"아니, 내 데일리 카. 저 스포츠카는 기분 좀 내고 싶을 때 타 는 거고, 이건 평상시에 타고 다니는 거야. 얼마 전에 새로 뽑았 어."
20대에 벌써부터 고가의 차량을 두 대나 소유하게 된 이강진을 보면서 백우호는 부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친구, 성공했네, 성공했어."
"너도 체크 인 아웃에서 우승하면 돈 많이 벌게 될 거다."
"그게 말처럼 쉬워야지."
아직도 백우호는 자신이 그곳에 가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강진의 말대로 정말 그렇게 된다면, 백우호도 이강진 처럼 값나가는 차량들을 마음껏 사는 단계까지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이강진과 백우호가 탄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 다.
주말이어도 서울의 도로는 항상 막힌다. 차가 막히기 전에 이 강진은 얼른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1075대대.
하나 그 전에 들러야 할 경유지가 있다.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찾았다. 저기 있네."
청바지와 펑퍼짐한 후드 티를 입고 있는 한 남자가 큰 도로변 에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딱 봐도 김철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강진은 일부러 김철 앞에 차를 세웠다.
창문이 내려가자, 백우호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철아."
"우호잖아? 옆에 강진이도 있네. 그새 차 바꿨어?"
이강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아니, 이건 데일리 카. 일단 뒤에 타,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 면회 시간 맞춰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까."
부대로 가기 전에 치킨과 피자, 그리고 햄버거를 잔뜩 구입해 야 한다.
햄버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원래는 아침에 가게를 여는 치킨, 피자집은 잘 없다.
하나 군 부대 근처에 있는 곳은 면회 온 이들이 아들, 친구, 혹 은 애인에게 맛난 걸 먹여 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치킨과 피자를 찾곤 한다.
그것 때문에 주말에는 특별히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이강진은 군 생활을 할 때에 눈여겨봤던 치킨, 피자 가게를 순 차적으로 찾았다.
"사장님 여기 치킨 40마리만 튀겨 주세요."
아침부터 들어온 대량 주문 덕분에 치킨집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물론 피자집도 사정은 마찬가지 였다.
그곳에 가서 피자 40판을 주문한 이강진은 양손에 가득 햄버 거 세트를 들고 오는 백우호와 김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이쪽이야."
차 트렁크를 열었다. 미리 준비해 둔 박스 안에 햄버거 세트 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해서 넣었다.
백우호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 면서 말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햄버거 세트를 주문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거다."
"직원이 놀라지?"
"아니, 이런 경우가 몇 번 있어서 그런지 그냥 무덤덤하게 반 응하더라."
"하긴, 군부대 근처니까."
치킨, 피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장 만만한 게 햄버거다. 아 마 햄버거는 단체로 사 간 적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음식들이 준비되는 동안, 이강진은 잠시 어딘가에 들렀다 오기로 했다.
"나, 서점 좀 갔다 올게."
"서점은 왜?"
"뻔하잖아."
군인이었을 때, 서점에 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스파링 잡지를 사기 위해서.
* * *
오랜만에 서점에 들른 이강진은 새롭게 출간된 스파링을 구 입한 후에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치킨집, 피자집으로부터 주문해 둔 음식이 다 완성되 었다는 문자가 왔다.
이강진은 동기들과 각자 나눠서 치킨, 피자 들을 가져오기로 했다.
트렁크가 가득 차 버린 탓에 일부는 뒷좌석에 실어야만 했다.
운전석에 탑승한 이강진은 뒤에 앉은 김철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옆으로 기울지 않게 잘 붙잡고 있어."
"알았어, 나만 믿어."
드디어 출발이다.
익숙한 도로를 따라 달리는 이강진의 차량.
창문 밖을 바라보던 백우호는 갑자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 도로, 기억나네. 저번에 무박 3일 훈련 받는다고 두돈반 타고 나갔었는데. 여기 지나쳤거든."
"여긴 뭐, 우리 휴가 나올 때에도 왔다 갔다 했었잖아."
"그렇지. 눈 왔을 때 여기서 제설 작업 하기도 했었고."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기에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지, 그때 당시는 정말 힘들고 괴로웠다.
점점 익숙해지는 풍경들. 동시에 세 남자는 당시의 일을 회상 하면서 이야기꽂을 피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 1075대대의 위병 소.
그것을 보자마자 세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새된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악!"
"씨발, 위병소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네!"
비명 뒤에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위병소 앞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 그곳에 차를 주차시킨 이강 진은 동기들과 함께 위병소로 향했다.
선임 근무자가 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면회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장실로 키를 넣었다. 그러자 조장 근무자가 이들을 조장실 로 안내했다.
조장실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부사관은 억지로 졸음을 내쫓으면서 이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누구 보러 오셨나요?"
"1 중대 기운상 병장요."
"네. 민형아, 1중대에 키 넣어라."
"상병 황민형. 예, 알겠습니다."
부사관과 조장 근무자들은 이강진을 전혀 못 알아보고 있었 다.
병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간부는 알아볼 법도 한데.
'나 전역한 후에 이곳에 배치받은 간부인가 보네.'
그러면 이강진을 못 알아볼 수도 있다.
키를 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저 멀리서 군복을 입은 다수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위병 소로 내려오고 있었다.
인솔자 위치에 선 남자의 걸음걸이가 눈에 익었다.
"쟤, 태강인가 보네."
"그러게. 어? 태강이가 견장 달고 있네?"
"진짜?"
이강진 일행의 관심이 성태강에게 집중되었다.
초록 견장을 찬 성태강은 쑥스러운 듯 이강진 일행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우와, 태강이 형! 언제 분대장 달았어?"
백우호의 물음에 성태강은 머쓱한 표정으로 두 달쯤 됐다고 답했다.
나이로 따지면 성태강이 이강진보다 세 살 더 많았다. 그래서 전역한 뒤에는 이들이 성태강에게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강진, 백우호에게 형이라 불릴 때마다 성태강은 큰 어색함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강진 병장님, 백우호 병장님 그랬었는 데, 이제는 동생처럼 대해야 한다니까 뭔가 굉장히 어색하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태강이 형이라는 단어가 입에 잘 안 붙었다.
연예인들은 보통 늦은 나이에 입대를 하곤 한다.
이강진은 성태강이 자신보다 형일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에선 나이보다 계급이 우선시된다. 형이라도 자신 보다 계급이 낮으면 형 대접을 해 주기가 어렵다.
대표적인 경우로 조은석이 있다.
"근데 은석이 형은 안 보이네?"
이강진의 물음에 성태강은 아쉬운 소식을 전했다.
"휴가 나갔어. 이번에 너희 온다는 말 듣고 많이 아쉬워하더 라고."
"아, 그래?"
조은석뿐만 아니라 기운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운상이는?"
"배 아프다고 화장실 들렀다가 내려온다고 했어. 곧 올 거야. 우리 먼저 면회실로 갈까? 미리 자리 맡아 둬야지. 그래야 편해."
"그러는 게 좋겠네."
이동하면서도 이강진은 후임들과 인사를 나눴다.
곽분섭도, 최영고도, 허인강도 다 그대로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계급이다.
백우호가 곽분섭의 계급장을 가리키 면서 말했다.
"곽분섭, 니가 벌써 상병이냐?"
"왜 그래, 형. 나, 이래 봬도 1중대에서 군기반장이라고 불리 고 있어."
"네가? 뻥치지 마."
백우호는 절대로 안 믿으려고 했다. 그때, 허인강이 아주 작 은 목소리로 귀띔을 해줬다.
"정말입니다. 곽분섭 상병, 엄청 무서워요."
"에이, 그럴 리가."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이강진은 후임들을 집합시켜 놓고 군기를 잡는 곽분섭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그러나.
'잘 안 떠오르는데.'
자신이 아는 어리바리한 곽분섭의 모습 때문에 머릿속에 그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의 이미지라는 것이 중요하다.
< 제103화. 1분대 면회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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