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4화. 특별한 손님들 (2) >
제104화. 특별한 손님들 (2)
오늘도 하루 종일 서류들과 싸움을 펼친 이강진.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힐링이 필요해.'
집에 가서 영화나 한 편 결제해서 볼까, 이런 생각이 들 무렵 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강진에게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힐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한지윤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네, 지윤 씨."
-강진 씨, 일 끝나셨나요?
"예, 방금 끝나서 들어가는 길입니다."
-저, 요 근처에 있는데,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커피라도 한잔 해요.
같이 커피를 마시자. 이건, '티날레에서 조금 있다가 보자.'라 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영화 시청보다 더 달콤한 힐링.
그것은 바로 한지윤과 만나는 것이다.
티날레의 마감 시간은 저녁 11시다.
현재 시간은 저녁 10시 반. 마감까지 딱 30분밖에 남지 않았그 때문에 매장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김원홍이 이강진에게 슬쩍 귀띔했다.
"이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마감 시간을 살짝 뒤로 미룰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부족하시 면 언제든 말씀만 해 주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홍 씨."
"천만에요."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있진 않을 거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 니 일단 김원홍이 남겨 둔 찬스 카드의 존재는 머릿속에 확실히 인지해 두기로 했다.
이강진이 티날레에 와서 자리를 잡은 지 5분 뒤.
출입구에 달려 있는 작은 방울이 울렸다.
마스크로 입가를 가린 한지윤은 곧바로 이강진을 발견했다.
빠른 걸음으로 이강진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간 그녀는 눈웃 음을 지었다.
"오늘은 일이 많으셨나 봐요. 이 시간에 퇴근하시고."
"네, 유독 오늘이 좀 많이 바쁘더라고요. 그나저나 지윤 씨는 어쩌 다가 이 근처까지 오게 되었나요?"
근처에 촬영이라도 있었나?
하나 그런 일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한지윤.
남이 듣기에는 민감한 문제였다.
"저, 여기 근처로 이사 오려고요. 그래서 오늘 엄마하고 같이 집 알아보러 돌아다녔어요."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하나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한지윤이 살고 있는 곳은 외곽 중에서도 외곽이다. 그곳에서 계속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면 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
1시간 일찍 일어나도 될 것을 최소 2시간…… 아니, 폭설 같은 기상 악화라도 있는 날에는 3시간 일찍 출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동 거리를 최소화하고자 한지윤은 결국 생애 처음으로 자 취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시겠군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딸이 혼자 서울로 와서 독립을 하 겠다는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이강진의 어머니도 처음에 그가 서울로 이사 가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지윤은 오죽할까.
"엄마는 크게 걱정 안 하시는 거 같은데, 아빠가 문제예요. 저 독립하겠다고 하니까 절대로 안 된다고 엄청 반대하셨거든요."
그 심정, 이강진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던가. 집을 알아보러 이곳에 왔다는 건, 결국 자취하는 걸 허락받았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근처에는 강진 씨도 있으니까요. 안심하고 이사 올 수 있을 거 같아요."
수줍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강진의 눈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만약 이곳이 티날레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약간(?)의 애정 행각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이강진은 그게 많이 아쉬웠다.
"여기가 집값이 비싸긴 하지만, 치안은 나쁘지 않더 라고요. 만 약 문제가 생길 거 같다 싶으면, 꼭 저한테 연락하세요. 밤이고 낮이고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고마워요. 강진 씨만 믿을게요."
거리도 가까워졌으니.
이제 서로 시간만 내면, 언제든 원하는 대로 만날 수 있게 되 었다.
'우호가 오디션이 빨리 끝나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만나는 건 데.'
이게 약간의 흠이었다.
한지윤과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강진 은 혼자서 맥주 파티를 벌이려고 하는 백우호의 모습을 목격했다.
"뭐야, 갑자기 웬 술?"
"안 그래도 너 언제 오나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뭔데 그래?"
"이유를 알고 싶으면 방송으로 확인해 봐."
티비를 가리키는 백우호.
'체크 인 아웃'이 한창 방영되고 있었다.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고 긴장감을 조성했다.
-본선 2라운드에 진출할 30인 중 마지막으로 합류할 멤버를 발표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두 명의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그중 한 명은 이강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옆에 앉은 채 맥주캔을 기울이는 백우호였다.
지금 백우호가 마시는 맥주캔이 합격을 축하하는 축하주인지, 아니면 위로주인지 들은 바가 없었다.
"붙었냐?"
"어허! 방송으로 직접 보라니까."
백우호는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기
이상한 고집을 피우는 동기 덕분에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티비 앞으로 다가온 이강진.
긴장한 표정을 짓는 백우호의 얼굴이 카메라에 클로즈업 되 었다.
'군대에선 산적 같은 느낌이었는데, 티비에서 보니까 느낌이 많이 다르네.'
방송이라 그런지 메이크업을 제대로 받은 듯했다.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한 BGM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 진행자가 이렇게 외쳤다.
-광고 보고 오시겠습니다!
그의 말에 백우호뿐만 아니라 참가자, 심사위원 래퍼 들이 양 손을 들어 올리면서 어이가 없다는 리액션을 펼쳤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이런 것도 스웩이 느껴졌
"보면 알 거라며. 광고 시작했는데?"
"광고 끝나면 바로 나올 거야."
백우호의 말대로 광고가 끝나자마자 바로 결과가 오픈되 었다.
-2라운드 마지막 진출자! 우호!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백우호는 오른손을 불끈 들어 올렸다.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쥔 백우호의 모습이 유독 멋있어 보였다.
"이 녀석, 티비로 확인해 보라고 한 이유가 있었구만."
"어때, 나 좀 멋있지 않냐?"
"하하하! 그래, 요 녀석 아. 아무튼 다음 라운드 진출하게 된 거, 축하한다!"
결과 자체는 한참 전에 나왔을 터. 그럼에도 백우호는 이 순 간을 위해서 여태껏 이강진에게 결과를 감춰 왔었다.
"그럼 다음 라운드가 마지막이 냐?"
"아니, 그다음이 마지막. 열 명까지 추스른 다음에 그 열 명이서 최종 배틀을 벌이는 거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서바이벌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다 그렇다.
보는 이는 재미가 있겠지만, 정작 무대에 서는 당사자들은 피 말리는 그런 시스템이다.
몸도, 마음도 힘들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우호는 묵묵히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맞다. 잊고 있었네."
뭔가를 떠올린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이런 말을 불쑥 꺼냈다.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면 방송국 측에서 내 개인 스토리를 영 상으로 담아서 결승 무대 펼쳐지기 전에 먼저 내보낼 거라고 하 거든. 나한테 카메라 하나 줄 테니까, 그걸로 영상 찍어 오면 스 태프들이 알아서 잘 편집해 줄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말인데. 네 얼굴 나와도 돼?"
"상관없어."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
오히려 이강진이 방송에 자주 노출되면 가게 홍보도 되고 좋은 즉면이 많다.
"오케이. 알았어. 기억해 둘게."
"결승 진출해서 우승까지 거머쥐어라. 응원하마."
"Thank you, Bro."
무대를 몇 번 경험하더 니, 백우호의 얼굴에 강한 자신감이 깃 들어 있었다.
처음과는 사뭇 다른 그의 모습에 이강진은 이제 더 이상 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고용한 직원들이 첫 출근을 하는 날.
나두석 덕분에 2차 면접을 그리 잘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 통보를 받게 된 여성 지원자도 바라 코리아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그녀는 상당히 빠르게 회사에 적응했다.
'역시 두석이가 사람 보는 눈은 정말 기가 막힌단 말이지.'
나두석을 믿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대표 사무실로 돌아온 이강진은 외근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외부 업체와 미팅이 있는 날이다.
원래대로라면 나두석과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갑작스 럽게 다른 미팅이 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강진 혼자서 움직이게 되었다.
가방을 들고 차에 오른 이강진.
운전대를 잡으려고 하기 직전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새겨진 이름을 본 이강진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원라원]
통화 버튼을 누르자, 원라원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여보세요.
"어, 라원아. 오랜만이네."
-그러게. 자주 전화했어야 했는데. 미안.
"괜찮아. 서로 많이 바쁠 텐데, 뭘!' 원도문의 선거 활동 때문에 원라원도 아버지를 돕느라 정신 이 없을 것이다.
-다름이 아니고. 저번에 아버지가 너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셔서. 더 바빠지기 전에 너한테 감사 인사라도하고 싶다고 하 시더라고. 그래서 이번 주 주말에 바라 식당으로 갈 생각인데, 시간 언제 괜찮아?
"토요일 점심쯤이 좋겠네. 예약 안 했지? 내가 방 잡아 둘게."
-고마워.
이제 곧 현직 의원이 될 원도문과 그의 아들 원라원.
이들 부자는 이강진에게 있어서 특별한 손님이 될 것이다.
토요일 오전 11시쯤에 집을 나선 이강진은 원도문 일행이 도 착하기 전에 먼저 좌석들을 체크했다.
"저번에 청주에서 받았었던 곽이현 의원 일행분들 기억하시 죠? 저희 덕분에 점심 잘 먹었다고 오늘 보답하러 오신다네요."
이강진의 말을 들은 직원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때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국회의원이 오는 거예요?"
"아니요. 다른 분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겁먹으실 필 요는 없어요."
지금의 원도문은 다른 정계 인물들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훗날, 대한민국 정치계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 력 있는 인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도 결국 주식과 같다.
아직 주가가 오르기 전이지만, 날아오를 가능성이 있는 종목 이 보인다면 무조건 투자해야 한다.
그 종목 중 하나가 바로 '원도문'이다.
약속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원도문이 가족들과 함께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을 찾았다.
이강진이 직접 이들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을 미리 준비해 뒀으니, 그쪽으로 가시죠."
"고맙군."
원도문은 자신의 아내, 그리고 아들 원라원과 함께 이강진이 마련한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가던 중에 원라원이 이강진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했다.
"잘 지냈어?"
이강진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럭저럭."
두 사람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전역 이후 처음이었다.
원라원을 보자마자 이강진은 문득 '그것'을 떠올렸다.
"라원 아."
"어, 왜?"
"조금 있다가 내가 선물 하나 줄 테니까, 그거 챙겨 가."
"선물? 뭔데?"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어떤 선물인지 묻는 원라원.
그러나 이강진은 며칠 전의 백우호처럼 말을 아꼈다.
"나중에 직접 확인해 봐."
재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 제104화. 특별한 손님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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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손님들 (3)
하나둘씩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원도문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스마트폰을 먼저 들었다.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킨 뒤.
찰칵!
한 상 가득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스마트폰 카메라 안에 담았다.
“요즘 이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해서, 나도 같이 따라 해 보고 있네.”
먹기 전에 찍는 인증샷.
한때는 대한민국의 식사 예절(?) 중 하나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진짜 젊은 사람인 이강진과 원라원은 원도문처럼 음식 인증샷을 따로 남기진 않았다.
원도문의 아내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하여튼 당신도 주책이야.”
그래도 원도문은 당당했다.
젊은 층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저 자세, 이강진은 꽤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정치인 중에서도 그나마 원도문은 깨끗한 축에 속한다. 그래서 더욱 그를 밀어주고 싶었다.
인증샷도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건 식사뿐이다.
반찬과 찌개 국물 등을 맛본 원도문은 감탄을 흘렸다.
“역시. 저번에도 느꼈지만 사람들이 왜 줄을 서는지 알겠군. 아주 맛있어. 우리 와이프가 해 주는 것보다 더 맛있는 거 같은데.”
보통 때였더라면 화를 냈을 그의 아내였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레시피라도 배워 가고 싶을 정도예요, 호호!”
원도문 부부의 입맛을 사로잡은 바라 식당.
원라원도 같은 반응이었다.
“맛있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주방장이 따로 있어. 부대에 있을 때 취사병으로 일했던 형이 있는데, 그 형이 지금 여기 메인 주방장이야.”
“그래? 좋겠다. 이렇게 맛있는 밥 먹고 군 생활 했으니.”
하지만 오호만이 전역한 이후로는 짬밥 맛이 뚝 떨어졌다.
오호만이 해 주던 밥이 너무 맛있다 보니 다른 취사병이 해 주는 밥이 상대적으로 너무 맛없게 느껴졌다. 여기서 오는 괴로움의 시간이 꽤 길었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네 사람.
도중에 이강진의 사업 계획을 들은 원도문은 놀라움을 드러냈다.
“이번 연도 내에 가게 열다섯 곳을 오픈하겠다고?”
“티날레까지 포함하면 총 스물다섯 지점이 될 겁니다. 이번 달 말에 각 지점의 주방을 맡을 요리사분들에게 레시피를 전수하기로 했으니, 여건만 맞춰진다면 순서에 상관없이 준비가 끝난 곳부터 바로바로 오픈할 거 같습니다.”
“허허. 성장세가 어마어마하군.”
이강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 가지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빠르게.
이 3원칙을 지켜야 성공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열릴 것이다.
원도문은 사업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는 이강진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자신이 본 어떤 젊은 친구들보다도 총명하고 똑똑했다.
그리고 그에게 크나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도 했다.
이강진. 그는 어쩌면 원도문보다 더 크게 될 인물일지도 모른다.
“내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손을 빌려주도록 하지. 지난날의 빚도 아직 제대로 정산 못 했으니까.”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그저 곤경에 처한 분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요즘 시대에 자네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청년이 있다는 게 상당히 놀랍군.”
원도문은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강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앞으로도 계속 나와 좋은 관계 이어 가도록 하세.”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지금 단계에서 이강진이 원도문에게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기도 했다.
“예, 알겠습니다.”
여부가 있을까.
개천에서 용 나듯 정계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될 원도문.
언젠가 이강진은 그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이제 원도문이라는 종목이 쭉 위로 치솟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
주식으로 단련된 인내심 덕분에 버티는 건 특기가 되어 버렸다.
* * *
식사를 마친 원도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잘 먹었네. 다음에도 또 오도록 하지.”
그때는 선거가 끝날 때쯤일 것이다.
이강진은 그의 건투를 빌어 줬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고맙네.”
원도문과 그의 아내가 먼저 가게 밖을 나간 사이.
이강진이 원라원을 불렀다.
“라원아.”
그에게 뭔가를 내민 이강진.
그것을 보자마자 원라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이게 나한테 주겠다고 한 그 선물은 아니지?”
“맞아.”
1075대대로 면회를 갔을 때, 이강진은 서점을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사 온 물건이 바로 ‘스파링’이었다.
한때 스파링을 두고 매번 경쟁을 펼쳤던 이강진과 원라원.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원라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읽을게.”
이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원라원은 사춘기 소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가게 확장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강진.
그 와중에 1075대대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기운상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이강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일 전역한다고?”
-어. 방금 애들하고 같이 전역 기념 파티 끝내고 막사로 올라왔어.
“시간 진짜 빠르네. 네가 전역이라니.”
군대에 있을 때보다 사회에 있을 때가 시간의 흐름이 더 빠르게 느껴졌다.
“아무튼 축하한다.”
-고마워. 내일 전역하자마자 네가 운영하는 식당 한번 들를까 하는데. 괜찮아?
“시간 되면 호만이 형하고 인혁이 형도 볼 수 있을 거야. 우호는…… 무대 준비한다고 한창 연습 중이어서 내일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번에 새롭게 주어진 랩 미션이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모양인지 백우호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면서 무대 준비에 몰입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사람한테 억지로 나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나도 오래 있진 않을 거야. 밥 먹고 커피 한잔 한 뒤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거든.
“그럼 바라 식당에서 밥 먹고 옆에 티날레로 넘어가면 되겠네.”
식당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하다 보니 이런 점이 참 좋다.
“아무튼 다시 한번 전역 축하하고. 내일 보자.”
-어, 고마워.
통화를 마치자마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운상이가 전역이라니.”
다시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내 전역일은 엄청 늦게 오는 느낌이었는데, 남의 전역일은 빠르게 느껴지네.”
생각하기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체감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어떤 식으로 축하해 줘야 하나?”
몸 건강히, 무사히 전역했다는 건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다.
* * *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을 처음 찾은 기운상은 신기하다는 듯이 가게 이곳저곳을 살폈다.
“엄청 크네. 여기가 정말 네 가게야?”
“나 혼자만의 가게는 아니지.”
여긴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가게다. 이강진은 기운상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미리 잡아 둔 방으로 기운상을 데려가는 이강진.
잠시 후.
앞치마를 두른 오호만이 직접 음식들을 가지고 방을 찾았다.
“호만이 형!”
“오랜만이다, 운상아.”
오래간만에 만나는 전우를 보기 위해서 바쁜 와중에도 오호만은 잠시 짬을 내 이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군복을 입고 있는 기운상의 모습을 쭉 훑은 오호만.
그의 목소리가 상기되기 시작했다.
“이야! 개구리 마크 달았네? 살다 살다 네가 개구리 마크를 다는 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까 강진이도 그 말 하더니. 나 오기 전에 미리 짠 거 아니지?”
“안 짰어. 그런 걸 뭐 하러 짜냐? 아무튼 전역 축하한다. 일단 잔부터 채우자. 내가 한 잔 따라 주마.”
“고마워. 형은 술 마실 거야?”
“나? 일하는 중이니까 못 마시지.”
아직 바라 식당에서 가장 바쁜 저녁 시간대가 남아 있다. 괜히 술 마셨다가 요리를 망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늘 최선을 다한 요리를 대접해야 한다.
오호만이 처음 바라 식당에 와서 일을 배우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교육받은 내용이기도 했다.
좀 더 이야기를 이어 가려고 하는 순간에 방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익숙한 얼굴이 추가되었다.
“이게 누구야, 운상이잖아!”
도중에 일을 끊고 바라 식당으로 온 라인혁이 개구리 마크를 단 기운상의 전투복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인혁이 형,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지?”
“요즘 우리 사장님이 너무 나 굴려 먹고 있어서 죽을 맛이다.”
사장님이라 함은 이강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강진은 쓴웃음을 흘렸다.
“조만간 직원 충원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줘.”
직원을 계속 상시로 모집해도 워낙 확장 속도가 빠르다 보니 인력이 충원되는 속도가 사업 확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라인혁은 정시 퇴근을 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일이 많고 힘든데도 불구하고 라인혁이 계속 바라 코리아에 붙어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강진이가 월급은 많이 주니까, 헤헤헤.”
이름하야 ‘금융 치료’다.
일하는 만큼, 아니 일하는 것 이상의 월급을 주니, 라인혁은 크게 불만은 없었다.
180도 달라진 라인혁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만도 라인혁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때, 이강진이 기운상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너도 바라 코리아로 취직할래? 안 그래도 우리 지금 사람 구하고 있는 중인데, 급여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 줄게.”
“아니, 괜찮아. 일단 대학교부터 복학할 생각이거든.”
“안 쉬고 바로?”
“어.”
보통은 사회 적응 기간이라고 해서 반년, 혹은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겸해서 충분히 쉬다가 다시 학교로 복학을 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기운상은 그런 거 없이 바로 복학하는 길을 택했다.
“나, 나중에 장교 지원해 볼까 생각하고 있거든.”
‘장교’라는 말을 들은 순간, 세 남자는 입에 머금고 있던 음료를 뿜을 뻔했다.
“방금…… 뭐라고 했냐?”
“장교라고?”
“다시 입대하겠다고? 진짜?”
믿기지 않는 결정이었다.
더욱이 기운상이 이런 말을 하니까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렇다 보니 군인이라는, 특히 장교라는 직업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던 기운상이 본인의 입으로 장교 지원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군 생활을 내가 직접 하다 보니까 아버지 입장이 점점 이해가 되더라고.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이런 것들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장교로 지원하기로 한 거야.”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안 되는 이유일지 모르지만, 기운상에게는 중요한 이유였다.
이강진은 기운상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더 자신감이 생기네. 고마워, 열심히 해 볼게.”
한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강진.
그가 해 준 말이 기운상에게는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 * *
백우호와 함께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하게 된 이강진.
식사를 하면서 이강진은 기운상과 만났던 일들을 전해 줬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기운상의 장교 지원 선언이었다.
“아버지를 그토록 싫어하던 운상이가 그런 결정을 다 내리다니. 확실히 군대를 갔다 오면 자신의 가치관이 약간 바뀌는 거 같단 말이야.”
“그렇긴 하지.”
이건 군대의 좋은 측면이면서 동시에 나쁜 측면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기운상에게는 좋은 측면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아, 깜빡할 뻔했네.”
백우호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거 받아.”
“이게 뭔데?”
“체크 인 아웃 무대 방청권. 여기서 합격하면, 다음 무대가 결승이야.”
“드디어구나.”
래퍼가 되고 싶었던 백우호.
그도 기운상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무대 보러 올 거지?”
이강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난생처음 보는 랩 오디션 현장은 어떨까.
새로운 경험을 앞둔 이강진은 벌써부터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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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백우호 (1)
백우호한테서 받은 티켓은 두 장이었다.
이강진 혼자 갈 수도 있었지만, 요즘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기왕이면 체크 인 아웃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인을 찾아서 같이 데려가고 싶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한지윤이었다.
-저, 요즘 매번 재방송으로 보고 있어요. 마음 같아선 리얼 타임으로 챙겨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드라마 촬영 때문에 많이 어렵더라고요.
한지윤이 래퍼 오디션을 좋아하게 되다니, 의외였다.
나긋나긋한 분위기를 지닌 그녀와 랩의 이미지는 잘 안 어울렸다.
그러나 취향은 원래 존중해 주라고 있는 거 아닌가.
이강진도 원래는 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백우호 덕분에 하도 이런저런 랩을 많이 듣다 보니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마음 같으면 저도 강진 씨하고 같이 가서 직접 체크 인 아웃 무대 보고 싶은데…….
시간은 낼 수 있었다. 때마침 체크 인 아웃 녹화 날, 한지윤은 촬영 스케줄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갈 수 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윤 씨가 너무 유명인이 되어 버려서 문제군요.”
한지윤이 오디션 무대를 관람하러 간다는 소식이 기자들을 통해 퍼지기라도 한다면, 그날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래퍼들을 제치고 한지윤이 관중의 관심을 독점할 수도 있다.
래퍼들이 중심이 되어 꾸며지는 프로그램인 만큼, 그들이 주인공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지윤은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잡음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충분히 이강진과 함께 갈 수 있는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좋은 기회를 다른 이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그래야죠. 저 대신해서 우호 씨 응원 열심히 해 주세요.
“네, 지윤 씨 말대로 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강진은 2순위인 라인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인혁이 형, 난데.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설마 일 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오히려 그 반대야.”
혹시 이강진이 주말에도 그에게 업무를 넘길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라인혁.
아니라는 이강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약간 안심했다.
“형, 체크 인 아웃 좋아하지?”
-당연하지. 우호가 있으니까 더 재미있더라. 한때 내 후임이었던 애가 저런 큰 무대에서 랩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고.
“내가 이번에 우호한테 방청권 티켓 받았거든. 같이 보러 갈래?”
-뭐? 진짜?
라인혁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었다.
그가 체크 인 아웃의 광팬이라는 건 주변인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강진은 가장 먼저 라인혁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라인혁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무조건 가고 싶어 할 터.
-당연히 가야지! 약속이 있긴 한데, 그건 취소하면 되니까. 누구한테 양도하지 말고 그 한 자리, 나한테 줘라. 알았지? 약속이다?
“하하, 알았어. 그리고 지금 집이야?”
-집? 어, 그렇긴 한데.
“그럼 내 집으로 좀 와 줄 수 있어? 티켓 바로 줄 겸, 그리고 일도 할 겸해서.”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지 라인혁은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집이 가까우니까 일단 이강진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걸어서 15분 정도.
편안한 츄리닝 차림으로 이강진의 집을 방문한 라인혁.
초인종 소리를 듣자마자 이강진은 바로 현관문을 열어 줬다.
“어서 와.”
“우호는?”
“무대 연습한다고 밖에 있어. 밤새도록 연습해야 할 거 같다고 아까 연락 왔으니까 아마 오늘은 안 들어올 거야.”
“설마 우호 없다고 심심해서 나 부른 건 아니겠지?”
“심심할 틈이 없어, 저것 때문에.”
거실 쪽을 가리키는 이강진.
바닥에 뭔가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색종이, 가위, 풀, 하드보드지, 기타 등등.
“응원 도구 만들려고. 플래카드 같은 거 만들면 좋잖아. 플래카드에 우호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적어 놓으면, 카메라가 우호 이름 한 번이라도 더 비춰 줄 테니까. 안 그래?”
“하긴, 그렇지.”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이강진의 말에 라인혁은 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래! 우호를 도와주는 일인데, 까짓것 하지, 뭐!”
결국 야심한 밤에 갑자기 불려온 라인혁은 이강진과 마찬가지로 응원 도구 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되었다.
* * *
온갖 응원 도구를 챙겨서 방송국으로 향한 두 남자.
백우호는 방송 준비를 위해 한발 먼저 현장으로 향했다.
아직 입장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방송국 주변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줄을 선 이강진은 백우호보다 더 떨고 있는 라인혁을 보면서 물었다.
“형이 왜 떨고 있어?”
“모, 몰라. 내가 방송국에 처음 와서 그런 건가?”
반면에 이강진은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그렇게까지 떨리진 않았다.
떨린다기보다는 걱정이 들었다.
‘우호가 잘해야 할 텐데.’
백우호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이강진과 라인혁이 해야 할 건 하나밖에 없다.
‘응원뿐이지!’
군대에서 갈고닦은 성대의 힘으로 열심히 백우호를 응원하기로 결심했다.
* * *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줄 맞춰서 입장해 주세요!”
스태프들의 말에 따라 관중이 한 명씩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 모인 관중의 숫자는 2백여 명.
이들 사이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확 사로잡기 위해 이강진은 라인혁과 밤새도록 만든 응원 도구를 꺼냈다.
화려한 플래카드. 번쩍번쩍 빛나는 응원봉까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끔 너무 높게 추켜들진 않았다. 어차피 플래카드와 응원봉 자체가 굉장히 화려했기 때문에 높게 들어 올리지 않아도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수 있었다.
대기 시간이 끝난 뒤.
진행을 맡은 MC가 무대 위로 올랐다.
“대한민국 최고의 래퍼를 발굴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 체크 인…….”
“아웃!”
관중이 MC의 말에 후창을 했다.
다시 마이크를 든 MC가 이곳을 찾은 관중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체크 인 아웃 MC를 맡고 있는 이재웅입니다. 여러분, 무대 보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네에에!”
“좋습니다. 그럼 이번 배틀의 룰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생방송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래퍼들은 30명 중 단 열 명뿐.
이번 무대가 결승전을 제외한 마지막 무대이기도 했다.
룰은 간단했다.
“세 명씩 한 팀으로 꾸려져 무대를 펼치게 됩니다. 그러면 총 열 번의 무대가 펼쳐지겠죠? 경쟁은 팀 대 팀의 구도가 아닙니다. 같은 무대를 펼쳤던 세 명 중에서 가장 좋은 무대를 펼친 단 한 명을 뽑습니다. 이렇게 각 팀에서 선출된 열 명이 생방송 무대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거머쥐게 됩니다.”
팀끼리 붙는 게 아닌 팀원끼리 붙는 시스템이었다.
룰 설명을 들은 이강진은 혀를 찼다.
‘서로 합심해서 열심히 무대를 꾸미게 만들어 두고, 그중에서 단 한 명만 생존시키겠다니.’
서바이벌 오디션은 이토록 잔인했다.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결승 무대로 올라서기 위해선 가장 돋보이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3인 중 한 명을 고르는 건 심사위원들의 몫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따로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의욕을 상실하진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심사위원들의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는 관중이 있는 반면, 모르는 관중도 있었다.
“여러분들의 호응을 얼마나 많이 이끌어 내느냐. 관중의 열기와 반응을 보고 점수를 매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마음에 드는 래퍼가 있다면 열띤 호응을 보여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국 관중도 간접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래퍼들을 밀어줄 수 있는 셈이었다.
이강진이 라인혁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어때, 형. 응원 도구 만들어 오길 잘했지?”
“역시 이강진! 훌륭하다!”
이강진의 선견지명 덕분에 이들의 어깨에 힘이 실렸다.
단둘뿐이라 하더라도 이강진과 라인혁은 일당백의 기세로 응원전을 펼치기로 했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와아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두 남자의 목소리에 관중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건 그저 몸풀기에 불과하다.
‘어서 올라와라, 우호야! 우리가 미친 듯이 응원해 줄 테니까!’
* * *
백우호는 열 팀 중 가장 마지막인 열 번째 순서에 배치되었다.
아홉 팀의 무대를 보는 동안, 이강진은 걱정이 앞섰다.
무대가 다 하나같이 수준급이었다. 프로 못지않은 완벽한 솜씨. 게다가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무대 매너까지.
열띤 무대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관중은 무대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지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가면 목소리를 지를 힘조차 없을 것이다.
‘이래서 팀끼리 대결하는 게 아니라 팀원들끼리 대결하게끔 했구나.’
만약 팀전이었더라면 앞에서 공연을 펼친 팀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마지막 무대가 관중의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는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관중의 호응을 중요시 여기는 곳에서 마지막 무대는 엄청나게 큰 메리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드디어 열 번째 팀이 올라왔다.
백우호와 두 명의 팀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관중은 다시 한번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강진과 라인혁은 서로 빠르게 눈을 마주쳤다.
함성 일발 장전!
백우호가 랩을 펼칠 때, 타이밍에 맞춰서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질렀다.
“백우호 잘한다!”
“최강 래퍼, 백우호! 파이티이이잉!”
행군을 나설 때에도 이렇게까지 기합 넘치는 파이팅 구호를 외쳤던 적은 없었다.
플래카드와 응원봉을 흔들면서 백우호를 응원하는 두 남자.
카메라가 플래카드를 든 이강진을 비췄다.
다른 관중에 비해서 확실히 두 남자는 눈에 확 띄었다.
두 전우의 응원 덕분일까, 백우호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지. 계속 앞을 향해 전진 또 전진.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내겐 So Easy!”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 무대 자체를 즐기기 시작한 백우호. 그의 흥에 관중도 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정적인 무대가 모두 끝난 뒤.
관중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송국을 나섰다.
누가 결승전에 진출했는지, 그건 관중에겐 비밀이었다.
방송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아니면…….
‘오늘 저녁에 우호한테 들으면 되겠군.’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지인 찬스다.
* * *
집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샤워를 하고 백우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지, 벌써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저녁 9시.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다, 강진아.”
백우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강진. 그를 보자마자 닦달하듯 물었다.
“어떻게 됐어? 떨어졌냐? 아니면 붙었어?”
순간 백우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 됐나?’
한숨을 푹 쉬던 백우호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브이(V) 자를 그리는 그의 손.
“살아남았지! 하하하하하!”
“이 녀석이! 되도 않는 연기를 하다니!”
백우호에게 헤드록을 거는 이강진.
그래도 우호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친구 입장에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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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백우호 (2)
생방송 무대에 진출하게 된 백우호.
이제 그곳에서 순위권에 들기만 하면 된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역시 우승!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백우호는 영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보였었다.
왜냐하면 오디션에 참가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쟁쟁한 래퍼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의 실력으로 직접 생방송 무대까지 진출하게 되니, 백우호는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해볼 만하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백우호는 결승 무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거실에서 펜대를 굴리던 백우호가 소파에 앉은 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이강진에게 말을 붙였다.
“나, 이번에 내가 만든 오리지널곡으로 참가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오리지널곡은 어렵잖아.”
대중의 귀에 익은 노래를 선곡하는 것이 위험부담이 덜할 터.
그럼에도 백우호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 예전부터 준비했던 곡이 있거든. 가사만 쓰면 돼.”
“무슨 곡인데?”
백우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중에 결승 무대에서 직접 확인해 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결승 무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단 5일뿐.
5일 후면, 백우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지도 모르는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1등 하면 우승 상금만 2억이더라. 그리고 차도 한 대 준다고 하던데.”
“면허는 있어?”
“있지. 근대 내가 원하는 차가 아니어서 좀 고민되긴 하더라.”
“뭐, 조금 타고 다니다가 나중에 중고로 팔고 새 차로 바꾸면 되잖아. 어떤 차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차를 공짜로 준다.’라는 것에 포인트를 맞춰야지.”
이강진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 공짜로 차를 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중고차도 아니고 새 차다.
그야말로 행복한 고민이다.
물론.
우승을 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걸려 있다.
2등은 상금 5천만 원, 3등은 2천만 원. 4등부터는 국물도 없다.
그간의 노력을 회수하려면 무조건 3위 안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백우호의 고민은 길어졌다.
“작사가 어렵네, 어려워…….”
백우호가 집중하는 사이, 이강진은 조심스럽게 거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괜히 그에게 방해가 될까 봐 최대한 인기척을 덜 내려고 노력했다.
고 3 수험생을 둔 부모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당분간 조용히 살아야겠군.’
5일만 버티면 된다.
그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다.
* * *
대망의 결승전.
생방송 시간은 저녁 10시부터 12시까지다.
그 전에 이강진은 저녁 8시쯤에 일행과 합류했다.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던 라인혁이 손을 크게 흔들면서 이강진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렸다.
라인혁의 옆에는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들이 서 있었다.
“마등이 형, 명찬이 형, 오랜만이야.”
“진짜 오랜만에 본다, 강진아.”
“그러게. 요즘 사업한다며? 돈 많이 벌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겸손을 차리는 이강진.
전마등이야 계속 다니던 회사에서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고.
김명찬의 근황이 궁금했다.
“명찬이 형은 뮤지컬 쪽,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다음 달에 ‘옥탑방 연대기’라는 작품에서 처음으로 조연 맡기로 했다. 티켓 줄까?”
“준다면야 좋지.”
뮤지컬 배우가 꿈이라고 밝혔던 김명찬.
당시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이강진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김명찬은 진심이었다.
무명 배우 시절이 좀 길었지만, 그래도 점점 성장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가고 있었다.
김명찬에게 뮤지컬 티켓을 받는 사이,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다른 일행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서일주, 황지웅, 고필중, 마지막으로 최근에 전역한 막내 기운상까지.
1075대대 1분대 전우들이 아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이곳에 뭉치게 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우호가 잘 준비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근처 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려고 하던 중에 고필중이 걱정을 드러냈다.
이들 모두 백우호가 출연하고 있는 체크 인 아웃을 매 주 챙겨 보고 있었다.
비록 거리는 멀지만 마음으로 쭉 그를 응원해 왔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늘, 현장에서 직접 백우호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오종한, 안준렬, 그리고 김철도 오고 싶어 했었지만, 각자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그들은 참가하지 못했다.
못 온 사람들 몫까지 남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응원하면 된다.
각자 미리 만들어 온 응원 도구를 챙긴 전우들.
이제 슬슬 시작할 시간이다.
* * *
생방송 무대는 지난번에 이강진이 라인혁과 함께 찾았던 무대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이강진과 일행은 백우호의 아버지, 어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네가 강진이로구나! 저번에 우호한테 휴가 양보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저도 우호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요. 그에 대한 보답이었을 뿐입니다.”
백우호의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강진은 그에게 자신의 휴가를 양도했다.
예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백우호의 부모는 이강진의 선행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슬슬 생방송이 시작하려고 했다.
이강진은 다시 전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응원 도구를 챙겼다.
오늘의 응원단장은 고필중이 맡기로 했다.
방송이 시작되고 최후의 10인이 무대에 오를 때, 고필중이 신호를 보냈다.
“전방에 힘찬 응원의 함성, 무한대로 발사!”
“백우호, 파이티이이잉!”
“힘내라, 우호야!”
“군인 정신으로 반드시 우승해라!”
군대에서 다져진 인연들이다 보니 응원도 군대식으로 했다.
엄청난 응원 소리.
백우호는 그들을 향해 오른손을 흔들면서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백우호의 무대는 공교롭게도 지난번 무대와 마찬가지로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었다.
첫 번째 래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래퍼 메탈런. 속사포 랩이 특기이며,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남자다.
‘첫 무대부터 강렬하네.’
괜히 우승 후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현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다음에도 래퍼들의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9번째 래퍼가 무대를 내려간 뒤.
드디어 마지막 열 번째 래퍼, 백우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그의 개인 스토리를 다룬 영상이 상영되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겪어 온 가난한 생활. 그리고 군대에서 쌓아 올린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까지.
영상이 끝난 뒤, 드디어 백우호의 오리지널곡이 세상에 처음 드러나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풍족 아닌 부족. 힘들었었지,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에 난 대단히 만족.”
담담하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쭉 나열하는 백우호.
그의 시선이 이강진 일행에게 고정되었다.
“남들이 말하는 군대, 난 힘들지 않았어. 함께했던 전우들, 지금 날 보러 이 자리에 왔어.”
백우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당당하게 말할게. 나, 오늘 여기서 우승 차지할래!”
우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전우들은 크게 환호했다.
하이라이트에 접어드는 백우호의 무대.
비트, 퍼포먼스, 그리고 마무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무대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호 씨의 무대를 여태껏 많이 봐 왔지만, 오늘만큼 임팩트 있는 무대는 처음 봤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리고 랩을 통해서 백우호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었고요.”
“기나긴 체크 인 아웃의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좋았던 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사위원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결승은 심사위원들의 의견만으로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는다.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의 투표가 가장 많이 반영된다.
모든 무대가 끝난 뒤.
MC가 봉투 한 장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지금 이 봉투 안에 3위, 2위, 그리고 대망의 1위를 차지한 래퍼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우선 3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3위!”
긴장감을 유발하는 BGM이 이어졌다.
“오진황!”
5번째 무대를 펼쳤던 레퍼가 3위를 차지했다.
“다음, 2위!”
백우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음을 비우려고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메탈런!”
강력한 우승 후보가 2위로 불렸다.
현장이 크게 술렁였다.
그럼 대체 1위는 누구란 말인가?
“대망의 1위!”
모두가 숨을 죽였다.
메탈런을 꺾고 1위를 차지한 역전의 용사는 과연 누구일까.
“백우호! 축하합니다!”
무대 양옆에서 폭죽이 터졌다.
정말로 우승을 차지해 버린 백우호.
그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백우호가 우승을 차지하자마자 이강진과 전우들은 단숨에 무대로 뛰어 올라갔다.
“축하한다, 우호야!”
“얘들아, 헹가래 하자, 헹가래!”
“하나, 둘, 셋!”
전우들이 태워 주는 헹가래. 백우호는 그제야 자신의 우승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드디어 해냈다!
* * *
“우리 우호의 우승 축하를 위하여, 건배!”
“건배!”
멀리서 온 전우들을 위해서 백우호는 체크 인 아웃 뒤풀이 현장을 일찍 빠져나와 이들과 합류했다.
자칫하면 위로주가 될 뻔했던 술잔. 백우호는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미친 듯이 먹고 마시고 하자고!”
“좋지!”
“자, 다들 잔 채워라! 물주님께서 마시자고 명령하시잖아!”
술자리에선 다 필요 없고 술값을 내주는 물주가 왕이다.
기분 좋게 우승을 차지한 백우호. 체크 인 아웃 초대 우승자가 사 주는 술의 맛은 기가 막혔다.
“강진아.”
백우호가 옆에 앉은 이강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네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난 생방송 무대도 못 서 보고 광탈했을 거야. 정말로 고맙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 네가 잘해서 얻은 결관데.”
“짜식, 또 그렇게 겸손 차리긴. 인마, 이런 건 잘난 척해도 된다고. 내가 우승한 것에 네 지분도 포함되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해. 나도 동의하니까.”
“하하하! 그래, 알았다, 알았어!”
백우호에게 있어서 이강진은 최대주주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도움이 정말로 컸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즈음, 전마등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이렇게 모인 김에 모임이라도 하나 만들까? 저번에 우호, 네가 슬쩍 말 꺼낸 적 있었잖아.”
“그랬었지. 정말로 만들까?”
전역자들끼리 모임을 만드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모임명은 뭐로 할 건데?”
황지웅이 아주 날카로운 지적을 펼쳤다.
모임 명칭은 그 모임의 색깔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그때 이강진이 아주 간단하게 답을 내놨다.
“심플하게 ‘1중대’ 어때? 어차피 다 1중대 전역한 사람들만 모였잖아.”
그리고 1중대로 해 둬야 오호만이나 김철처럼 다른 분과에서 근무했던 사람들도 이 모임에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1중대. 좋은데?”
“그래, 원래 이런 모임 명칭은 기억하기 쉽게 해야 좋지. 그래야 나중에 안 까먹고.”
“1중대로 가자!”
속전속결로 정해진 전역자들 모임, 1중대.
모임명도 정해졌고, 백우호의 우승 건도 있고.
축하해야 할 일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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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마스터 (1)
백우호가 우승을 차지한 뒤, 여기저기서 그를 섭외하기 위한 러브콜이 쇄도했다.
덕분에 백우호는 이강진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오늘도 이른 아침에 나가서 라디오 프로그램 녹화를 마친 백우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이강진의 집으로 돌아왔다.
“고생했다, 우호야. 밥 먹었어?”
“아니, 이제 먹어야지.”
“해 놓은 거 있으니까 와서 먹어라.”
이강진이 직접 만든 밥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얼큰한 부대찌개가 백우호의 입안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짜식, 갈수록 요리 실력이 느는 거 같은데?”
“그래야지. 이래 봬도 요식업 대표인데.”
셰프급 수준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요리를 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방에서 요리하는 셰프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고충을 겪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요리 연습에 몰두하다 보니 이강진도 이제 곧잘 하는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아. 그렇지, 참.”
밥을 먹던 도중에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깜짝 소식을 전했다.
“나, 어제저녁에 소속사 계약했다.”
“어디랑?”
“ART. 어딘지 알지?”
“알다마다.”
대한민국 3대 연예 기획사 중 한 곳이기도 하며, 성태강이 속해 있는 보이 그룹, KGE의 소속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너, 태강이 형이랑 한솥밥 먹게 됐네?”
“그렇지. 사실 소속 계약 관련 이야기는 우승하기 전부터 논의하고 있었거든. 아마…… 본선 진출했을 때부터? 너도 알지? 태강이 형 매니저, 최창우 씨.”
“모를 리가 있나.”
가끔 성태강과 휴가를 나갈 때마다 이강진을 시내까지 바래다준 고마운 사람이다.
“창우 씨가 먼저 나한테 연락을 했었지. 계약 조건은 섭섭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무조건 자기 쪽이랑 계약하자고. 나한테 뭐랬더라. 스타성을 보았다나?”
눈썰미가 제법 좋은 사람이었다.
백우호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건, 체크 인 아웃 우승자가 누가 될지 미리 예견했다는 것과 동일한 뜻 아닌가.
‘두석이 말고 사람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내 주변에 또 있었네.’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법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다.
데뷔하자마자 우승도 하고, 대형 기획사에서 먼저 스카우트 제의까지 왔으니까.
“그리고 말이야. 나, 이제 슬슬 이사하려고.”
이강진도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백우호는 ‘체크 인 아웃 방송 일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는 전제 조건으로 이강진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우승도 했고,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신세를 질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이사 갈 집은 알아봤어?”
“ART가 제공하는 숙소가 있더라고. 아파트인데, 꽤 좋더라. 그래서 당분간은 거기에 머물까 생각 중이야. 나중에 매니저 붙으면, 나 픽업하기도 쉽고 그럴 테니까.”
“좋은 생각이야. 이사 시기는 언제?”
가장 중요한 건 시기다.
스마트폰으로 달력 어플을 실행시킨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액정 화면을 직접 보여 주면서 말했다.
“이날.”
“3일 후? 엄청 빨리 나가네.”
“이때 아니면 이사할 시기가 없을 거 같아서.”
체크 인 아웃 초대 우승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한창 대중의 입에서 백우호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할 때 이곳저곳에 출연해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려야 한다.
연예인은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존재다. 이때 존재감을 알려야지, 나중에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사는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포장이사 부를 거니까. 너한테 신세 진 게 얼만데, 이사까지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지.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야.”
싱긋 웃어 보인 백우호가 이내 이강진에게 슬쩍 말했다.
“이제 나 나갈 테니까 여자 친구 생기면 마음껏 집으로 데려와도 돼.”
순간 이강진은 백우호가 자신과 한지윤의 관계를 눈치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까진 모르는 듯했다.
‘사람 철렁하게 만드네.’
하여튼 방심할 수가 없다.
* * *
백우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3일 뒤, 그는 이강진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전부 다 뺐다.
그리고 이틀 후에 한지윤이 이강진의 바로 옆 동으로 새롭게 이사를 왔다.
여러 곳을 찾아봤지만, 가급적이면 이강진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거주지를 잡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한지윤이 새롭게 이사한 집을 찾은 이강진.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소리와 함께 한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누구세요?”
“접니다.”
“어머! 잠시만요!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뭔가를 황급히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현관문이 열렸다.
“강진 씨, 일찍 오셨네요?”
“예, 짐 정리 도와드리려고요.”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에는 남자의 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제 더 이상 한지윤과 남이 아니게 된 이강진.
소중한 여자 친구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그가 집까지 출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지윤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좀…… 그, 그럼 저쪽 방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마세요. 아셨죠?”
신신당부를 하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궁금증만 늘었다.
“위험한 물건이라도 있나요?”
“강진 씨가 절대로 보면 안 되는 것들이 있어서 그래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그제야 이강진은 한지윤이 저 방에 무엇을 숨겼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애인 사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은 사귄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같이 동거하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다.
아직 이강진에게 감추고 싶은 것들이 많을 터.
이강진은 이런 것 하나 이해 못 해 줄 남자 친구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화장실은 들어갈 수 있죠?”
“네, 괜찮아요.”
그러면 문제없다.
짐을 옮기는 도중에 생리 현상이 발생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정 급하면 이강진의 집까지 돌아가서 해결하고 오면 되긴 하지만, 그러는 것도 시간 낭비다.
소매를 걷어 올린 이강진이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자, 뭐부터 옮기면 될까요?”
군대에 있을 때부터 길러 온 근력을 사용할 때가 왔다.
* * *
이강진 덕분에 짐 정리가 훨씬 빠르게, 그리고 수월하게 끝났다.
이사 첫 끼는 역시 중국집이다.
초인종 소리를 듣자마자 한지윤이 벌떡 일어섰다.
“밥 왔나 봐요. 계산하고 올게요.”
그동안 이강진은 혹시 몰라서 배달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살짝 몸을 숨겼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배달원은 한지윤을 유심히 바라봤다.
안경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한지윤을 보고서 고개를 한 차례 갸우뚱한 배달원은 ‘에이, 설마 배우 한지윤은 아니겠지.’ 하면서 철가방을 열었다.
“만 5천 원입니다.”
“네, 여기 있어요. 수고하세요.”
목소리를 들어 보니 또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굉장히 애매했다.
의심이 많은 배달원을 보낸 한지윤은 숨어 있는 이강진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나오셔도 돼요.”
하루 종일 힘을 썼으니, 이제 식사로 에너지를 보충할 때다.
자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
거실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각자 먹을 것을 앞에 두고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때 한지윤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이사 온 이후로 여기서 처음으로 밥 먹는 분이 되셨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본의 아니게 첫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지윤 씨가 이쪽으로 이사 왔다는 건 부모님하고 소속사만 알고 있나요?”
“아니요. 친구들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친구들 사는 곳하고 여기는 제법 멀어서 아마 특별한 일 아니면 잘 안 놀러 올 거예요.”
“그렇군요.”
묘하게 안심이 됐다.
외부에서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은, 다시 말해서…….
“친구분들이 못 오는 만큼 제가 자주 와야겠군요.”
이강진의 말에 한지윤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운 모양인지 한지윤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바, 바라 식당은 배달 서비스 안 하나요?”
“조만간 할 예정입니다. 배달 어플하고 지금 이것저것 이야기 나눠 보고 있어요.”
그동안 너무 바빠서 전화 주문은 받지 못했던 바라 식당.
하나 이제 가게가 안정화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영역을 좀 더 확대해 보기로 했다.
배달뿐만 아니라 온라인 판매도 개시할 예정이다.
인기 있는 메뉴들을 인스턴트화시켜서 편의점, 마트에도 공급할 구상까지 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강진은 나두석과 같이 일주일에 4일 이상을 외근으로 소화해야만 했다.
“많이 바쁘시겠네요.”
“지윤 씨에 비하면야 새 발의 피죠. 이번에 새로 영화 들어가신다고 하던데.”
“네. 캐스팅은 전부 다 완료됐어요. 다음 주가 크랭크인이에요.”
계속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한지윤.
이제 그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미국에서 캐스팅 제의가 하나 들어왔어요. 생존을 소재로 한 드라마인데, 한국인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래서 아마 영화 촬영 끝나면 바로 오디션 보러 가야 할 거 같아요.”
배우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기회의 땅, 미국.
드라마에서 큰 활약을 펼친다면, 할리우드 진출도 꿈은 아닐 터.
“미국 진출도 머지않았군요.”
“아니에요. 아직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확정된 것도 아니니까요. 오디션을 영어로 본다는데, 그것 때문에 시간 내서 영어 학원도 다니고 그러고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공부는 계속 해 둘 걸 그랬어요.”
누가 이런 기회가 찾아올 줄 알았으랴.
이강진은 회귀 이전의 한지윤을 떠올렸다.
그때도 한지윤은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었다.
단,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 꿈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미국 진출을 이룬 셈이었다.
물론 한지윤의 말대로 오디션을 통과해야 하지만.
‘지윤 씨라면 문제없겠지.’
그녀가 지닌 스타성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빛날 것이다.
이강진은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럼 지윤 씨가 미국으로 떠나시기 전에 여러 가지를 해야겠군요.”
“여러 가지라니, 어떤 거요?”
“애인끼리 할 수 있는 좋은 거요.”
한지윤의 얼굴이 아까에 비해서 훨씬 더 빨개졌다.
* * *
한가한 주말.
이강진은 마음 같으면 오늘, 한지윤과 데이트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지금 영화 촬영 준비로 인해서 집을 비운 상태였다.
“우호나 부를까?”
오늘은 왠지 집에 가만히 있기 싫었다.
스마트폰을 찾을 무렵.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어머니한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아들, 오늘 쉬는 날이지?
“네, 그렇죠.”
바라 식당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계속 가게를 열지만, 바라 코리아 본사 직원들은 주말엔 웬만하면 출근을 하질 않는다.
-민수 씨가 오랜만에 네 얼굴 보러 가자고 해서, 지금 올라갈까 하는데 괜찮니?
집에만 있다 보니 좀이 쑤셨는데, 마침 잘됐다.
“네, 아저씨랑…… 아니, 아버지랑 같이 올라오세요.”
몇 년 동안 아저씨라는 말을 쓰다가 아버지라고 부르려고 하니 입에 잘 안 달라붙었다.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이러다가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면 섭섭해하시겠어.’
이제 정식으로 재혼도 했으니,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미리 연습을 좀 해 두기로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러던 도중에 이강진은 자신의 모습에 웃고 말았다.
“내가 무슨 옹알이하는 애기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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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마스터 (2)
이강진이 서울로 이사 오고 난 뒤에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 그리고 새아버지가 이강진의 집을 찾았다.
집을 보자마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엄청 크구나.”
“네, 혼자 있으니까 더 큰 거 같아요.”
“얼마 정도 줬니?”
이강진은 이 집을 월세도, 전세도 아닌 매매로 구입했다.
강남에 위치한 집인 데다가 평수도 크다 보니 금액이 어마어마하다.
수십억을 호가하지만, 이강진은 굳이 금액대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적당한 가격에 구입했어요.”
“비싸 보이는데.”
“요즘은 집값이 많이 안정화돼서 괜찮아요. 크게 부담 안 되는 가격으로 샀으니까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거짓말 중에서도 이런 거짓말이 없을 것이다.
집값 안정화는 이강진이 기억하는 한,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난제 중에서도 난제다.
어머니와 다르게 새아버지가 된 황민수는 이강진이 어째서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면서 얼버무리는지 대충 눈치챈 듯했다.
그도 이강진을 돕기 위해 어머니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강진아, 이거, 네 엄마가 싸 준 김치하고 장조림이다. 그리고 이건 식혜.”
“굳이 이런 거 안 가져오셔도 되는데.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아버지.”
순간 ‘아저씨’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연습한 대로 잘됐다.
아버지라는 말을 듣자, 황민수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 호칭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구나. 순간 소름이…….”
“하하하! 왜 그러세요. 저 무안해지잖아요.”
이렇게 보여도 이강진은 정말 큰 용기를 내서 말한 거였다.
물론 황민수도 그걸 잘 안다. 잘 알기에 그도 앞으로 이강진을 아들로 대하게끔 최선을 다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 * *
집 내부를 둘러보던 이강진의 어머니가 간단하게 소감을 들려줬다.
“채광 잘되고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물도 시원스럽게 잘 나오고. 다 좋은데…… 역시 너무 휑한 느낌이 드는구나.”
“저 혼자 살아서 그래요. 얼마 전까지 이곳에 제 친구하고 같이 살았었는데, 그때는 시끌벅적했거든요.”
“둘이 살면 외롭지 않고 좋지. 병이 나도 누군가가 옆에서 보살펴 줄 수 있고. 이 엄마는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어디 참한 아가씨 있으면 적극적으로 사귀기도 하고 그러렴.”
이른 결혼을 암시하는 듯한 그런 어투였다.
“엄마, 저 아직 20대예요. 결혼을 논하기에는 한참 멀었다고요.”
“얘 좀 봐. 내가 언제 결혼하라고 했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굳이 결혼 안 해도 같이 동거도 하고 그런다고 하더만. 그러다가 애 생기면 결혼도 하고.”
“거봐요. 결국 결혼 이야기잖아요.”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결혼 압박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아직 이강진은 한창이다. 물론 회귀하기 이전의 이강진은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 혼기를 놓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20대에 벌써부터 결혼을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이강진이 생각하는 적정 연령은 30대 초반이었다.
그때가 되면 사업도 안정화되고.
그리고…….
‘지윤 씨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을 때니까.’
미국 진출을 비롯해서 이제 막 왕성하게 발을 넓혀 가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 한지윤을 결혼이라는 족쇄로 묶어 두고 싶지 않았다.
아직 이들에겐 이르다.
결혼보다는 연애의 달콤함이 더 필요한 시기였다.
하나 이강진의 어머니는 아들과 생각이 달랐다.
“지윤이 같은 며느리가 좋은데. 예쁘고, 성격도 좋고, 연기도 잘하고. 어떠니, 강진아?”
“저도 물론 좋죠. 그런데 지윤 씨는 연예인이잖아요? 저 같은 일반인이 어떻게 만나겠어요.”
오늘따라 이강진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상당히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미 사귀고 있어요.’
* * *
집 구경을 마친 이들 가족은 바라 식당 서울 지점에 들렀다.
“호만아!”
“헉, 스승님!”
두 남자가 오랜만에 재회했다.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사이, 이강진의 어머니는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직원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던 오호만이 황민수 부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앉아 계세요, 스승님. 식사 아직 안 하셨죠? 제가 금방 차려 드리겠습니다!”
“기왕이면 청주에서 먹었던 거 말고 네가 개발한 신메뉴들 위주로 내와 봐라. 요즘 서울 지점이 본점보다 더 맛 좋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리더라고.”
“스승님, 혹시 제자를 견제하시려는 겁니까?”
“요 녀석이. 내가 알려 준 대로 잘 만들었나 확인하려고 그러지! 잔말 말고 가져오기나 해!”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황민수, 오호만 콤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죽이 잘 맞았다.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었기에 오호만도 이들과 함께 늦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중간에 황민수가 이강진에게 물었다.
“이번 달에 세 곳 더 오픈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천하고 수원하고 또…… 어디였지?”
“천안입니다.”
“그래, 천안. 그럼 거기 세 곳을 맡을 주방장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미 호만이 형한테 와서 다 교육받고 가셨어요. 제가 불시에 몇 번 들러서 맛도 체크해 봤는데, 호만이 형한테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맛있더라고요.”
“흠, 거기도 오픈하면 몰래 한번 가 봐야겠구나.”
바라 식당의 창시자이기도 한 사람이 바로 황민수 아니겠나.
그의 입장에선 서울 지점을 비롯해서 다른 가게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여나 맛을 못 내거나 아니면 손님들을 모질게 대해서 괜히 바라 식당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이강진이 그런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수십 번도 넘게 면담하고 확인도 한 사람들 위주로 바라 식당이라는 간판을 맡기기로 했거든요.”
“네가 직접 봤다고 하면 믿을 만하겠군.”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이강진만큼은 무조건 믿는다.
이강진 덕분에 바라 식당이 이렇게 대박 궤도에 오른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 오늘은 당일치기로 오신 거예요?”
“음? 그렇지. 내려가서 또 가게 봐야 하니까.”
“기왕 오신 김에 엄마하고 같이 서울 구경하면서 데이트도 하고 내려가세요. 만약 자고 내려가야 한다면, 제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남는 방은 많거든요.”
“아니, 됐다. 서울은 복잡해서 싫어.”
서울은 황민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서 여태껏 쭉 청주를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타 지방의 공기는 영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요?”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잘 살고 있다는 것도 봤고 오랜만에 직원들 얼굴도 봤으니, 우리는 그냥 밥 먹고 바로 내려가마. 바쁘기도 하고.”
두 사람의 뜻이 이렇다는데, 이강진이 억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서울 구경을 시켜 줄 수는 없었다.
“다음에는 쉴 겸해서 아예 날을 잡고 올라오세요. 제가 데이트 코스 짜 드릴게요.”
부모님에게 좀 더 좋고 다양한 곳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 * *
오늘도 나두석과 같이 이른 아침부터 미팅 일정을 소화한 이강진은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보다 너무 오래 걸렸네.”
“그러게 말입니다. 1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3시간이나 걸릴 줄은 예상 못 했네요.”
계획했던 대로만 일이 딱딱 처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 비즈니스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한다.
어제까지만 서로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음에도 바로 다음 날에 말을 바꾸는 업체도 있었다.
이강진은 사업을 하면서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다.
물론 말을 바꾸는 곳이 있으면, 그곳과는 앞으로 일절 연락을 하지 않는다.
다른 곳을 알아보면 되니까.
사업을 하려면 업체와 업체 간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 신뢰가 한번 깨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업체는 그러진 않았다.
‘대신 거기 부장이 말이 좀 많다는 게 단점이지.’
요점만 간단하게 딱 합의하고 끝내면 나두석이 말했던 것처럼 1시간이면 충분히 끝날 안건이었다.
예상 시간을 훨씬 초과한 미팅 덕분에 이강진은 오늘따라 유독 허기가 졌다.
“근처에서 밥이나 먹고 들어갈까?”
“네,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맛집 한번 검색해 볼까요?”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인터넷에 나와 있는 맛집 말고 다른 집을 찾아보자.”
자신이 직접 요식업을 해서일까. 남들이 모르는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취미가 생겼다.
바라 식당도 예전에는 그런 경우였다.
큰길가를 벗어나서 안쪽으로 향했다.
순대국밥집, 돈가스집, 스테이크집, 라멘집 등등.
종류별로 많은 가게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음식점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니, 한적한 공간이 나왔다.
나두석이 걸음을 멈추고 이강진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음식점이 없나 봅니다.”
“저기에 하나 보이는데?”
“예?”
정말이었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안 뜨일 거 같은 아주 작은 음식점.
“저기 가게가 뭘 파는지만 한번 보고 가자.”
이강진의 걸음이 빨라졌다.
간판을 확인하자마자 어떤 가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제 버거집이네.”
과거에도 수제 버거집이 크게 유행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가 떠올랐다.
‘예전에 내가 살던 집 앞에도 괜찮은 수제 버거집이 있었지.’
심지어 일반 패스트푸드점보다도 가격은 싸고 양은 많았다.
사업과 주식이 몽땅 망하고 돈이 없던 시절, 이강진은 그 집에 자주 들러서 햄버거를 사 먹었던 기억이 났다.
“여기 한번 들어가 보자.”
과거의 기억이 이강진의 걸음을 붙잡았다.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셋과 60대로 추정되는 할머니 한 분.
가게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이강진과 나두석을 반겼다.
메뉴판 구성을 천천히 살피는 이강진.
‘메뉴가 심플하네.’
불고기 버거와 불고기 더블 버거 단품과 세트. 치즈 버거와 치즈 더블 버거 단품과 세트. 이게 다였다.
‘세트 구성은 버거 단품과 감자튀김, 그리고 탄산인가?’
단품은 3천 원. 세트는 4천 원으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더블판은 여기에 5백 원씩 더 추가된다.
‘요즘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세트 하나만 먹어도 6, 7천원은 우습게 나오던데.’
가격이 낮으면, 그만큼 내용물이 허술할 수도 있다.
나두석은 낮은 가격을 보고서 불안감을 느꼈다.
“형님, 양 엄청 적게 나올 거 같은데요?”
“일단 시켜 보고. 적다 싶으면 추가로 하나를 더 시켜서 먹으면 되니까.”
이들은 혈기가 왕성한 20대 청년들이다. 한창 먹어야 할 나이이기도 할뿐더러,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나긴 미팅을 소화하고 왔기에 배가 부를 정도로 먹고 싶었다.
이강진은 불고기 더블 버거 세트를, 나두석은 치즈 더블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음식은 금방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가게 사장이 직접 주문도 받고 조리도 하고 서빙까지 전부 다 했다.
음식을 보는 순간.
이강진과 나두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크네.”
상상 이상의 풍성함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군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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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마스터 (3)
일단 양은 합격이다.
하지만 무조건 양만 많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맛.
양보다는 질이다.
“먹어 볼까?”
“예, 식사 맛있게 하세요, 형님.”
“그래, 너도.”
불고기 버거를 손에 쥔 이강진은 입을 최대한 벌렸다.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순간.
“……!”
범상치 않은 맛임을 느꼈다.
나두석도 이강진과 같았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나두석이 이내 입안에 가득했던 내용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엄청 맛있는데요!”
너무 목소리가 컸던 탓일까, 매장 안에서 늦은 식사를 하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두석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배가 고픈 때에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느껴진다. 지금 이강진과 나두석이 딱 그런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놓고 봐도 이 버거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소스가 대박이다.
첫맛은 달콤했다가 중간에 살짝 짭짜름한 맛으로 변한다.
‘단짠단짠’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단것을 먹다 보면 짠 것이 땡기고, 짠 걸 먹으면 단것이 땡긴다는 뜻.
이것들을 소스로 적절하게 녹여 냈다.
이강진은 버거를 내려놓고 빵을 열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불고기, 양상추, 피클…….”
내용물을 확인한 이강진은 그중에서 불고기를 손으로 골라 집어 먹었다.
여태껏 이강진이 먹었던 불고기 중에서 단연 톱으로 뽑을 정도로 맛있었다.
“이 불고기는 그냥 밥이랑 먹어도 될 거 같은데?”
“형님, 치즈 버거도 한번 드셔 보실래요?”
“그러자. 너도 내 거 먹어 봐라.”
“예.”
원래는 식사를 하려고 이곳에 들어왔지만,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요리 연구가 모드를 발동시켰다.
버거를 통째로 먹어 보기도 하고, 이강진이 불고기를 따로 먹어 봤던 것처럼 재료들을 하나하나씩 손으로 골라 집어 먹어 보기도 하고.
‘보통 내공이 아니야!’
가격도 싼 데다 양도 많고, 맛도 좋다.
이걸 상품화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햄버거를 낱낱이 파헤치려고 할 때, 혼자서 식사를 하던 할머니가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맛있나 보구려. 보아하니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예, 근처에 일이 있어서 잠깐 왔습니다. 가볍게 끼니나 때우고 가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맛집을 발견했네요.”
“여기 버거가 참 맛있지. 맛있긴 한데, 잘 알려지지 않아서 문제야. 사장 아가씨가 혼자서 다 하려다 보니까 홍보도 제대로 안 되고. 좀 안타깝지.”
이곳을 자주 찾는 단골로 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강진은 할머니에게 보다 더 많은 정보를 물어보기로 했다.
“평소에 손님이 많이 오나요?”
“아니, 전혀. 내가 여기에 자주 오긴 하는데, 그렇게 많이 못 봤어. 기껏해야 저기 애기들 몇하고 퇴근하는 회사원 한두 명 정도?”
이강진은 늦은 점심시간에 찾아와서 손님이 많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만약 할머니의 말대로라면, 많이 잡아야 하루에 열 명 정도가 한계일 터.
‘이 가격이면 무조건 많이 파는 걸로 손해를 메꿔야 하는데.’
이강진이 보기에는 오히려 손해 보는 장사 같았다.
이렇게 가다간 가게 운영에 큰 차질이 생길 터.
할머니도 그게 걱정되는 모양인지 혀를 차면서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기왕이면 계속 여기서 장사해 줬으면 좋겠는데, 언제 문 닫을지 모르니까 걱정이여.”
이강진도 가급적이면 이런 맛있는 햄버거를 계속 먹고 싶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두석아.”
벌써 치즈 더블 버거 하나를 해치운 나두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 해닝.”
원래는 ‘예, 형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안에 내용물이 가득 차 있어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나두석을 보면서 이강진은 조용히 말했다.
“회의 한 번 더 가져야겠다.”
* * *
대량으로 불고기, 치즈 버거 세트를 구입한 이강진은 그것을 사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양손 가득 버거 세트를 들고서 등장한 이강진이 직원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다들 출출하실 텐데 햄버거 하나씩 드시면서 일하세요!”
대표님이 햄버거를 쏜다!
직원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졌다.
나두석이 그랬던 것처럼 바라 코리아 직원들은 빠른 속도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햄버거 파티가 벌어지는 와중에 한 남자가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어휴, 힘들다……. 응? 뭐야, 이게.”
뒤늦게 등장한 라인혁은 햄버거 하나씩을 들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물었다.
“웬 햄버거예요?”
“아, 이거요?”
“대표님이 사 주셨어요! 팀장님도 드세요.”
라인혁의 것도 따로 챙겨 뒀다.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불고기 버거, 아니면 치즈 버거.
라인혁의 선택은 치즈 버거였다.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 맛있는데요!”
“그렇죠?”
“강진이가 사 왔다고 했었죠? 어디서 사 왔는지 물어봐야겠네요.”
매장 관리 업무 때문에 자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라인혁.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라인혁은 햄버거나 샌드위치, 삼각김밥 같은 것들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많았다.
기왕 먹는 거, 맛있는 걸 먹는 게 좋지 않겠나.
“강진아, 이거, 어디서 사 왔어?”
“아, 그거?”
나두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강진이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서 그의 물음에 답했다.
“‘한아름 수제버거’라는 가게에서 사 온 거야.”
“한아름?”
“오늘 두석이랑 같이 미팅 나갔는데, 맛이 괜찮더라고. 형도 방금 먹었지? 어때?”
“맛있긴 한데…….”
곧이어 이강진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상품화시킬 수 있을 거 같아?”
직접적인 질문. 대답을 하기 전에 라인혁은 가격을 확인했다.
가게에 들렀을 때 미리 메뉴판을 찍어 온 나두석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띄워 그에게 보여 줬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잠깐.”
라인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메뉴판이 아닌, 주방에서 한창 햄버거를 만들고 있는 가게 주인에게 집중되었다.
“이 사람…… 미나 선배잖아!”
대한민국 땅, 참 좁다.
* * *
한아름 수제버거를 운영하고 있는 여인, 차미나.
늦은 시간까지 가게 문을 열고 있던 그녀는 슬슬 매장을 정리하기 위해서 청소에 돌입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영업시간이 끝나서요…… 어머!”
차미나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인혁이 아니니?”
“역시 선배님이셨군요. 혹시나 했었는데.”
라인혁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사진 속에 찍힌 여성은 그가 알던 여인, 차미나가 맞았다.
라인혁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이강진과 함께 이곳을 다시 찾았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차미나는 그제야 이강진이 낮에 왔던 손님임을 알아차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차미나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들을 혼자 놔두기에는 좀…….”
주방 안쪽에 위치한 작은 단칸방.
그 안에서 티비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는 두 아이들을 보면서 라인혁이 차미나에게 물었다.
“선배, 지원 선배는 어디 갔어요? 왜 혼자서 애들을 보고 계신 거예요?”
“…….”
그녀는 라인혁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보였다.
라인혁도 차미나와 만나게 된 게 오랜만이었다. 그렇다 보니 서로에 대한 근황이 궁금했다.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야 할 차미나가 왜 혼자서 수제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남편 소식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이강진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이들을 봐 줄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나두석이라고, 나이는 어리긴 한데 유부남인 데다가 애도 있어서 애들하고도 잘 놀아 줄 거예요. 그동안 저희한테 잠시 시간 좀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차미나.
이강진도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다.
* * *
카페로 자리를 옮기게 된 세 사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차미나.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던 라인혁이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원 선배는…… 어떻게 된 거예요?”
차미나의 학교 선배이자 동시에 그녀의 남편이었던 한지원.
그의 이름이 나오자, 차미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이, 지금 여기에 없어.”
“무슨 뜻이에요?”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었거든.”
“……!”
라인혁의 얼굴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왜, 왜요! 저, 군대에 있을 때에도 두 분이서 같이 웃으면서 면회도 오고 그랬었잖아요! 어쩌다가 사고를……!”
“졸음운전을 하던 차 때문이었어. 크게 사고가 났었거든. 아마 뉴스에도 나왔을 거야.”
“……선배.”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라인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에 이강진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럼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전부 혼자서 하셨겠군요.”
“네. 사실은 가게를 접을까도 생각했었는데, 남편의 꿈이 담긴 가게여서 그런지 쉽게 팔 수가 없더라고요. 언젠가 자신이 만든 수제 버거로 돈 많이 벌어서 저하고 아이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거든요.”
그 꿈은 이제 차미나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 안 됐어요. 남편 없이 저 혼자 하려다 보니까 너무 힘들고, 애들은 점점 커 가고 있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살던 집 전세금을 빼고 가게 안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티비를 보고 있던 작은 공간이 이들 가족들의 집이었다.
“어떻게든 남편의 꿈을 이어받아서 계속 가게를 꾸려 나가 보려고 했는데…… 이제 그것도 힘들 거 같아요.”
꿈을 방해하는 건 늘 현실이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버린 차미나 가족.
죽은 남편의 꿈을 계속 좇기만 하면, 두 아이들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임대료도 내기 버겁더라고요. 아마 다음 달쯤에 가게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까 고민 중이에요.”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식당에 나가서 일해 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면 공장도 좋고요. 애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죠.”
순간 이강진은 차미나의 모습에서 그의 어머니의 예전 모습을 엿보았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어머니.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걸 눈앞에서 보고 싶진 않았다.
라인혁이 차미나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선배, 그런 고민은 하실 필요가 없어요.”
“응? 무슨 말이야?”
“저하고 같이 온 이 동생이 사실 엄청난 능력자거든요. 제 군대 후임인데, 지금은 제 직장 대표님이세요.”
사정은 잘 들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이강진은 명함을 꺼낸 뒤에 그녀에게 건넸다.
“바라 코리아 대표, 이강진이라고 합니다. 실은 차미나 씨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저의…… 재능을요?”
“예, 물론 공짜로 재능기부를 해 달라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차미나 씨에게 그만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제가 보장하죠.”
희망이라는 선물을 들고 그녀에게 찾아온 산타클로스, 이강진.
이 기회를 붙잡을지, 말지.
그것은 온전히 차미나의 몫이다.
결심을 내린 모양인지 그녀의 입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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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자들의 성지 (1)
차미나, 라인혁과 함께 다시 한아름 수제버거 가게로 돌아온 이강진.
그는 애들과 함께 티비를 보면서 놀아 주고 있던 유부남, 나두석에게 손짓했다.
“두석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예, 형님.”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차미나는 나두석에게 애들을 돌봐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나두석은 빙그레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애들이 얌전하고 착하더라고요. 제 애는 저를 닮아서 그런지 엄청 산만하고 그러던데.”
“제가 바쁘다는 걸 알아서 일부러 얌전히 있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안타까움이 어려 있는 눈빛이었다.
게다가 아빠를 잃기까지 했으니,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부모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나두석은 차미나의 일이 왠지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이강진을 따라 가게 밖으로 나온 나두석.
그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현재 금연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나 씨 모습을 보니까 예전의 저를 보는 거 같아서 안타깝더라고요.”
만약 이강진이 나두석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내진 못했을 것이다.
“미나 씨는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오늘 이들이 한아름 가게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나두석도 알고 있었다.
한아름 수제버거 집을 바라 코리아가 인수하기 위함이었다.
말이 인수지, 차미나가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이전보다 좋은 가게에서, 이전보다 좋은 환경에서 지금까지 해 왔던 수제 버거 만드는 일을 계속하면 된다.
이강진의 입꼬리가 위로 슬며시 올라갔다.
“오케이 받아 냈어.”
“정말입니까?”
“어, 인혁이 형 덕분이지.”
차미나는 처음엔 이강진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라인혁이 직접 나서서 이강진과 바라 코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우리들을 믿어 달라고 설득한 덕분에 이강진이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바로 작업 착수하도록 해. 미나 씨 가족들 살 장소도 마련해 주고. 여분으로 봐 둔 가게 하나 있지? 신림 근처에 있는 곳.”
“예.”
“가게는 그쪽으로 잡아 둘 테니까, 거주지도 그 근처로 알아보도록 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대신, 아이들 데리고 살기 충분히 넉넉한 곳으로.”
“네, 알겠습니다.”
사내 복지 하면 역시 바라 코리아다.
* * *
차미나와 계약서를 쓴 이후부터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림으로 이사를 하게 된 차미나는 더 넓고 깔끔해진 수제 버거 가게에서 남편의 꿈을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남편만의 꿈이 아니게 되었다.
차미나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를 도와줄 인력도 충원했다. 주문을 받고 서빙을 담당할 아르바이트생들을 채용했다.
매장 관리는 라인혁과 그의 팀원들이 주기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가게 이름은 ‘한아름 수제버거’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차미나의 남편이 직접 지은 가게 이름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워진 한아름 수제버거 가게를 찾은 이강진과 나두석.
그가 왔다는 소식에 차미나는 한층 밝아진 미소로 두 남자를 맞이했다.
“대표님! 오신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랬어요!”
“바쁘실까 봐요. 그리고 오래 있다가 가진 않을 겁니다. 그냥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온 김에 한번 슬쩍 들러 봤어요.”
한아름 수제버거 가게는 벌써부터 SNS에서 많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애초에 맛도 있고 가격도 착한 곳이다. 홍보, 마케팅만 제대로 되면 금세 입소문을 탔을 것이다.
이강진은 아주 약간의 추진제만 이곳에 불어넣어 줬을 뿐이다.
그 덕분에 차미나와 직원들은 지금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잠깐 있다가 가겠다고 했지만, 온 김에 그냥 가면 섭하지 않겠나.
이강진은 나두석에게 작게 말했다.
“보완할 곳이 몇 군데 보이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두석은 지체 없이 자신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아주 약간의 디테일이지만, 이 디테일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강진은 그것들을 빠르게 지적했다
“매장에 비해 테이블 숫자가 너무 적어. 추가해서 배치부터 다시 손보도록 해. 그리고 블라인드 색깔이 너무 이질적이야. 매장 인테리어 컬러에 맞게끔 바꿔.”
“예, 알겠습니다.”
매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확인하는 이강진.
그러던 도중에 버거를 먹던 대학생 무리가 이강진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들 중 몇몇이 이강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이강진 씨 맞죠? 티비에 몇 번 나오셨던 그 군인분.”
“아, 예. 맞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사진 찍어 주실 수 있나요? SNS에 올리고 싶어서요.”
“하하, 네. 언제든지요. 두석아, 미안한데 이분들하고 같이 사진 좀 찍어 줘.”
“예, 대표님.”
한 업체의 대표다 보니 이런 팬 서비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표의 행동이 곧 회사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무리가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다른 손님들도 뒤늦게 이강진을 알아보고 인증 사진 요청을 부탁해 왔다.
본의 아니게 작은 팬 미팅 일정을 소화하게 된 이강진.
‘그래도 가게 홍보에 도움이 된다면, 이 정도는 웃으면서 할 수 있지.’
한때는 참군인으로 불리던 이강진이었으나, 이제는 엄연히 한 기업인으로 성장해 가는 중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스마트폰으로 SNS에 접속한 이강진은 ‘한아름 수제버거’와 자신의 이름으로 해시태그를 검색했다.
그러자 오늘 이강진과 같이 사진을 찍었던 손님들이 업로드한 게시글들이 쭉 나열되었다.
사진을 찍어 주면서 동시에 이강진은 이涌“? 가게 홍보도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었다.
그 약속을 잊지 않은 모양인지 가게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언급하고 있었다.
‘좋아, 잘되어 가고 있네.’
가장 많은 ‘좋아요’가 찍힌 게시글을 살폈다.
이강진과 이미 팔로잉이 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지윤 씨도 갔었나 보네.”
동료 배우와 같이 한아름 수제버거 가게 안에서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 계정에 업로드했다.
-수제 버거 먹으면서 최미진 선배님과 함께 투샷♡♡♡
#한아름수제버거가게 #바라코리아 #환상의맛 #버거좋아하시는분들꼭오세요
남자 친구의 새로운 사업을 응원하는 모습이 이강진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전화해 봐야겠네.’
지금쯤이면 집에서 쉬고 있을 터.
스마트폰을 켜려고 할 때, 타이밍 좋게 전화가 딱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사업을 하다 보니 일단 모르는 번호도 무시하지 않고 다 받고 있긴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강진이니?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태강이 형? 어떻게 전화했어? 휴가 나온 거야?”
지금은 저녁 11시 반이다. 취침 시간을 훨씬 지났을 텐데 어떻게 전화했는지 궁금했다.
-휴가는 아니고. 나, 실은 오늘 전역했어.
“뭐? 진짜?”
전역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하나 한아름 수제버거 일 때문에 그동안 신경을 아예 쓰질 못하고 있었다.
“형 전역하기 전에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괜찮아. 요즘 바쁜 거 같아 보이는데, 굳이 전화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어차피 내가 내일 너 만나러 갈 거니까.
“응? 나를?”
이강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즘 1075대대에 유행처럼 번지는 게 있는데, 넌 몰라?
그걸 이강진이 어찌 알겠나.
그는 이제 민간인이다. 군인이 아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네 가게에 전역자들이 자주 가서 밥 먹었던 거, 기억하지?
“어, 물론.”
기운상을 포함해서 이강진과 알고 지냈던 1중대 후임들이 전역 당일 날에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을 찾아오곤 했었다.
성태강이 넌지시 던져준 힌트.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전역하면 바라 식당에서 밥 먹는 게 유행이야?”
-정답.
어쩐지.
전역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게를 찾아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다.
“희한한 유행이 생겼네.”
-이제는 유행이 아니라 전통이지. 나도 동기들하고 같이 오늘 가고 싶었는데, 위병소에 팬들하고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난 못 갔어. 기자들이 따라붙을까 봐.
“기자들은 조심해야지.”
괜히 전역하자마자 오해받을 기사라도 올라오면 골치 아프다.
-창우 형하고 같이 갈 거니까, 시간 되면 얼굴이라도 보자. 어때?
“나야 좋지.”
전역자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군대에서 맛없는 짬밥을 하루에 한 끼도 아니고 세끼씩 챙겨 먹으면서 나라를 지키다가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소홀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부대 출신이어서 그런지 더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 가게 오면 부탁 하나 할 거 있는데, 혹시 들어줄 수 있어?”
-뭔데?
성태강은 자신의 후임이면서 동시에 유명 스타다.
그가 전역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연예계가 들썩일 정도였다.
그런 성태강에게 이강진이 할 부탁은 간단했다.
“와서 사인하고 사진 좀 남겨 줘.”
유명인이 가게를 찾으면 항상 하는 것들이다.
한차례 크게 웃은 성태강은 이내 알았다고 답했다.
-신경 써서 잘해 줄게.
“고마워, 형.”
이들의 전우애는 전역을 해도 계속 이어졌다.
* * *
예정대로 성태강은 최창우와 함께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을 찾았다.
그는 이강진과 같이 주방으로 향했다.
“호만이 형, 태강이 형 왔어.”
“헉, 태강이 형!”
성태강은 오호만에게도 형이었다.
조은석 외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성태강이 더 나이가 많았다.
“오랜만이다, 호만아. 너 전역하고 난 다음에 식당 밥이 어찌나 맛이 없던지. 한동안 진짜 고생했다.”
“안 그래도 예전에 강진이도 그 말 했었어. 내가 나중에 1075대대에 가서 취사병들한테 교육 한번 빡세게 시켜야겠네, 하하하!”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오호만과 인사를 나누러 온 김에 이들은 아예 먹을 것까지 주문을 하고 갔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아주 맛있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을게.”
주방을 나온 이강진은 성태강, 최창우를 데리고 미리 잡아 둔 방으로 직접 안내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말 안 했을 거야. 우리 가게에 중대장님 왔었던 거.”
“중대장님? 운형인 대위님?”
“어, 사단장님하고 같이 왔더라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성태강과 자주 만나지 못했었기에 이야깃거리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건 성태강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넌 민간인이어서 이제 사단장님이 와도 그냥 그렇구나 하잖아? 난 저번 달에 얼마나 혼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사단장님이 불시에 순찰을 오셔서 오대기 비상 걸었거든. 그때 하필이면 나도 오대기여서…… 어휴!”
몸을 부르르 떠는 반응만 봐도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상황조치는 잘했어?”
“망했지. 내 군 생활 중에서 그때가 가장 많이 털린 시기일 거야. 한 2주 동안 간부들 눈치 보느라 고생했지.”
그래도 군기교육대나 아니면 영창 안 간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직 성태강의 이야기보따리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이렇게 말이 많은 성태강은 처음 봤다.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이강진은 그의 한탄을 계속 들어 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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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자들의 성지 (2)
음식이 나온 후에도 성태강의 ‘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섭이가 이번에 분대장 달았다는 거, 넌 모르지?”
“알 리가 있겠어? 내가 거기 애들이랑 자주 통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심심한 후임 한두 명이 이강진의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해 오는 게 다였다.
그렇다 보니 어제 전역한 성태강처럼 부대 상황을 빠싹하게 알고 있진 못했다.
“분섭이가 상병이야, 병장이야?”
“물병장. 신기하지 않아? 난 분섭이가 병장 다는 거 보니까 내가 진짜 전역할 때가 다 되었구나 하고 생각이 들던데.”
“실제로 전역했는데, 뭘.”
이강진도 한때는 성태강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다.
기운상이 처음으로 상병을 달았을 때 시간의 흐름을 체감했다.
“분섭이도 병장 달았고. 그러면 영고가 이제 상병인가?”
“그렇지.”
“시간 진짜 빠르네.”
올해도 금방이다.
이러다가 내년이 오게 되면…….
‘동원 훈련이네, 시발.’
올해는 1월에 전역했기 때문에 동원 훈련을 안 받을 수 있었지만, 내년부터는 예외가 없다. 동원 훈련 통지서 날아오면 얌전히 받으러 가야 한다.
1년에 2박 3일만 받으면 되는 훈련이지만, 그것마저도 힘들다.
애초에 군복을 다시 입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는 일이다.
“태강이 형, 나하고 같은 시기에 동원 훈련 받으러 가겠네.”
“어? 그런가? ……맞네!”
그 말은 곧, 기운상도 이들과 같이 동원 훈련을 받는다는 뜻이다.
“같은 장소에 걸렸으면 좋겠는데.”
“아마 힘들지 않을까?”
주소지가 다를뿐더러 설령 비슷하다 하더라도 기간과 시간대도 같아야 한다. 그래야 같이 동원 훈련을 받을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던 최창우가 드디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태강아, 밥 언제 먹을 거냐? 이러다가 다 식겠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군대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군대 이야기에 너무 심취하면 안 된다.
지금처럼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 *
식사를 마친 뒤에 성태강은 이강진과 약속한 대로 이곳에 와서 밥을 먹고 갔다는 인증 사진과 사인을 남겨 뒀다.
“잘 먹고 간다, 강진아.”
“와 줘서 고마워, 형. 방송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야?”
“바로 내일부터.”
복귀 타이밍이 상당히 빨랐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동안 KGE의 태강을 보고 싶어 했던 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룹 활동 일정도 고려하면, 빨리 방송에 복귀해서 예전의 감을 찾아 둬야만 했다. 그래야 다른 멤버들에게 민폐 끼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힘내. 나중에 콘서트 같은 거 하게 되면 연락 주고. 티켓팅해서 보러 갈게.”
“티켓팅은 무슨. 강진아, 형이 있잖아. 내가 VVIP로 끊어서 보내 줄 테니까 넌 몸만 와. 여자 친구 생기면 데려오게끔 표 넉넉하게 보내 줄게.”
“하하하, 알았어.”
한지윤이 KGE를 좋아했던가.
그건 이강진도 잘 모른다.
‘나중에 지윤 씨하고 내가 공개 연애를 하게 되면, 그때 데려가야겠네.’
지금은 무리다.
* * *
성태강이 바라 식당에 한번 들렀다 간 이후, 1075대대 출신 전역자들이 1주, 2주 단위로 꼭 한 번씩 계속 가게를 찾았다.
죄다 군복을 입고 바라 식당을 찾아왔다.
일부러 입고 온 건 아니었다. 동원 훈련도 아닌데 뭐 하러 군복을 자처해서 입고 오겠나.
다들 전역하자마자 바로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장이 군복일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사는 후임들도 제법 됐기 때문에 버스나 기차 타고 내려가기 전에 이렇게 한 번씩 들르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은 ‘군인들도 찾는 맛집’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 바라 식당 브랜드 이미지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반응이 좋았다.
군인들이 휴가를 나오거나 아니면 외박, 외출을 나오면 바라 식당에 꼭 한 번씩 들를 정도였으니, 매출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상당했다.
그리고 이강진에게 전역 신고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먼 곳에서 왔는데, 이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건 너무 매몰차지 않나.
정부도, 국방부도 군인들을 챙겨 주지 않는데, 선임이었던 이강진마저 그들을 안 챙기면 누가 챙겨 주랴.
대신, 단점이 하나 있었다.
“강진이 형! 제가 한 잔 올릴게요!”
“됐어. 나 조금 있다가 회의 들어가야 해.”
“에이, 형님! 저희, 오랜만에 보시잖아요!”
“맞아요. 나중에 가면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섭섭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안 마시려야 안 마실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이강진은 잔을 들어 올렸다.
“딱 한 잔만 마신다.”
“네!”
“역시 1중대의 살아 있는 전설!”
“이것이 바로 전우애죠! 하하하!”
그래도 기뻐하는 후임들의 모습을 보니 이강진도 내심 즐거웠다.
후임들을 보낸 뒤.
이강진은 곧장 바라 코리아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팀장 회의가 있는 날이다.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이강진은 그들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후임들이 와서…….”
라인혁이 몇 차례 코를 벌름거리더니 이내 물었다.
“술 마셨냐?”
“소주 한 잔만 마시고 왔어. 안 마시려고 끝까지 버텨 봤는데, 애들이 한 잔만 마시고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마셨어.”
“애들이 너 많이 보고 싶었을 테니까. 그래, 한 잔이면 괜찮지.”
같은 부대 출신이어서 그런 걸까, 라인혁은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다른 팀장급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강진이 직원들에게 모질게 대해 온 악덕 사장도 아니고, 오히려 그는 말단 직원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 주는 자상함과 세심함을 보여 온 인물이다.
그동안 쌓아 온 좋은 이미지가 이번에도 이강진에게 면제권을 줬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과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진 않을 것이다.
‘인강이 라인까지만 딱 전역하면, 내 얼굴을 아는 후임들은 전부 다 전역할 테니까.’
그다음 후임들은 이강진과 직접 대면해 본 적도 없는 타인이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아니지. 참는다고 표현하면 애들이 섭섭해하려나.’
참 애매한 문제다.
* * *
한아름 수제버거 가게가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 이강진과 바라 코리아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포트 역할을 자처했다.
그 결과.
SNS를 비롯해 아카튜브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티비에 맛집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 여파는 상당했다.
나두석이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이강진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가게를 좀 더 큰 곳으로 옮겨야 할 거 같습니다.”
“벌써?”
새로운 가게를 얻어 준 지 아직 반년도 안 지났다.
“예, 지금 매장 크기로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전부 수용할 수 愎鳴? 합니다. 2시간, 3시간 기다려야 겨우 먹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래?”
한아름 수제버거가 성공한 덕분에 바라 코리아의 매출이 또 한 단계 뛰어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매출 성장.
이강진이 기뻐할 만한 일이다.
“일단 가서 미나 씨하고 이야기 좀 나눠 보자.”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런 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는 걸까.
장사가 너무 잘돼도 문제다.
* * *
브레이크 타임인데도 불구하고 차미나는 쉬지 않고서 계속 버거를 만들고 있었다.
“죄송해요,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완성되거든요.”
“손님도 없는데…… 그 버거는 왜 만들고 계신 건가요?”
“아, 이거요?”
차미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가게 이사 오기 전에 단골이었던 꼬마 아이들, 그리고 할머니 한 분 계시거든요. 얼마 전에 할머니를 만났는데, 제가 만든 버거 못 먹어서 많이 아쉽다고 하셔서 직접 싸서 챙겨 드리려고요.”
가게가 성장해도 그녀는 결코 초심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습에 이강진이 투자를 결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버거는 저하고 두석이가 가져다드릴게요. 미나 씨는 많이 바쁘실 테니까 가게에서 좀 쉬고 계세요.”
“죄송해요, 대표님.”
“괜찮습니다. 그보다 논의할 게 있습니다만.”
이강진 대신에 나두석이 가게 매장 추가 확장에 대한 설명을 쭉 들려줬다.
한 번 더 이사 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래도 좋은 일로 확장을 하는 거니까 차미나는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리고 미나 씨.”
이강진이 추가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할머니하고 꼬마 애들 위해서 만든 버거는 저희 직원에게 부탁하세요. 가게 운영하느라 바쁘실 텐데, 먼 거리까지 왔다 갔다 하기 힘들 테니까요.”
“고마워요. 대표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네요.”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그저 자신의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 * *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훌쩍 흘렀다.
또 한 명의 반가운 이가 이강진에게 먼저 연락을 해 왔다.
바로 곽분섭이었다.
“너도 내일 전역하냐?”
이강진의 직설적인 물음에 곽분섭은 크게 웃었다.
-하하! 어떻게 알았어?
“거기 부대 애들이 전역하기 하루 전에 꼭 나한테 연락하니까 알지. 하는 말도 똑같더라. 전역하면 바라 식당 찾아갈 테니까 한잔하자고.”
-내가 할 말을 먼저 전역한 사람들이 다 했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다른 후임들에 비해서 곽분섭은 조금 특별하다.
같은 분대 후임이니까.
“그래, 자리 잡아 둘 테니까 와라.”
-고마워, 형!
포기하면 편하다.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그래도 곽분섭은 시기를 잘 맞춰서 나왔다.
그가 나온 날이 마침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역자들과 같이 술 한잔 마음껏 나누지 못했던 이강진은 오랜만에 고삐를…… 아니, 허리띠를 풀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잔뜩 먹고, 잔뜩 마시자!”
“오케이! 달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소주를 여섯 병이나 비웠다.
그래도 이강진은 좀 버틸 만했다. 그러나 입대한 동안 술 마실 기회가 거의 없었던 곽분섭은 더 이상 마시는 건 무리였다.
일단 곽분섭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하기로 한 이강진.
“분섭아, 좀 자다가 깨면 그때 집에 가라.”
그러나 곽분섭은 이강진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꿈나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하여간 녀석…….”
이강진은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순간,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나도 자야겠네.”
술이라는 게 참 무섭다.
* * *
“……아, 씨! 저, 진짜로 전역했다니까요……!”
이강진은 잠꼬대를 하면서 눈을 떴다.
식은땀 때문에 등이 축축했다.
“망할. 또 재입대 꿈 꿨네.”
요즘 전역자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 걸까, 오랜만에 재입대 꿈을 꿔 버렸다.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킨 이강진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반?”
벌써 하루가 지나 버린 것이다.
주말을 어이없게 날린 이강진은 자신의 방에서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는 곽분섭을 노려봤다.
“어휴, 괜히 마셨네.”
너무 달린 게 문제였다.
일단 화장실로 간 이강진은 숙취와 함께 샤워를 진행했다.
월요일 아침이었기에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이강진이 대표였기에 지각을 해도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어디 보자…….”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어제 넋 놓고 자는 동안,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순간 이강진은 눈을 의심했다.
문자 내용 때문이었다.
[병무청 병역 이행 안내 문자]
[현역 입영 알림(11월 23일, 육군훈련소). 통지서, 신분증 필수 지참.]
“……?”
이미 전역한 이강진에게 입대 안내 문자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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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가 살아나다 (1)
이강진은 눈을 두세 차례 끔뻑였다.
입영 안내 문자를 받다니.
“이거, 꿈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회귀 트럭에 두 번째로 치였다면 이해라도 한다.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손으로 눈을 비빈 다음에 다시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여러 차례 봐도 입영 안내 문자가 틀림없었다.
“미친……!”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일단 자고 있는 곽분섭을 깨우기로 했다.
“야, 곽분섭!”
“벼, 병장 곽분섭!”
아직 전역한 지 하루밖에 안 지나서 그런지 곽분섭은 자신의 관등성명을 대면서 기상했다.
생활관이 아닌 이강진의 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곽분섭은 그제야 안도했다.
“아니, 강진이 형, 멀쩡히 잘 자고 있는 사람을 왜 놀래키는 거야. 난 또 행보관님이라도 오신 줄 알았잖아.”
“지금 행보관님이 문제냐? 이거 봐 봐.”
“이게 뭔데?”
졸린 눈을 억지로 뜬 곽분섭.
“병역 안내…… 뭐야, 이거 입대하기 전에 날아오는 입영 안내 문자잖아?”
역시 이강진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 주는데?”
이강진은 스마트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거, 내 스마트폰이다.”
“엥?”
처음에는 이강진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굳어진 그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장난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알아차렸다.
“병무청에서 왜 형한테 이런 문자를 보내?”
“몰라, 시발! 확인해 봐야지!”
한 회사의 대표가 되면서부터 이강진은 최대한 욕설을 안 하려고 자제하는 습관을 길러 왔다.
공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항상 말조심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역한 사람한테 입영 안내 문자가 날아오면 아무리 신사적인 사람일지라도 욕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병무청에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통화량이 많아 상담원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시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랄하네!”
스마트폰을 냅다 던져 버렸다.
그나마 침대 위쪽으로 던져서 다행이지, 그거 아니었으면 최소 액정 화면은 다 나갔을 것이다.
이강진에게는 굉장히 화가 날 만한 일이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꿀잼이었다.
“크큭, 강진이 형, 그냥 그러지 말고 병무청에 한번 갔다 오는 건 어때? 가서 문자 보낸 사람 나오라고 해야지.”
“그래야겠다.”
군대를 한 번만 갔다 왔으면 이런 소리도 안 한다.
그러나 이강진은 강제로 재입대까지 마치고 겨우 군인 신분에서 벗어난 남자다.
그런 그에게 재재입대를 하라고 하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사무실로 향하려던 이강진은 한 통의 문자로 인해서 목적지를 곧장 다른 곳으로 설정했다.
“병무청…… 기다려라.”
분노에 휩싸인 이강진이 간다!
* * *
병무청에 도착하자마자 이강진은 바로 직원을 찾았다.
“이상한 문자가 와서요. 확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입영 안내 문자네요. 혹시 입대 예정일이 어떻게 되나요?”
“저, 올해 초에 전역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직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좋은 예감을 느낀 모양인지 직원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실수가 있었나 봐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담당자 불러오도록 할게요.”
전역한 사람에게 입대 문자를 보낸 게 얼마나 크나큰 실수인지, 직원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5분도 안 돼서 문자를 직접 보낸 담당 직원이 이강진 앞에 등장했다.
그는 보자마자 이강진이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한때 국민 영웅이라고 칭송받았던 이강진.
그가 이번에 전역했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직원은 죽을죄를 진 것처럼 이강진에게 잘못을 빌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번호를 입력하다가 순간 헷갈렸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는데 더 이상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을 보니 화가 많이 누그러졌다.
“……괜찮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죠.”
이 말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으로 벌어졌던 소란을 끝낸 뒤에 이강진은 바로 병무청을 나서려고 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입구 문을 열고서 병무청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이강진도 잘 아는 남자였다.
“이도훈 소위님?”
“어? 가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아, 강진이였네! 미안, 사복 때문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어.”
매번 군복 입은 모습만 보다 보니까 자신이 아는 이강진이 맞는지 순간 헷갈렸다.
반면 이도훈은 전투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진급하셨군요.”
다이아몬드 하나를 더 달고 있었다.
이제는 소위 이도훈이 아닌 중위 이도훈이다.
“좀 됐어. 그보다 병무청에는 무슨 일이야? 너, 전역했잖아.”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강진은 자신에게 왔던 입영 안내 문자를 보여 줬다.
그것을 보자마자 이도훈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내가 아는 지인 중에도 이런 경우가 한 번 있었는데. 걔도 전역한 지 2년 지났을 때였나? 그때 입영 안내 문자가 날아왔다더라. 전화로 문자 보낸 직원 바꿔 달라고 하고서 욕을 한 바가지로 퍼부었지.”
그렇게 끝낸 것만으로도 신사 소리를 들을 정도다.
이강진은 천사의 강림이라는 말을 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를 거의 안 냈다.
“오랜만에 봤는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 마침 슬슬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소위님…… 아니, 중위님은 볼일 다 끝나셨습니까?”
“나? 아직 안 끝났지.”
“그럼 볼일 끝내 놓고 가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도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강진의 말을 부정했다.
“농땡이 좀 피우다가 부대로 들어가야지. 안 그래?”
순간 이강진은 생각했다.
전역하고 나니 감 다 잃었다고.
* * *
군대 밥은 맛이 없다.
보통 이렇게 잘 알려져 있다. 이강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강진은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병무청 근처에 있는 가게들도 하나같이 다 맛이 없군요.”
“그러게 말이야.”
이도훈도 이강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가게 주인한테는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내심 기대하면서 왔던 뼈해장국집이었으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맛도 없는데 가격은 더럽게 비싸다.
마치 입대 전에 먹었던 갈비탕을 다시 맛본 것 같았다.
‘말이 갈비탕이지, 건더기 하나 없는 곰탕에 가까웠지.’
결국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은 두 사람.
“카페로 옮길까? 내가 여기 오자고 했으니까 내가 살게.”
“그러면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괜찮아. 저번에 너한테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이번 기회에 그 은혜도 갚을 겸 내가 커피까지 살게.”
도움을 받은 건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도훈이 아니었더라면 검열관에게 탈탈 털렸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일방적인 도움이 아닌, 피차 서로 도움을 받은 셈이다.
카페에 자리를 잡은 이강진은 이도훈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요식업을 하고 있거든요. 나중에 바라 식당으로 오시면, 오늘 밥 사 주신 보답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나중에 여자 친구하고 같이 가야겠네.”
“여자 친구가 계셨군요.”
“어. 내가 병사일 때 만났던 사람.”
남자는 일반 병사로 군 복무가 가능하지만, 여자는 일반 병사가 아닌 간부로 간다.
군대에서 만났다면…….
“병사 시절 때부터 사귀신 겁니까?”
“그렇지, 뭐. 원래는 나도 너처럼 바로 전역하고 사회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평생 군대에 남게 되었지.”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이도훈.
그의 군 생활도 나름 파란만장했다.
“국방부 장관님 앞에서 훈련도 받아 봤고, 북한에서 무장공비 내려왔을 때 총격전도 해 보고. 이걸 병사 시절 때 다 겪어 봤다고 하면 믿겠어?”
“아니요.”
이강진도 나름 군대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도훈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무장공비와 총격전을 하는 건 거의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이다.
문득 이강진은 이도훈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중위님은…… 후회 안 하십니까?”
“어떤 거?”
“군대에 계속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후회.
인간인 이상, 후회를 안 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만큼 후회를 덜한 인생을 사는가.
그것이 곧 행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이도훈은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답했다.
“예전엔 했는데, 지금은 안 해. 재입대를 한다고 해도 다시 장교로 지원할 거 같아.”
“그렇군요.”
이강진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어쩔 수가 없다. 이도훈은 군대에 있을 때 새로운 인연, 새로운 꿈을 만났기에 군대에 계속 남아 있게 된 거고.
이강진은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두 남자는 비록 서로 다른 선택을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론 만족할 만한 선택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 * *
병무청에 들렀다 오느라 본의 아니게 늦은 출근을 하게 된 이강진.
사무실에 잠깐 얼굴을 비치러 온 라인혁은 이강진이 늦어지게 된 경위를 듣자마자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입대 문자가 날아왔다고? 야, 진짜 운도 없다. 어떻게 그런 문자를 받냐?”
“그러게 말이야.”
인터넷에 돌아다니면 전역한 지 한참 지났는데 입대하라는 문자가 날아왔다는 사연을 종종 보곤 한다.
강진은 그 사연의 주인공이 설마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래서, 병무청 직원이 뭐래?”
“미안하다고 그러지.”
“가서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왔냐?”
“아니, 사람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니까. 그냥 다음부터는 신경 더 쓰면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만 하고 나왔어.”
“이야, 천사가 따로 없네. 입영 안내 문자를 받고도 화를 안 내다니.”
이강진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실로 왔으니, 오전에 못 했던 회의를 다시 가지기로 했다.
비록 오전에 최악의 문자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회의 때에는 기분 좋은 소식들만 연달아 들려왔다.
나두석이 자료를 직접 빔 프로젝터로 보여 주면서 빠르게 설명에 임했다.
“이번 분기 목표 매출액의 세 배를 달성했습니다. 한아름 수제버거 덕이 컸습니다.”
“미나 씨한테는 연락해 봤어?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거, 생각해 보겠다고 하시던데.”
“프랜차이즈 말씀하시는 거죠? 예, 오전에 미팅 끝냈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좋아, 그러면 내년 초 분점 오픈 계획안 한번 잡아 봐.”
“예, 알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들 역시 점점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라인혁은 매출 상승 그래프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네.”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
“응? 뭔데, 아직 남은 게 또 있어?”
“물론.”
거대한 파도가 올 것이다.
파도의 이름은 바로 시프코인.
‘가상 화폐가 조만간 대한민국을 휩쓰는 시기가 오겠지.’
이때를 대비해 이강진은 시프코인에 투자할 여유 자금들을 미리 확보해 뒀다.
‘어디, 회의 끝나면 슬슬 사 볼까?’
이제 돈 벌러 출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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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가 살아나다 (2)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강진은 곧장 컴퓨터를 켰다.
아직 시프코인의 가격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 코인 하나가 나중에 2천만 원대까지 올라간다, 이 말이지.’
그 이후로 열기가 팍 식을 것이다. 시프코인도 결국 주식과 마찬가지다. 아니, 주식보다 더 위험부담이 크다.
저점에서 사고 고점에서 팔아야 한다.
그 반대가 되면…….
‘상상하기조차 싫군.’
어쨌든 이강진은 성공할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군대에 재입대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회사 자금까지 다 끌어모아서 시프코인에 투자할 생각은 없다.
투자는 항상 그렇듯 여유 자금으로 해야 한다.
이게 이강진의 지론이다. 그래야 손해를 보더라도 망하는 일은 없게 된다.
‘이거로 대박 터지면…….’
잠시 고민하던 이강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번 돈으로 뭐 하지?’
뭔가 딱히 욕심부릴 만한 게 없었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가게도 있다.
‘뭐, 일단 벌어 두고 통장에 넣어 두든가 해야지.’
돈이 꼭 필요한 시기가 있다.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쟁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자신의 집에 불이 켜져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와 있다는 뜻이었다.
‘우호는 아닐 테고.’
백우호가 집을 나간 뒤, 이강진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새로 바꿨다.
사실 이강진은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냥 백우호가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기존의 비밀번호를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백우호가 비밀번호를 바꿔 달라고 먼저 요청해 왔었다.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이강진은 백우호의 말대로 비밀번호를 바꿨다.
번호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존재가 이강진 말고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어머, 강진 씨 왔어요?”
그의 여자 친구, 한지윤이었다.
한지윤은 앞치마를 두른 채 이강진을 맞이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저녁밥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가끔 한지윤은 쉬는 날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이강진의 집으로 와서 밥을 만들어 주곤 했다.
집안일도 스스로 도맡아 했다.
이렇게 보면…….
‘신혼부부 같단 말이지.’
사귀기 시작한 지 슬슬 1년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 부부라고 말하기에는 좀 섣부른 단계이긴 했다.
옷을 갈아입은 뒤에 거실로 돌아온 이강진.
한지윤이 만든 먹거리들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가짓수가 많네요.”
이강진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젓가락으로 총각김치를 집어 들었다.
아삭!
총각김치 특유의 식감이 이강진의 입맛을 돋우게 만들었다.
“음! 맛있어요. 이거, 지윤 씨가 만든 건가요?”
“네, 혼자서 만든 건 아니고…… 엄마랑 같이 만들었는데, 처음으로 같이 만든 거다 보니 손에 안 익더라고요.”
다른 반찬들도 하나씩 맛을 봤다.
이강진의 입맛에 딱이었다.
“이 정도면 굉장히 훌륭한데요?”
“요즘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하다 보니 실력도 같이 는 거 같아요. 요리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나중에 배우 일 관두시면, 바라 식당에서 일하셔도 될 거 같아요.”
“어머, 그 정도는 아니에요, 호호.”
막 과거로 회귀했을 때에는 한지윤과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상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한지윤에게 듣고 싶은 게 있었다.
“오디션은 어떻게 됐나요?”
미국 진출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한지윤은 얼마 전에 관계자들 앞에서 연기 오디션을 보고 왔었다.
아직 오디션 단계였기 때문에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다.
한지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합격했어요.”
“정말요? 축하해요, 지윤 씨!”
“고마워요. 강진 씨가 열심히 응원해 준 덕분이에요. 아……!”
갑자기 이강진을 본 한지윤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던 이강진.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강진 씨, 이 드러나게 해 보세요. 앞니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어요.”
“아, 그런가요?”
총각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잠시만요. 제가 떼어 드릴게요.”
이강진의 옆으로 다가온 한지윤.
거울 없이 혼자서 떼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한지윤이 직접 이강진을 돕기로 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자, 여기요.”
상당히 큰 고춧가루였다. 한지윤이 크게 웃을 만도 했다.
“그래도 지윤 씨 웃는 모습을 봤으니, 만족해야겠네요.”
창피함보다는 뿌듯함이 먼저 느껴졌다.
미국으로 가면 한동안 한지윤과 이렇게 마주하면서 밥을 먹는 시간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이강진은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그건 한지윤도 마찬가지였다.
“…….”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시선뿐만이 아니었다.
이강진은 자신의 입술을 한지윤의 입술 위로 가져갔다.
시작은 가벼운 키스였다.
입술을 뗀 한지윤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슬쩍 바라봤다.
저녁 7시.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저…… 내일까지 쉬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강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한지윤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저도 내일 쉽니다.”
바깥의 날씨는 영하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온도는 평소보다도 더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 * *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바라 식당을 찾은 이강진.
오호만이 그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강진아, 너 요즘 살찐 거 같다?”
“그래?”
이강진은 현재 살이 찌기 아주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일단 전역을 했고.
요식업 사업을 하다 보니 먹을 것을 많이 먹게 됐고.
미팅을 가지면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여자 친구도 생겼다.
“심각하게 살이 쪘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군대에 있을 때보다도 좀 더 찐 거 같다는 뜻이야. 뭐, 나도 찌긴 했지만.”
오호만은 자신의 배를 손으로 두세 차례 치면서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이강진은 올해가 가기 전에 헬스장이라도 등록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호만이 형, 나랑 같이 헬스 다닐래?”
“다닐 시간 없어. 곧 있으면 아이도 태어나는데, 일 끝나면 바로 애 보러 집에 가야지.”
“출산 예정일이 언제였지?”
“다음 주 금요일. 슬슬 준비하려고.”
오호만이 결혼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고 하니 이강진은 실감이 잘 안 났다.
“내가 친구들 중에서 결혼을 일찍 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은 거 같더라. 나 결혼한다고 청첩장 돌릴 때,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었지. 결혼과 죽음은 미루면 미룰수록 좋다고. 근데 뭣 하러 제 손으로 결혼을 앞당기냐고 엄청 잔소리를 해 댔어. 근데 막상 해 보면 결혼 생활도 장점이 많더라. 내가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겨 주는 사람이 있고 없고, 이 차이가 엄청 크거든.”
“그렇지. 그럼.”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면서 공감을 표하는 이강진이었다.
오호만은 그의 반응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너, 혹시 여자 친구 생겼냐?”
“응? 왜?”
“아니, 왜 내 말에 공감하나 싶어서. 누구랑 같이 살고 있는 거야?”
“뭐…….”
얼마 전에 한지윤과 오랜 시간을 같은 집에서 보냈던 터라 자신도 모르게 이런 반응을 해 버린 것이다.
이강진은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냥, 우호랑 같이 살 때가 떠올라서.”
“짜식, 난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예쁜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 기대했네.”
그런 기대라면 이미 충분하게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다만, 알려 주지 않았을 뿐.
“아무튼 강진이 너도 슬슬 여자 친구도 만들어 보고 그러는 게 어때? 내가 보니까 넌 너무 일만 하는 거 같아. 자신도 조금은 챙길 줄 알아야지. 연애도 해 보고, 여행도 가 보고. 좋잖아.”
“호만이 형, 혹시 우리 엄마가 와서 나한테 여자 친구 사귀라고 슬쩍 말 흘리라는 부탁을 한 건 아니지?”
“아니야, 인마. 그냥 형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주변 사람들이 보면 이강진은 너무 자신만의 인생을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업무, 업무, 업무뿐.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일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쓰러지고 만다.
오호만은 그게 걱정되었다.
“리프레시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봐. 그러기에는 연애가 딱 제격이고. 아, 그렇지. 안 그래도 네 형수님 지인 중에 괜찮은 여자 있는데, 소개팅 한번 해 볼래? 필라테스 전공하고 있는 학생인데, 집안도 괜찮더라. 어디 기업 회장님의 손녀분이라고 했는데, 사진 보여 줄까? 진짜 예뻐. 거의 아이돌 수준이라니까.”
“아니,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야, 이런 기회가 흔히 오는 줄 아냐? 만나 보기라도 해 봐.”
“정말로 괜찮아. 나중에 정 연애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형한테 부탁할게.”
그 어떤 여자를 보더라도 이강진은 만족할 자신이 없었다.
그에겐 오로지 한지윤뿐이다.
* * *
올해가 가기 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은 한지윤과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현재 미국에 가 있는 상태였다.
전화로 아쉬움을 달랜 이강진은 달력을 확인했다.
“올해도 이제 2일밖에 안 남았구나.”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말년 휴가를 나와 있었던 이강진.
말년 휴가에서 복귀한 이후에 다음 날, 새해와 함께 전역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새록새록했다.
“지금쯤 애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연말이라도 군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평소처럼 삽질하고, 벌목 작업 하고, 근무 서고.
이강진이 알고 있던 후임들 중 반수 이상은 이미 전역했다.
이강진이 기억하는 1분대 후임들도 고작 세 명뿐이다.
이제 분대 왕고가 된 최영고, 넘버 투이자 나이상으론 여전히 가장 형인 조은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가다 마스터, 허인강까지.
생각난 김에 이강진은 1075대대로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통신보안, 병장 최영고입니다.
마침 최영고가 딱 연락을 받았다.
“영고냐? 형이다.”
-강진이 형?
“그래, 나야. 연말이라서 한번 전화해 봤지. 당직 서고 있어?”
-어, 원래 오늘 당직근무 없었는데, 한 명이 갑자기 휴가를 나가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근무 시간 바꿨어.
오랜만에 듣는 최영고의 목소리. 당직근무 때문인지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형은 잘 지내지?
“나? 뭐, 그럭저럭. 정신없이 지내고 있지.”
-그래? 다행이네. 그나저나 형, 모임 하나 만들었다며?
“1중대?”
-맞아, 그거. 얼마 전에 태강이 형한테서 연락 왔는데, 나도 곧 전역하니까 강진이 형한테 말해서 모임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1중대 출신이면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던데, 나도 가능하지?
“물론.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아주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전역할 것. 그러니까 넌 지금은 안 된다, 하하!”
-나도 곧 전역한다고. 얼마 안 남았어.
“그 전에 지구가 먼저 멸망하는 거 아니냐?”
-그런 농담은 숱하게 들었으니까 그만 좀 해.
역시.
군대는 먼저 갔다 온 사람이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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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들 (1)
1075대대 1중대 전우회 모임이 12월 30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모임을 주관하게 된 이강진은 오호만 그리고 라인혁과 함께 빠르게 음식들을 세팅했다.
장소는 바라 식당 서울 지점.
영업이 종료된 시간을 이용해서 이강진은 첫 전우회 모임을 크게 꾸며 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모임 시간이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가게를 전세 낸 덕분에 다른 사람들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이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둘씩 바라 식당 서울 지점을 찾았다.
고필중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누가 왔는지 한번 봐 봐.”
“……?”
고필중과 함께 가게로 들어오는 남자.
프로게이머로 승승장구 중인 오종한이었다.
“종한이 형! 이게 얼마 만이야!”
전우들 중에서 가장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 바로 오종한이었다.
그동안 게임 연습하느라 밖에 거의 나가지 못했던 오종한. 예전에 비해서 제법 살이 찐 모습이었다.
“미안하다. 자주 얼굴 비쳤어야 했는데, 이제야 시간이 좀 났어.”
“괜찮아. 이제라도 만났으면 된 거지. 앉아. 여기 종한이 형 자리야.”
“땡큐.”
모이는 시간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일단 먼저 온 사람들끼리 송년회를 시작하기로 했다.
술잔을 채운 뒤에 라인혁이 이강진을 재촉했다.
“자, 우리 모임 회장님이 먼저 한마디 해 줘.”
“내가 회장이야?”
“당연하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회장이 되어 버렸다.
이강진은 쓴웃음을 흘린 뒤에 건배사를 읊었다.
“올 한 해 다들 고생 많으셨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자, 건배!”
“건배!”
“올해 수고 많았다!”
서로 잔을 부딪친 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때, 티비에서 KGE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티비를 보던 오호만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태강이 형도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도 이곳에 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가요대상 일정 때문에 이곳에 참가하지 못했다.
전역하자마자 바로 방송 활동을 시작한 성태강. 오랫동안 가수 활동을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세 감을 되찾았다.
하반기에 새로 발매된 싱글 앨범, ‘Right on’ 활동으로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한 성태강은 이강진보다도 더 바쁜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Right on 무대가 펼쳐질 때, 전우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성태강을 응원했다.
응원의 힘 덕분일까.
-영예의 대상! KGE!
-축하합니다!
재작년, 작년에 이어서 이번에도 KGE가 가요대상을 연달아 차지하는 위엄을 보여 줬다.
3연속 대상.
수상 소감을 대표로 말하게 된 성태강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마이크 앞에 섰다.
-우선…… 전역한 후에 오랜만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오랫동안 KGE 완전체를 기다려 주신 팬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저희 소속사 대표님, 매니저 형, 어머니, 아버지, 동생, 나 없을 때 고생한 우리 KGE 멤버들, 김석준 PD님, 그리고…… 우리 사랑하는 1중대 식구들!
‘1중대 식구들’이라는 말이 나오자, 전우들의 눈과 귀가 티비에 집중되었다.
“태강이 형, 설마 우리 말하는 거야?”
“그런가 봐!”
“분섭아, 티비 볼륨 좀 키워 봐라!”
“아, 알았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사실 저 입대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많이 걱정했었습니다. 저조차도 걱정이 많았고요. 그런데 막상 가 보니까 제가 걱정했던 것과는 정말 달랐습니다. 좋은 선임들, 착한 후임들, 그리고 마음 맞는 동기들까지. 물론 힘들었던 기억도 분명 있었습니다만, 그보다 더 좋은 기억과 인연들을 얻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오늘의 이 영광을 우리 1중대 전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자!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 형!”
“성태강! 성태강! 성태강!”
“역시 우리 형이야!”
성태강의 수상 소감 덕분에 현장 분위기는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비록 이 자리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이들과 같이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 *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을 무렵.
이강진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오종한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종한이 형,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엄청 유명하던데? 저번 시즌에서도 결승까지 올라갔잖아.”
“그렇지. 아쉽게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올 한 해 오종한이 거둔 성적은 어마어마했다.
세 번의 우승 그리고 한 번의 준우승.
국제 e스포츠 대회에 나가서도 당당하게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e스포츠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에 크게 한몫한 오종한.
그러나 그에게 행복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조만간 다른 구단으로 갈 수도 있어.”
“지금 있는 팀에서 나오려고?”
“어.”
“왜? 문제라도 있는 거야?”
“있지. 스폰서가 여기 게임 쪽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고.”
그 밖에 다른 이유들도 많았다.
제대로 된 지원이 없는 환경 속에서 오종한은 최선의 결과를 뽑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부분이 없었다.
결국 오종한은 극단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어느 팀으로 가게?”
“글쎄. 일단 러브콜 받은 곳은 두 군데 정도 있는데, 조율이 쉽지 않을 거 같아. 당분간은 그냥 팀 없이 개인으로 활동할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는데, 그러면 제한이 걸리는 부분도 좀 있고. 머리가 복잡하네.”
세상일이라는 게 쉬운 것이 없다.
오종한은 그걸 요즘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종한이 형 혼자 나오는 거야?”
“아니, 코치님 포함해서 친하게 지내던 선수들 두세 명 해 가지고 한 네 명 될 거 같아.”
“네 명이라…….”
문득 이강진의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형, 내가 프로 팀 만들면 내 쪽으로 올래?”
“네가 팀을 만든다고?”
“어, 안 그래도 요즘 다른 쪽으로 마케팅을 시도해 볼까 하고 생각 중이었거든. 벌린 건 많은데,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은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새로운 고객층을 노려 볼까 하는데, 게임은 10대부터 20대, 30대까지 적극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분야잖아. FIHA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
고개를 끄덕이는 오종한.
이강진의 말이 맞다.
안 그래도 대기업들 역시 e스포츠를 향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시점이다.
게임이라는 게 예전과 인식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국내를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분야 중 하나.
그게 바로 게임이다.
“나야 그래 준다면야 좋긴 한데…… 정말 괜찮겠어?”
이강진은 FIHA 마니아이기도 하다. 게임에 대해 잘 아는 그가 스폰서가 되어 준다면, 오종한도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한번 다시 해 보자. 일단 우리들끼리 회의를 좀 한 다음에 정해지는 거 있으면, 그때 형한테 연락 줄게.”
“고맙다, 강진아.”
“나야말로 고맙지.”
이강진은 오종한의 재능에, 그리고 그의 사람됨에 투자를 하는 거였다.
오종한이라면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최고의 e스포츠 스타가 될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e스포츠 구단을 만들겠다.
이 말에 나두석이 들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괜찮은 방법인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여태껏 마케팅, 홍보 수단이 너무 평면적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층의 소비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이만한 방법도 없을 거 같습니다.”
“영혜 씨는 어때요?”
이강진의 물음에 최영혜도 깊은 공감을 표했다.
“저도 두석 씨하고 같은 생각이에요. 구단 만드시면, 연계해서 같이 이벤트 같은 것도 하면 될 거 같아요. 바라 코리아 제품 구입 시 프로게이머들의 사인품 증정!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말하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최영혜가 아주 중요한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팀을 만든다면, 명칭은 뭘로 정할 건가요?”
“일단 상호명이 들어가는 게 좋으니까 ‘바라’라는 단어는 앞에 넣을 거예요. 그다음은…… 생각을 좀 해 봐야겠네요.”
항상 그렇듯 네임 짓는 게 어렵다.
“일단 종한이 형하고 이야기 한번 해 볼게요. 종한이 형이 생각해 둔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종한이 주축이 되는 팀이니, 그에게 한번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회의는 이것으로 끝났다.
이제 오종한과 미팅을 가지는 일만 남았다.
* * *
“내가 생각해 둔 게 하나 있긴 한데.”
이강진의 예상대로 오종한은 미리 생각해 둔 구단명을 들려줬다.
“바라 케일러스. 어때?”
“케일러스? 그건 무슨 의미가 있는데?”
“별다른 뜻은 없고…….”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내가 초창기 때 사용했던 게임 닉네임이야. 시즌 2까지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바꿨지.”
참고로 현재 사용하는 오종한의 닉네임은 ‘카일스’였다.
이강진은 오종한의 현재 닉네임만 알고 있었다. 닉네임을 변경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내가 아마추어 시절 때 사용했던 닉네임이어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나름 애착이 있는 닉네임이어서 언젠가는 한 번쯤 써먹을 때가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싶어서. 아니면 너무 내 위주로 지으려는 건가?”
“아니, 괜찮아. 어감도 나쁘지 않고. 그대로 가도 될 거 같은데? 두석아, 너는 어때?”
“저도 마음에 듭니다. 바라 케일러스. 괜찮네요. 그럼 바로 로고 작업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바라 케일러스를 전담으로 맡아 서포트를 해 줄 지원 팀도 따로 만들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FIHA 팀으로만 창설할 예정이지만, 나중에는 AOS, 격투, FPS, 그리고 모바일 게임 등으로 활동 분야를 넓힐 계획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 형.”
“나야말로. 이제부터 구단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편하게 대해 줘, 하하!”
한번 전우는 영원한 전우니까.
* * *
신년을 맞이하자마자 이강진은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FIHA 시즌에 맞춰서 e스포츠 팀을 창설해야 했기 때문에 준비를 서둘렀다.
팀원들을 구하고, 앞으로 이들이 생활하게 될 숙소도 마련했다.
오늘은 게이머들이 머무를 숙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깔끔하니 좋네. 잘 구했어.”
“감사합니다.”
나두석에게 맡겨 두면 무조건 중간 이상의 결과는 나온다.
앞으로 팀원들을 더 받을 것까지 고려해서 최대한 넓은 숙소로 구해 뒀다.
1층은 연습실과 회의실, 그리고 2층은 침실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같이 온 오종한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여태껏 생활했던 숙소 중에서 가장 좋은 거 같은데?”
“우리 회사가 복지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안 그래도 업무,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텐데, 이강진은 그 외적인 걸로 직원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만큼 더 복지를 증진시키기로 했다.
그 결과, 바라 코리아는 계속해서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 방식이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도 통하리라.
이강진은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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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들 (2)
바라 코리아가 새로운 e스포츠 팀을 만든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강진에게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처음에는 거절할까 생각했었던 이강진. 그러나 팬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속 시원하게 풀어 주는 것 또한 대표로서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뷰 요청을 몇 군데에서만 받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엔조이 게임의 박운철 기자입니다.”
“바라 코리아 대표 이강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인터뷰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심 대표님이 인터뷰를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었거든요.”
“e스포츠 팬분들이 궁금한 게 많으신 거 같아서요. 그래서 선뜻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팬들과의 소통.
이것은 e스포츠에서 굉장히 중요한 업무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이번에 새로 창설하게 된 ‘바라 케일러스’ 말입니다. 여러 팀에서 탐내는 오종한 선수를 영입하셨던데, 어떤 경위로 영입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래서 박 기자도 첫 질문으로 오종한과의 관계를 물었다.
“군대 선후임 관계였습니다. 같은 중대였죠.”
“그랬었나요? 아! 그래서 오종한 선수가 작년 결승 경기를 할 때 응원하러 왔었군요.”
이강진과 1075대대 1중대원들의 모습이 담긴 결승전 영상이 아직도 가끔 e스포츠 전문 채널에서 재방송되곤 했다.
한때는 그게 증거로 남아서 간부들에게 들키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경우도 있었다. 합법적으로 단체 응원을 갔던 것도 아니고, 외박으로 점프해서 간 거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강진이 군 생활을 마칠 때까진 들키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당당했다.
“군대에서 만난 인연이라…… 여태껏 많은 프로게이머들을 인터뷰해 봤지만, 선수와 스폰서 대표가 군대 선후임 관계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 거 같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저 말고도 KGE의 멤버 중에 태강이라고 있죠? 그 형도 같은 부대 출신이에요.”
이렇게 보면 1075대대는 유명인들을 참 많이 배출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넘버 원 보이 그룹 리더인 성태강과 e스포츠 FIHA분야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는 레전드 프로게이머 오종한, 대세 래퍼 백우호에다가 웹툰 작가 김철, 마지막으로 요식 업계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강진까지.
이강진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박 기자는 감탄사를 꺼내면서 말했다.
“제 동생도 1075대대로 지원해서 가라고 해야겠네요. 올해에 군대 가거든요.”
“대신 거기 가려면 각오는 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사건 사고가 정말 많이 일어나는 곳이거든요.”
현역 시절 때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아직도 그것들 때문에 가끔 군대 꿈을 꾸곤 하는 이강진.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1075대대에서 근무해 보는 것도 할 만하지 않을까.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 * *
한아름 수제버거 가게 분점 오픈과 바라 식당, 티날레 지점 추가 오픈, 그리고 e스포츠 팀 창설까지.
올해 초부터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내는 이강진에게 오랜만에 이용진한테서 연락이 왔다.
-강진아,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한번 볼까?
“나를? 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배 비우고 와. 알았지? 그럼 끊는다.
보통 이용진이 ‘내가 산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
‘나한테 뭔가 부탁할 일이 있다는 뜻인데.’
백두원의 푸드기행 때에도, 그리고 플래나 레스토랑 때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러지?’
플래나 레스토랑이 종영된 지 꽤 됐다.
이제 슬슬 다른 프로그램을 촬영할 시기가 다가왔다.
어쩌면 저번처럼 방송에 대한 상담을 요청하기 위한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
‘시간 넉넉하게 비워 둬야겠네.’
그래도 너무 늦은 시간까지 이용진과 함께 있을 순 없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은 바로…….
‘지윤 씨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날이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 * *
이강진의 예상대로 이용진은 방송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내가 괜찮은 아이템을 하나 떠올렸거든. 근데 너 없이는 안 될 거 같아서.”
“어떤 아이템인데?”
“우리나라에 음식점 창업하려는 분들이 많이 계시잖아? 그런 분들을 도와주는 소재로 방송을 만들어 볼까 해서.”
이강진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네 사업적 수완을 굉장히 높게 사고 있거든. 그걸 잘 활용하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하나 나올 거 같아서 이렇게 널 보자고 한 거야.”
“음…….”
이번에는 이강진이 메인이 되어야 한다.
플래나 레스토랑과는 전혀 달랐다.
“형이 이번에 처음으로 메인 PD 맡는다고 했지?”
“어. 그래서 더더욱 이번 프로그램 제작에 집중하고 싶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네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고.”
“내가 거절한다면?”
“이 아이템은 파기지.”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지였다.
아니, 어쩌면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강진은 요식업에서 단련한 사업적 수완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대중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방송 경험까지 지니고 있다.
섭외 1순위가 이강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 일정 내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촬영일은 네 중심으로 맞출 거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부담 안 가져도 돼. 네가 바쁘다는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은 다 양보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이강진을 섭외하고 싶어 했다.
방송의 힘은 상당하다. 그건 누구보다도 이강진이 더 잘 안다.
방송 덕분에 지금의 바라 식당이, 그리고 지금의 바라 코리아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까.
매력적인 제안이긴 했다.
이강진이 주기적으로 방송에서 모습을 비치면서 활동을 이어 가면, 그가 운영하는 요식업 레이블들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백두원 선생님도 계신데, 내가 해도 될까?”
“오히려 백두원 선생님이 너를 추천하셨어.”
“나를?”
“어. 네 사업적 감각을 굉장히 높게 사시는 거 같더라고. 그리고 요식업에 대한 열정도. 너라면 충분히 잘 해낼 거라고 나한테 조언해 주시더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늘 기분 좋은 일이다.
게다가 상대가 일반인도 아니고 요식 업계에 한 획을 그은 백두원 아닌가.
작게 한숨을 내쉰 이강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좋은 제안 해 줘서 고마워, 형.”
고민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이다.
이건 어쩌면 이강진의 사업을 한 단계 위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 * *
인천공항으로 향한 이강진은 잠시 차를 주차시킨 뒤에 한지윤한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차에서 10분 정도 대기하고 있을 무렵.
한지윤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강진 씨, 어디 계세요?
“5번 게이트로 나오시면 됩니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 네. 그럼 조금 있다가 봬요.
이강진의 걸음이 빨라졌다.
몇 달 만에 한지윤을 보는 것인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저 멀리서 캐리어를 끌면서 걸어오는 한지윤.
얼굴을 가렸어도 이강진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잘 다녀왔어요? 캐리어는 저 주세요.”
“고마워요.”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은 후에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올랐다.
원래는 매니저가 한지윤을 데리러 오려고 했었으나, 집이 가까운 이강진이 그녀를 데리고 오는 것이 더 편할 거 같았다. 그래서 매니저는 이강진에게 차례를 양보해야만 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매니저 언니가 강진 씨하고 만나는 거, 최대한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주의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지금 지윤 씨는 기자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니까요.”
그녀가 출연했던 미국 드라마, ‘타임 투 다이(Time to Die)’가 현지에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국에서도 한지윤이 출연한 미드라는 타이틀 덕분에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다.
이제 미국이 주목하기 시작한 여배우가 된 한지윤.
만약 그녀에 관한 화젯거리를 발견했다 싶으면 기자들은 지체 없이 바로 기사로 내보낼 것이다.
이런 시기였기에 더욱 주의해야만 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네.”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매는 한지윤.
인천공항에서 강남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그나마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차가 막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동안 이들은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사 봤어요. 강진 씨, e스포츠 쪽에 팀 만들었다면서요?”
“네. 종한이 형이라고, e스포츠에서 잘나가는 형이 한 명 있거든요. 그 형이 기존 팀에서 나온다고 들어서 이번 기회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줬습니다.”
출범하자마자 바라 케일러스는 프로 리그 1위라는 쾌조의 스타트를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바라 코리아 계열사들도 매출이 껑충 뛰어올랐다.
특히 한아름 수제버거가 가장 많은 득을 봤다.
아무래도 e스포츠의 주요 타깃이 젊은 층이다 보니 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수제 버거가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주에 경기 있는데, 직접 관람하러 갈까 고민 중입니다.”
“좋죠. 강진 씨가 주기적으로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바라 코리아 홍보도 많이 될 거예요. 괜히 대표 직함 다신 분들이 여기저기에 출연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다 마케팅의 일환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강진은 한지윤에게 조언을 구해 보기로 했다.
“실은 여기에 오기 전에 용진이 형 만났습니다.”
“이용진 PD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지윤 씨랑 같이 플래나 레스토랑 작업했던 그 형입니다. 이번에 용진이 형이 새롭게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 거라고 하더라고요. 메인 PD로서 만드는 첫 작품이라는데, 저한테 섭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강진은 이용진이 만들 프로그램이 어떤 건지, 내용까지 다 설명을 해 줬다.
“그 프로그램에 나갈지 말지 고민하시는 거죠?”
“예.”
방송 업계에서 나름 오래 일을 했던 한지윤은 이강진에게 과연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그녀의 대답을 듣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연해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까와 같은 이유인가요?”
마케팅, 홍보.
한지윤이 말했던 것들이다.
“음, 그것도 있는데, 개인적인 욕심도 있어서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한지윤.
“강진 씨하고 같이 방송 해 보고 싶어요.”
이강진이 군인이었을 때, 한지윤은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언젠가 카메라 앞에 나란히 투샷으로 잡히고 싶다.
이강진 역시 그녀를 따라 웃었다.
“용진이 형한테 조건을 걸어야겠네요. 지윤 씨도 같이 출연시켜 달라고.”
물론 반은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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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들 (3)
다시 이용진과 만나게 된 이강진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꺼냈다.
자신이 한지윤의 팬인데, 한지윤하고 같이 방송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자신도 이용진의 캐스팅 제의를 흔쾌히 승낙하겠다고.
물론 진담으로 말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용진의 대답은 한없이 진지했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지윤 씨한테 오늘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연락을? 왜?”
“캐스팅하고 싶어서.”
농담이 진담이 되었다.
“플래나 레스토랑 촬영 때 보니까 지윤 씨가 예능감이 괜찮은 편이더라고. 요즘 핫한 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지윤 씨도 캐스팅 제의 건네 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렇게 말해 주니까 오히려 다행이네. 네가 방송 파트너로 지윤 씨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이강진과 한지윤이 사귀는 줄 꿈에도 모르는 이용진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자, 그럼 너도 내 방송에 나와 주는 거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지윤도 이강진에게 방송에 한번 출연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했었다.
이미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강진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알았어. 잘 부탁해, 형.”
“나야말로. 우리, 재미있는 방송 만들어 보자!”
이강진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아 주는 이용진.
어떤 방송이 탄생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 * *
이용진이 구상한 프로그램, ‘외식의 왕도’의 출연진이 모두 결정되었다.
고정 출연자는 총 세 명.
이강진, 한지윤 그리고 진행을 맡게 될 MC 강한도.
이렇게 세 명이 최종적으로 출연을 확정 지었다.
외식의 왕도 제작 결정과 동시에 다수의 기사가 인터넷에 업로드되었다.
최근 주가를 올리기 시작한 젊은 MC, 강한도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우뚝 서게 된 한지윤의 출연만으로도 큰 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못지않게 이강진의 이름도 대중의 입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다.
국민 영웅에서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 변신해 다시 한번 대중 앞에 서게 된 이강진.
기사가 나갔을 때, 이강진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 순위에 랭크될 정도로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강진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반응이었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들을 홍보하기 위해 방송 출연을 결정했는데, 막상 방송이 묻혀 버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화제성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이강진의 첫 번째 목적이다.
‘일단 스타트는 좋네.’
티날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는 얼굴이 가게를 방문했다.
이용진과 외식의 왕도 작가진이었다.
김원홍이 이용진 일행을 반겼다.
“어서 와요. 대표님은 저기 안쪽에 계실 겁니다.”
“고마워요, 원홍 씨.”
오늘은 이곳에서 제작 발표회 그리고 첫 녹화에 관한 미팅을 가지기로 했다.
이강진은 이용진과 함께 온 작가들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이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작 발표회는 너도 알겠지만 다음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될 거고, 그때 한도 씨하고 지윤 씨 다 참석할 거야. 기자들이 이것저것 질문 많이 할 텐데, 네가 한번 들어 보고 프로그램에 관련이 없는 사적인 질문이라고 판단이 들면 대답 안 해도 돼. 그런다고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설령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다 커버 칠게.”
“알았어. 고마워, 형.”
“내가 더 고맙지. 그리고 첫 녹화 일정에 관해서인데…… 미영아, 자료 챙겨 왔어?”
가방을 뒤지던 서미영 작가의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죄, 죄송해요. 깜빡 잊었어요.”
“또? 내가 저번에 말했지. 미팅 있으면 자료들 잊지 말고 꼭 챙기라고.”
“……죄송합니다.”
프로그램 준비에 한창이었기 때문에 이용진의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첫 준비작 아닌가.
스트레스를 상당히 많이 받는 듯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강진이 나서서 분위기를 밝게 해 보려고 했으나.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이 있었다.
“어흠!”
김원홍이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이야기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주문하신 음료, 디저트 나왔습니다. 여기에다 놔드리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음료가 서빙되자마자 이용진은 티날레의 자랑인 에일 밀크티를 마셨다.
아이스 에일 밀크티의 시원함이 달아오른 이용진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 줬다.
“기회가 된다면 여기도 꼭 제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싶네요.”
“그럼 저도 티비에 나오는 겁니까? 미용실 예약해 둬야겠군요.”
과장된 액션을 취하면서 한껏 기대감에 부푼 모습을 보여 주는 김원홍.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언행을 보여 줬다.
그의 마음 씀씀이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이용진은 한 차례 크게 웃더니, 이내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원래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이 아닌데, 원홍 씨 덕분에 좀 차분해진 거 같습니다.”
“조급해하면 잘 풀릴 일도 안 풀리게 됩니다. 제가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 본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렇더라고요.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열심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이 대표님이 저를 찾아 주신 것처럼요.”
갑자기 이강진 이야기가 나오자, 당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강진과의 만남이 김원홍의 인생을 바꿨다.
그것은 물론…….
이용진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 * *
제작 발표회에 참가하기 위해 미용실에 들른 이강진.
이른 시간에 나와 빠르게 머리 스타일링을 받고서 발표회가 열릴 장소로 향했다.
현장에는 벌써부터 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대기실에서 잠시 물로 목을 축이던 때.
한 남자가 이강진이 있는 대기실을 찾았다.
“강진 씨! 여기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한도 씨.”
외식의 왕도 MC를 맡기로 한 강한도가 이강진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사전 미팅 당시에 출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적이 있었다. 그때 강한도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었다.
강한도는 이강진의 전신을 빠르게 쭈욱 훑었다.
“이야, 꾸미고 오니까 배우 못지않은데요?”
“하하, 과찬이에요.”
“아니요, 아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이거, 강진 씨 옆에 서니까 제가 괜히 주눅이 드네요.”
연예인이 일반인을 보고 주눅이 드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그 정도로 이강진이 자기 관리에 매우 힘을 썼다는 것을 뜻했다.
처음에는 한지윤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자는 것이 이강진의 목표였다.
그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섰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누는 동안, 스태프가 대기실을 찾았다.
“곧 제작 발표회 시작하니까 준비해 주세요.”
“예. 가시죠, 강진 씨.”
“알겠습니다.”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한지윤이 이강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긴장하실 거 없어요, 강진 씨. 제가 있으니까요.”
카메라 앞에 자주 서 본 한지윤과 강한도는 사실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강진은 이들에 비해서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
긴장하고 있을 남자 친구를 위해서 한지윤은 사람들 몰래 이강진의 손을 잡아 줬다.
“고마워요, 지윤 씨.”
이강진의 말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참가해 보는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발표회.
무대에 오르기 전에 이강진은 남몰래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 후.
“외식의 왕도 출연진, 그리고 PD님을 무대로 모셔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드디어 시작된 제작 발표회.
새로운 도전을 향해 이강진은 힘찬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 * *
수많은 플래시들이 사방에서 터졌다.
이강진은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
‘연예인들은 늘 이런 풍경을 보면서 생활하는 건가?’
내심 한지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잠시 포토 타임을 가진 후에 자리에 앉았다.
가장 먼저 강한도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한도 씨는 이번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됩니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예전부터 먹는 걸 정말로 좋아합니다. 미식가……는 아니지만, 맛에 대해선 잘 안다고 자부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요리 프로그램 진행을 한번 맡아 보고 싶었는데, 이용진 PD님이 이렇게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셔서 MC를 맡게 되었습니다.”
역시 프로 MC답게 멘트에 막힘이 없었다.
이다음은 한지윤의 차례였다.
한지윤 또한 마찬가지로 능숙한 대답을 보였다.
이제 이강진의 차례가 도래했다.
“내일 미디어의 정수환 기자입니다. 강진 씨가 한때 국민 영웅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잖아요.”
“예, 그렇죠.”
“이번에는 국민 영웅이 아닌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 나오시게 되었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하실지 각오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음식만 잘하면 무조건 성공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명칭을 정확하게 언급해도 되나 잘 모르겠지만…… 백두원의 푸드기행에서 바라 식당이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맛은 충분히 낼 수 있는 집이었지만, 홍보와 마케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묻힌 맛집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다르지만요.”
말이 길어진다 싶을 때에는 천천히 템포를 조절해 가면서 자신의 멘트를 이어 갔다.
“자영업을 한다는 건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장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혹은 경험이 전혀 없어서 괴로워하시는 분들에게 저만의 노하우를 알려 드리면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이게 프로그램에 임하는 제 마음가짐입니다.”
물론 이강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대중에게 드러내면서 바라 코리아도 같이 홍보하겠다는 속내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속내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지 관리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이크가 이용진에게 넘어갔다. 그사이 한지윤과 강한도가 이강진에게 잘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방송인 다 됐나 보네.’
이강진은 속으로 몰래 웃음을 삼켰다.
* * *
드디어 외식의 왕도 첫 녹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1화 주인공은 카페 창업을 준비하는 20대의 젊은 두 형제였다.
“류석훈이라고 합니다!”
“류석인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씩씩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출연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메라가 돌기 전에 강한도는 두 사람에게 기본적인 질문을 했다.
“어느 분이 형인가요?”
“접니다.”
류석인이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이강진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대표님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결심이 선 것도 대표님이 만드신 티날레 덕분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저 혼자 티날레를 만든 건 아니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연이 닿게 되었으니, 같이 열심히 힘내 봅시다.”
“예!”
이렇게 보면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강진의 조언을 믿고 잘 수용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방송이라는 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임을 이강진은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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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자세 (1)
외식의 왕도 오프닝 촬영이 시작되었다.
매회 게스트를 섭외해서 진행하는 방식이 아닌, 요식업 관련 창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출연자 세 명이 다 등장한 채로 오프닝을 맞이했다.
진행은 역시 강한도의 몫이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외식의 왕도! 의뢰를 주신 분들을 왕도의 길로 이끄실 분이 바로 제 옆에 계십니다. 국민 영웅에서 외식 사업가로, 변신에 성공한 이강진 대표님이십니다!”
한지윤과 게스트들이 이강진에게 박수를 쳐 줬다.
이강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강진입니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거 같아서 좀 떨리네요.”
“하시다 보면 금방 적응되실 거예요. 그리고 옆에는 저희를 도와줄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 한지윤 씨입니다!”
이번에도 박수로 한지윤을 환영했다.
짧게 자기소개를 마친 후에 강한도는 외식의 왕도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시청자들에게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외식 관련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첫 화인데도 불구하고 저희를 찾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시더라고요. 자영업자를 꿈꾸는 분들이 상당하신가 봐요?”
이강진이 강한도의 멘트를 받아 줬다.
“예. 수백, 수천 개의 가게가 매번 생기니까요. 하지만 문을 닫는 가게 역시 수백, 수천 개입니다.”
그만큼 자영업이라는 게 상당히 힘들다.
이강진도 이미 회귀하기 이전의 인생에서 몇 번의 실패를 맛봤다.
그토록 열심히,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실패를 하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들면 망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자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취지다.
“첫 번째 사연을 보내 주신 분들부터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주세요!”
형인 류석인이 먼저, 그리고 동생이 차례로 등장했다.
“자기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릴게요.”
“서울 사는 류석인입니다. 반갑습니다!”
“동생인 류석훈입니다!”
“아주 파이팅이 넘치는 형제분들이시네요. 어떤 가게를 차리고 싶으세요?”
강한도의 질문에 이들은 지체 없이 바로 대답했다.
“이강진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티날레처럼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카페를 운영해 보는 게 저희 형제의 꿈입니다!”
슬쩍 티날레를 언급해 주는 센스. 아주 좋다.
방송에 자주 언급이 될수록 그만큼 홍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가게를 운영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일단 장소만 확보해 뒀고, 지금 인테리어 작업을 맡겨 둔 상태입니다. 다음 주면 다 끝날 겁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가게부터 먼저 보러 갈까요? 어떤가요, 대표님?”
이강진은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죠. 가게 위치도 중요하니까요. 가시죠.”
여기까진 대본대로다.
두 형제가 잡아 뒀다는 카페 건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에 이강진은 먼저 이런 말을 흘렸다.
“가게 위치는 좋네요. 전철역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거리라서 눈에도 잘 띌 거 같습니다.”
장소는 합격이다.
설령 위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이미 인테리어 공사까지 다 들어간 마당에 이제 와서 다른 장소로 옮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강진은 류씨 형제로부터 어떤 인테리어로 꾸며질지 대략 설명을 들었다.
“대표님께서 피드백 주시면,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테이블, 의자 색깔은 눈에 확 띄지 않는 차분한 색으로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갈색이 제일 좋을 거 같네요. 근처에 보니까 회사가 많던데, 아마 업무 관련 미팅을 위해 이곳을 찾는 회사원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려면 시야를 방해하는 색상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죠. 물론 밝고 특이한 색으로 젊은 감각과 개성을 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여기는 대학가가 아니니까요.”
주 타깃층이 누가 될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맞춤형 인테리어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음식도, 음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하기보다는 이곳을 찾아올 손님들을 위주로 가게를 꾸민다고 항상 생각하세요. 그러면 가게를 운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예, 대표님!”
두 형제는 이강진이 한 말을 고스란히 수첩에 받아적었다.
이런 열정적인 태도, 이강진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이 태도가 쭉 유지된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더 걱정은 없을 것 같다.
* * *
가게 위치와 인테리어는 확인했고.
이제 가장 중요한 맛을 확인할 차례다.
이강진이 류씨 형제에게 물었다.
“시그니처 메뉴로 내세울 건 어떤 겁니까?”
“얼그레이 커피입니다.”
“얼그레이라. 비율 조절 잘하셔야 할 텐데. 그럼 얼그레이 커피 두 잔하고 아메리카노 세 잔, 그리고 헤이즐넛 커피 두 잔. 일단 이렇게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항상 씩씩하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강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커피를 어떻게 만드는지, 뒤에서 직접 확인을 했다.
맛만 보고 대충 어떤지 평가만 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다. 음료를 만드는 과정까지 봐야 좀 더 상세한 피드백을 줄 수 있다.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것 때문일까, 시선의 압박을 느낀 모양인지 류씨 형제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강진은 두 사람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배운 대로만 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강진이 주문했던 음료들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시음은 이강진 혼자만 하지 않았다.
강한도 그리고 한지윤도 함께했다.
필요하다 싶으면 스태프들에게도 한번 맛을 보게 할 생각이었다.
이강진이 가장 먼저 택한 건 바로 아메리카노.
시음 전에 이강진은 아메리카노를 먼저 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느 카페에도 있는 메뉴.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찾는 메뉴. 그게 바로 아메리카노입니다. 그 카페의 기본 실력이 어떤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되거든요.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던 겁니다.”
설명을 마치고 바로 시음에 들어가는 이강진.
그의 소감은 간단했다.
“무난하네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듣는 입장에서도 칭찬인지 욕인지 제대로 구분이 안 갔다.
문제는 류씨 형제가 자신 있다고 했던 얼그레이 커피였다.
커피를 맛본 순간, 이강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의 리액션에 류씨 형제는 덩달아 긴장했다.
방송에 들어가기 전에 이용진 PD는 이강진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의뢰인들을 위해서라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피드백을 하라고.
자극적이어도 좋다. 아니, 오히려 자극적인 편이 프로그램의 흥행을 위해서 더 좋긴 했다.
이강진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엉망진창입니다.”
“…….”
“…….”
혹평이 쏟아졌다.
“농담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맛봤던 얼그레이 커피 중에서 가장 맛없습니다. 비율이 완전 엉망이에요. 핸드드립 추출할 때 원두 얼마나 사용했어요?”
“7g입니다.”
“너무 적어요. 15g으로 맞춰야죠. 티백 우린 시간은?”
“1분입니다.”
“30초 더 우리세요. 이러니까 향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죠.”
“…….”
류씨 형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형인 류석인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제가 봤을 때에는 방금 만든 비율이 더 맛이 좋게 나오던데…….”
“그건 석인 씨의 취향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만 해당되는 거죠. 인테리어 때 제가 말씀드렸죠? 요식업의 기초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맞추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주로 맞추는 거라고.”
분위기가 많이 무거워졌다.
한지윤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강진의 모습을 아예 처음 봤다.
군대에서는 이것보다 더 크게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그것도 자주.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진짜 잘 순화해서 말한 거야.’
이강진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류석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이강진은 직감했다.
‘내 말대로 안 할 생각이네.’
사업을 하면서 이강진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왔다.
그러다 보니 류씨 형제가 이강진의 피드백을 받아들일지 말지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빤히 보이는 결과.
이강진은 몰래 한숨을 삼켰다.
* * *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이강진은 이용진을 따로 찾았다.
“류석인 씨하고 류석훈 씨, 다음 주에 카페 오픈한다고 했지?”
“어, 그렇지.”
“저 사람들, 내가 준 피드백대로 안 할 거야.”
“응?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말만 그렇게 한 거지, 표정이나 눈빛만 봐도 내 의견을 납득 못 하겠다는 게 확 느껴졌어.”
이용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면 곤란한데…….”
“곤란할 건 없지.”
이강진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일단 본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해. 한 2주 동안 경과를 지켜보는 거지. 본인들의 방식이 실패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해야 내 피드백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거야.”
그 과정을 방송으로 내보내면 된다.
이강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스태프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둘게.”
“잘 부탁해, 형.”
“나야말로. 그리고 오늘 고생 많았다. 가서 쉬어.”
힘든 첫 녹화가 끝났다.
하지만 마무리가 그리 깔끔하진 않았다.
이용진은 오히려 숙제만 가득 받고 끝난 그런 느낌이었다.
* * *
류씨 형제의 카페가 오픈한 지 2주째.
그동안 스태프들은 관찰 카메라를 설치해 2주간의 성적이 어떤지 지켜보기로 했다.
오픈빨 덕분인지 첫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1주 차가 넘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많던 사람들이 어느새 다 사라졌다.
2주 차 때에는 손님 대신 파리만 날리는 카페가 되어 버렸다.
류씨 형제의 입에서 덩달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용진 PD가 작가를 대동해서 직접 가게를 찾았다.
류씨 형제의 현재 심경을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직접 카페 차려 보니까 어떤 거 같아요?”
이용진의 질문.
대답은 류석인의 몫이었다.
“첫날에는 손님들도 많이 찾아오시고,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점점 발길이 끊기더라고요. PD님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제 손님이 없어요.”
다들 호기롭게 가게를 창업한다.
하지만.
젊음에서 오는 패기만으로 이 각박한 창업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굉장히 힘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표님 말씀 잘 들을 걸 그랬어요.”
뒤늦게 후회를 해 보는 류석인.
사실 그는 이강진이 알려 준 레시피대로 커피를 제조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맛을 믿었다가 제대로 피를 보고 말았다.
이용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강진 대표는 알고 있었어요. 석인 씨하고 석훈 씨가 자신이 알려 준 레시피대로 따라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저, 정말요……?”
“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이야기를 안 한 거예요. 한번 깨져 봐야 받아들일 자세가 갖춰진다나, 하하하!”
류씨 형제한테는 그야말로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이용진은 그들에게 용기를 심어 줬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강진 대표는 오늘 같은 결과가 나올 거까지 전부 다 예측해 뒀다고 했으니까요.”
“앞으로 대표님 말씀 잘 듣겠다고 꼭 전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이강진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순간 이용진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진이를 차라리 방송 작가로 고용할 걸 그랬나?’
시나리오를 한두 번 써 본 솜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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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자세 (2)
#받아들이는 자세 (2)
이른 시간에 사무실로 출근한 이강진은 나두석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나, 오후에 촬영 있으니까 결재할 거 있으면 10시 전까지 다 가져와.”
“예, 안 그래도 대표님 드리려고 지금 결재 서류들 준비 중입니다. 30분 후에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방송 촬영 때문에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어차피 이강진이 오랫동안 사무실을 비워도 회사는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
나두석을 비롯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강진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강진은 바라 코리아가 나아갈 전체적인 방향만 제시하면 된다.
‘아니, 최근에 하나 더 추가되었지.’
방송에 꾸준히 얼굴을 비치면서 바라 코리아를 홍보한다. 이것이 이강진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아직 외식의 왕도 첫 화 녹화 분량이 송출되지 않았다.
다음 달 12일 저녁 11시부터 정기적으로 전파를 탈 예정이다.
그 전까지 이강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
‘열심히 방송에 임하면 돼.’
이강진은 이용진한테서 받은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류씨 형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많이 줄었더라. 어제 류씨 형제하고 이야기 나눠 봤는데, 앞으로 네 피드백 잘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어. 원한다면 각서까지도 쓸 의향이 있던데?]
“각서는 좀 오버고.”
첫 화부터 그런 자극적인 아이템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첫 녹화가 끝났을 뿐이다. 아직 외식의 왕도가 가야 할 길이 멀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첫 화에서 모든 걸 보여 주면 안 된다.
오늘 녹화는 어떤 식으로 진행하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고 있을 무렵.
“대표님,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결재 서류들입니다.”
나두석이 밀린 숙제거리를 가득 가져왔다.
일단은 본업부터.
방송 일은 잠시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좋아 보였다.
* * *
류씨 형제의 카페에 들르기 전에 이강진과 촬영 팀은 두 번째 의뢰자인 부대찌갯집 황유준 사장을 찾았다.
황유준은 류씨 형제와 다르게 이강진의 솔루션을 웬만하면 다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손님들이 맛있다고 난리더라고요!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반응이 좋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황유준 사장의 부대찌갯집은 솔루션이 굉장히 간단했다.
부대찌개가 너무 짜다. 그러니까 짠맛을 최대한 순화시켜라.
이게 다였다.
이 사소한 차이가 가게 매출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기왕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한도 씨하고 지윤 씨도요. 어서!”
원래 이곳에서 식사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황유준 사揚? 태도가 워낙 강경했기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강한도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꺼냈다.
“여기서 밥 먹고, 이후에 류씨 형제네 가서 커피 한잔 하고. 그러면 되겠네요.”
류씨 형제 이야기가 나오자, 한지윤이 걱정을 드러냈다.
“가게 오픈하고 성적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괜찮을까요?”
대답은 이강진의 몫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괜찮게 만들어야죠.”
그것이 이강진과 스태프들이 해야 할 일이다.
* * *
부대찌갯집에서 배를 채운 후.
이강진은 오랜만에 류씨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았다.
그를 보자마자 류석인과 류석훈은 대뜸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옆에서 여러분들에게 이러이러한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이지,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선택은 류씨 형제의 몫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류씨 형제의 선택이 틀렸다.
요식업 경험으로 따지면 이강진이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강진은 사업을 하면서 류씨 형제가 겪어 보지 못했던 별의별 일들을 다 경험했다.
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류씨 형제가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하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욕해도 좋으시니 부디 다시 한번 저희에게 기회를 주세요!”
“하하하! 욕 안 해요. 카메라 앞인데, 큰일 날 일 있나요.”
달라진 태도를 보이는 류씨 형제.
이강진은 이들을 위해 특별한 게스트를 모셔 왔다.
“오늘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분을 특별히 섭외했습니다.”
“……!”
류석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티날레를 보고서 카페 사장의 꿈을 키워 온 그라면, 이강진이 데려온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티날레의 간판, 김원홍.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원홍이라고 합니다.”
동경의 대상이 직접 이곳에 나타나자, 류석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이강진은 김원홍을 일부러 데려왔다.
‘내 솔루션은 그렇다 치더라도, 원홍 씨 솔루션은 안 받을 수가 없겠지.’
류씨 형제를 상대로 이강진은 치트키를 꺼내 든 셈이었다.
* * *
이강진의 예상대로 류씨 형제는 김원홍이 알려 준 비법 그대로 착실하게 따랐다.
그 덕분에 조금씩 다시 손님들이 늘었다.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한 건 외식의 왕도 1화가 방송을 탔을 때부터였다.
방송일을 기점으로 류씨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와 황유준 사장의 부대찌갯집은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이강진이 누누이 강조했던 방송의 힘이다.
하나 방송의 힘에만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
방송의 효과는 일시적일 뿐.
결국 손님들을 계속 자신의 가게로 오게끔 만드는 건 ‘맛’이다.
그 맛에 대한 솔루션은 이미 끝났다. 나머지는 당사자들이 그 솔루션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행하느냐, 이것에 달렸다.
외식의 왕도 2편이 전파를 탄 다음 날.
갑자기 이용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강진아, 시청률 대박 났다! 듣고 놀라지 마라. 12.1% 나왔어!
요즘 시기에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률 10퍼센트 이상 나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 힘든 일을 외식의 왕도가 해낸 것이다.
“축하해, 형.”
-너도 같이 축하받아야지. 아무튼 정말로 고맙다. 우리, 이대로만 쭉 가자!
이용진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기뻐하니까 이강진도 덩달아 기뻤다.
외식의 왕도가 시청자들 사이에서 핫한 프로그램으로 떠오른 덕분에 이강진과 바라 코리아의 주가도 상승했다.
회사 매출로도 직결이 될 정도로 방송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여기저기서 이강진을 향한 러브콜도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식품 연계 사업을 비롯해서 광고 문의 등 다양한 제안들이 쇄도했다.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이강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셰프들이 예능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그러나 이강진은 셰프가 아닌 성공한 외식 사업가로서 방송계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요즘은 한지윤보다도 더 바빠지기 시작한 이강진이었으나.
‘그래도 할 일이 없는 것보다 정신없이 바쁜 게 좋지.’
오히려 그는 지금의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방송도 잘 풀려 가고 있고.
사업은 말할 필요도 없이 꾸준하게 성장세를 이어 가고 있다.
이제 하나 더.
‘시프코인까지 대박을 치면 완벽하겠군.’
점점 가상 화폐에 대한 입소문이 퍼져 가고 있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벌써부터 시프코인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강진은 여유 자금을 전부 다 시프코인에 때려 박아 버렸다.
이제 고점을 찍었을 때 팔기만 하면 된다.
이강진은 지인들에게도 이미 시프코인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줬다.
“아, 맞다. 우호한테도 알려 준다는 걸 깜빡했네.”
이강진이 시프코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백우호가 먼저 그에게 ‘시프코인이라는 게 뜰 거 같다는데, 그게 뭐야?’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가상 화폐가 뭔지 알려 주기로 했건만.
‘서로 바쁘니까 만날 시간이 통 생기질 않네.’
체크 인 아웃의 초대 챔피언이 된 백우호는 이강진보다도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연 섭외 순위 1위.
10대, 20대들에게 인기가 많다 보니, 전국의 대학들이 어떻게든 백우호를 초청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 행사 참가를 위해 전국 여기저기를 누비는 백우호.
쉴 틈이 안 보이는 백우호의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이강진은 요즘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전화나 한번 해 볼까.’
신호음이 얼마 가기도 전에 백우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우호야, 나다.”
-어, 강진아.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저번에 네가 시프코인이 뭔지 물어봤었잖아. 그거 알려 주려고 전화했지.”
핵심만 간단히 축약해서 말해 줄 수도 있었다.
요점은 결국 그거다.
“사 둬. 대신에 전 재산 다 꼬라박지 말고.”
올인할 필요는 없다.
이강진도 시프코인이 대박을 터뜨릴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자금만 넣기로 했다.
지나친 맹신은 오히려 독이 된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나도 사 둘게.
“그렇게 단번에 결정해도 되는 거냐?”
-네 말 안 들었다가 군대에서 피 본 게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네가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고. 전문가가 말하는데 얌전히 따라야지.
사업가이자 방송인이기도 한 이강진이지만, 그 이전에 성공한 주식 투자가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식을 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주력으로 삼고 있진 않았다.
당분간은 시프코인에 집중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걸로 돈 벌면, 내가 나중에 크게 한턱 쏠게.
“방금 네가 한 말 녹음해 둘 테니까 잊지 마.”
-그래, 그래. 아, 그리고 말이야. 너 혹시 ‘그거’ 왔냐?
“그거? 뭔데?”
-동원 훈련 문자.
전역했다고 군대와의 연이 아예 끝나는 건 아니다.
동원 훈련이 아직 남아 있다.
작년에는 1월 전역자로 분류가 되었기 때문에 동원 훈련을 받지 않고 해를 넘길 수 있었다.
하나 올해는 다르다.
무조건 받아야 한다.
대학생 신분이라면 학생 예비군으로 빠질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이강진은 대학생이 아니었다.
동원 훈련 하나 피하겠다고 대학 진학을 결심하는 건 너무 오버다.
‘그냥 얌전히 받고 오는 게 낫지.’
백우호도 이강진과 같은 입장이었다.
-어제 콘서트 하고 있는데, 동원 훈련 받으러 오라고 문자 날아왔더라.
“난 아직 못 받았어.”
-그래? 훈련받는 일자가 달라서 그런가?
백우호는 내심 이강진과 같이 동원 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의 마음은 이강진도 충분히 이해한다.
동원 훈련은 2박 3일 동안 진행된다. 현역 시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지만, 막상 받아 보면 그 2박 3일조차 길게 느껴진다.
그나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은 낫다. 말상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서 훈련을 받으러 가면, 외로움까지 더해져서 더욱 고달파진다.
“문자 왔는지 확인해 볼게.”
통화를 마친 이강진은 혹시나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동원 훈련 문자가 와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왔었네.”
이강진이 바빠서 확인을 못 한 거였다.
우선 훈련 일자부터 확인했다.
백우호와 같을지.
아니면 다를지.
동원 훈련 안내 문자를 통해 이강진은 오늘의 운세를 점쳐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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