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48)화 (248/274)

유리벽 너머의 진실

공감을 요구하는 클리프의 물음에, 레이는 가만히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이에게 털어놓은 적 없던 이야기를 천천히 입에 담았다.

“이 세계에서 환생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문득 전생 마지막 날 보았던 집안 풍경이 생각나더군요. 퇴근하고 돌아와서 먹을 식사 준비를 해놓고 나왔었는데···.”

그 기억을 떠올렸을 당시, 레이는 당장이라도 택시를 타고 집 주소를 부르고 싶어졌었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닌, 슈네스펠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왕국. 자신이 알고 있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낀 감정을 과연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전생에 특별히 미련을 가질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러했다.

우연히 한 화가의 그림 속에서 서울의 길거리를 보았을 때는, 이곳에서 손에 넣은 것들을 모조리 잃어도 상관없으니 그저 그 익숙한 풍경 한가운데 서있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좋았던 일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고 해도, 전생에 대한 기억은 그리움이 되었고, 그 그리움은 곧 혼을 애는 아픔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이는 클리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도 가끔 전생의 꿈을 꿉니다. 평범하게 아침에 기상해서, 언제나처럼 출근하는 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꿈속에서 익숙한 길을 걷고 있노라면,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식구들이 그를 찾아와 깨워주었다.

덕분에 레이는 과거에 매몰되는 대신 현재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클리프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정녕 이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소중한 사람도 얻지 못한 것이냐고.

하지만 차마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기 전부터, 클리프가 이번 삶에서 단 하루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눈에 뻔히 보였기에.

때문에 레이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본인이 돌아갈 수 없으니, 언젠가 이쪽으로 넘어올지도 모를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하신 겁니까?”

“······.”

“당신이 알바트로스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도, 결국 가족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이런 불합리한 삶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나 하나라면, 그저 속죄하는 것이라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걸세. 하지만 내 가족들이 나와 같은 고난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나의 투쟁은 오로지 그것을 위한 것이었지.”

클리프의 동기 자체는 누구라도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그가 걸어온 길과 내린 선택들을 옹호할 수 없었다.

“그 과정이 너무 과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빠른 결과를 원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상적인 소리라면 그만 두게.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된다고 해도, 결국 모르는 사람 백 명보다는 내 가족 한 명이 소중하기 마련 아닌가?”

“······.”

레이가 침중한 눈빛으로 말을 아끼자, 클리프는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나도 아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그래, 사실 모든 건 다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

“후,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수 있으면 좋겠거늘.”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클리프는 다시 레이를 향해 입을 뗐다.

“나는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목표가 필요했어. 그리고 언제나 고된 노동으로 몸을 끊임없이 혹사시켜야 했지. 그래야 밤에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사실 클리프도 알고 있었다.

지하 도시의 주민들을 한낱 도구 취급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대의를 앞세워 소수를 멋대로 희생시키는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에게 도덕성 같은 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지옥을 두려워하기에는 그의 삶이 이미 지옥이었고, 그는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에.

“혹시나 가족들이 나처럼 넘어오기 전에, 나는 뭐라도 해야 했네. 어서 빨리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어.”

새롭게 얻은 인생의 의미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고 클리프는 주장했다. 이것이 그동안 그가 내세웠던 대의에 가려진 본심이었다.

그리고 레이는 거기에 대고 섣불리 말을 얹기가 조심스러웠다. 때문에 지금까지 중 가장 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면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이네. 알바트로스에 관한 정보도 자네가 이미 파악한 것 이상으로는 알려줄 것도 없고.”

레이는 며칠 전보다 기력이 많이 쇠한 듯한 클리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뜸을 들이다 말했다.

“클리프 씨. 나중에 형량을 다 살고 나오시면···.”

“그만. 그런 얘기는 그때 가서 하는 게 어떻겠나.”

“······.”

“아니면 다른 날 다시 찾아와주게.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미안하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하군.”

“···알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저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동참해 주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고요. 그러니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똑똑똑!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정말로 그만 가야 할 시간이었다.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삶의 매 순간이 고통이지 않아도 될 방법을, 함께 찾아볼 이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탁.

문이 닫히고 레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동안, 클리프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로써 그의 두 번째 면회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

클리프는 이후로도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계속 마음이 술렁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후유증인지, 아니면 앞으로 수 년 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까부터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렇군.”

마치 누군가 빼앗았던 기억을 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전생의 기억 중 유일하게 흐릿했던 마지막 순간이 선명히 떠올랐던 것.

“하.”

클리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움 뒤에 숨겨져 있던 죄책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두번째 삶에서도 속죄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 생의 결말도, 전과 똑같으리라.

그로부터 이틀 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는, 클리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 * *

프로비던스 소유의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

엘리엇 소르본은 갑작스러운 조부의 호출을 받고 막 도착한 참이었다. 사전에 잡혀 있던 약속들을 전부 줄줄이 취소해야 했으나,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프로비던스의 회장직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조부에게 잘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

엘리엇은 컨트리 클럽 입구에서 못 보던 조각상을 발견하고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새로운 조각상을 세우셨다더니··· 이건 뭐, 본사에 있는 것보다 더 큰 것 같군.’

엘리엇의 입가에 쓴웃음이 잠시 맴돌았다. 그의 조부는 여러모로 존경스러운 인사임이 분명했지만, 과시욕이 다소 과한 경향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본인의 소싯적 모습을 본 뜬 조각상을 만들어 전시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로 인해 엘리엇은 때때로 민망함을 느끼곤 했다.

얼핏 보기에는 엘리엇의 조각상이라고 착각할 만큼 두 사람의 외모가 상당히 닮았던 탓이다.

‘···나중에 전부 치워버려야겠어.’

머릿속으로 훗날 자신이 모든 실권을 이어받게 되면 해치워야 할 일들 목록에 한 가지를 추가하며, 엘리엇은 조부인 데미안 소르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할아버지.”

“그래, 왔느냐. 거기 앉거라.”

데미안은 소파를 향해 손짓한 뒤, 곧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엘리엇은 묻는 말에 대답하며 간단한 근황을 주고받으면서도, 줄곧 데미안의 분위기를 유심히 살폈다.

왜냐면 그는 오랜만에 손주의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시답지 않은 이유로 자신을 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데미안은 오래지 않아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주제는 엘리엇이 짐작하던 것과는 달랐다.

며칠 전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레누스 한복판에서 벌어진 테러.

물론 룩스 제국의 총리가 납치되었다가 무사히 구출된 사건이니 별것 아닌 일은 아니었으나, 자신을 이렇게 급하게 호출해서 할 만한 이야기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 심지어 데미안이 언급하고자 하는 건 총리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날 그 테러조직이 일으킨 일들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 넘은 자들의 솜씨였어. 그런데··· 보아하니 너는 아직 이에 대해 알아본 바가 없나 보구나. 한심한 것! 언제나 정보의 우위를 선점해야 한다고 내 누누이 일렀거늘!”

“···할아버지께서 그 일에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인 겁니까?”

“테러 자체야 단순한 일이었지. 정치적인 목적이 있고, 돈이 관련되었고···.”

뭐라 설명을 늘어놓으려던 데미안은 이내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테러의 목적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손주이자 후계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날 일어난 기묘한 현상들에 대한 것이다.”

“초능력자들의 개입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날에 대한 것이라면 엘리엇 역시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비서인 제나는 그날 초능력자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한껏 날뛴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다만, 엘리엇은 다른 초능력자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는 편이었다. 일반인보다 유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딱 그뿐이었으니까.

인재 발굴을 위해 세운 세이비어 재단을 통해 알아서 손에 굴러 떨어지면 몰라도, 일부러 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수색해 내야 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한 것.

그러나 이러한 엘리엇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확인한 데미안은 그에게 벌컥 화를 내었다.

“알면서도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는 말이냐?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더 발 벗고 움직여야지! 조그만 재단 하나 세웠다고 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늘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하길래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더니···.”

엘리엇은 느닷없이 떨어진 불호령에 당황했으나,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시장 선점이라면, 혹시 초능력자 관련 산업을 선점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이들은 모두 다 같은 생각일 게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니까.”

“······.”

“그리고 우리 프로비던스는 늘 그랬듯 그 선두에 서야 하거늘, 너는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실망을 드려 죄송합니다.”

데미안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엘리엇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러고는 곧 안 되겠다는 듯,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여든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정정하고 또 누구보다 당당한 경영자의 모습이었다.

“따라오너라. 내 오늘은 너에게 따로 보여줄 것이 있다.”

엘리엇은 조부를 따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통로를 지나 지하에 숨겨져 있던 시설에 다다랐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한 광경에, 엘리엇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먼저 하얀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연구원들의 숫자에 놀랐고, 그들의 관찰대상으로 보이는, 유리벽 너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이곳은 막대한 자본과 시간을 들여 설립한 비밀 연구소였다.

이 호화로운 컨트리 클럽의 여러 건물들은 사실 이곳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인가.

“······.”

많은 설명은 필요 없었다. 엘리엇은 머리가 좋은 남자였고, 프로비던스와 제 조부에 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부했다.

그래서 그는 데미안이 지은 이 ‘신들의 놀이터’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지어진 것인지, 이 순간 완벽히 이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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