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70)화 (270/274)

어른들의 사정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아침, 클레노디움 박물관.

로잘리테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른 시각에 연구실로 출근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연구 자료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금세 몰입한 탓에, 그녀는 한동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레이에게 정체를 들키고 나서도 여전히 로잘리테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로레인 위트록이 출근했다.

“···로잘리테 님.”

“······.”

“로잘리테 박사님!”

“응? 아아, 로레인, 왔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아무튼,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무슨 소리야?”

“무언가 허전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하던 로잘리테는 로레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약 3초 후.

“···맙소사!”

고대 유물이자 거대한 에너지석으로서 막대한 금전적, 역사적 가치를 지닌 시두스 엑시티움. 그 보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은 메모 한 장만이 놓여있었다.

[며칠 후에 반납하겠습니다. 신고하지 말아주세요.]

이중 삼중으로 경비가 삼엄한 박물관을 제 집 드나들듯 한 괴도가 남긴 메모였다.

* * *

화르르!

“힘의 출력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루고 싶으면, 처음에는 일정한 리듬과 속도에 맞춰 힘을 쓰는 것을 연습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제이슨은 자신의 숨소리에 맞춰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불덩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오오오!”

병아리떼 같은 학생들의 반응에, 제이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갔다.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조절되는 순간이 올 거다. 자, 시범은 충분히 보여줬으니 이제부터 직접 연습해 보도록.”

제이슨의 지시에, 넓은 수련장에 거리를 벌리고 늘어선 학생들이 각자의 초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학생들을 봐주던 제이슨은, 이 반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학생 앞에 멈춰 섰다.

“매튜.”

“예!”

그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19살 소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에게 필요한 조언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너는 능력을 사용할 때 너무 의식하는 게 보인다. 좀 더 어깨에 힘을 빼고,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불편한 마음은 육체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지.”

“예···?”

“마음 편히 살라고. 어린 것이 벌써부터 머리 복잡하게 살면, 나중에 내 나이쯤 되었을 때 아주 폭삭 늙어 있을 거야.”

“아··· 예!”

“예는 뭐가 예야.”

“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잖아, 너.”

“그게··· 앗 따가!”

제이슨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편입생의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날린 후, 계속 자리를 옮기며 개별 지도를 이어갔다.

그리고 찾아온 쉬는 시간.

매튜와 마찬가지로 편입생인 제시카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방금 그 선생, 너를 꽤나 열심히 가르쳐 주더라? 바보처럼.”

이 아카데미의 선생들은 당최 편입생들의 무엇을 믿고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쳐 주는 것인지.

여기서 배운 지식으로 세이비어 재단이나 아카데미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다.

“······.”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한 매튜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한편, 비아냥거리듯 말한 제시카 역시 그리 마음이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웬 신생 아카데미에 학생으로 잠입하라 그래서 긴장했는데, 그녀가 여기서 마주한 현실은 상상과 너무도 달랐다.

기존 아카데미 학생들은 바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박했고, 선생들은 차별 없이 모든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었다.

사실, 수년간 초능력을 연마한 사람들에게 지도 받을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경험이었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해도, 경험자의 조언은 다방면으로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니까.

이는 세드릭의 권유로 아카데미에 편입한 7명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설마 선생님들이 어느 날 현장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겠지?’

매튜는 만약 제이슨과 적대 관계로 마주치게 된다면, 도무지 그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희망 사항을 떠올리던 매튜는 이내 흠칫 놀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신 차려. 모든 건 그분을 위해서다.’

그분은 평생을 바쳐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고귀한 존재이셨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그분의 심복들은 현재 그분의 명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고.

최근에 하는 ‘과외 활동’은 비록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그분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분의 앞날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는 전부 치워버려야 해. 연구도 계속 진척되어야 하고.’

매튜가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사명을 되새기는데, 돌연 수련장 뒤편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엉!

“꺄악!”

“우와아!”

이제는 반의 모두가 익숙해져 버린, 사라가 수많은 꽃봉오리들을 한 번에 틔우는 소리였다.

“와,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아!”

“백 송이는 되겠는데?”

친구들의 호들갑에, 사라는 탐스럽게 핀 장미를 모두에게 나눠주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내가 좋아하는 분을 떠올리며 꽃을 피워냈더니 이제 이 정도는 일도 아니야. 이런 게 바로 학업과 덕질이 하나 되는 덕업일치가 아닐까 싶어.”

“어··· 그래.”

매튜는 어느새 코앞에 내밀어진 꽃을 받아 들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한편, 제시카는 금세 멀어지는 사라의 뒷모습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쟤는 진짜 바보가 맞는 것 같지 않니?”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제시카 역시, 품에는 사라가 준 꽃을 한 아름 안아든 채였다.

“···저런 애들은 있어봤자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쓸 만해 보이는 학생들이 있으면 스카우트해오라던 집사님의 말씀에 반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괜찮은 애들이 없는 것뿐이다. 제시카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변명했다.

“···제시카.”

“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그런 소리는 왜 하는 건데?”

“아니, 그냥. 요즘따라 우릴 방해하는 자들이 많잖아. 너무 열성적으로 우리를 막아 대는 걸 보니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자신들은 분명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고, 그걸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인 것일까.

언젠가부터, 세레누스의 모든 길목에 자신들을 감시하는 눈이 생긴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처럼, 매번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들키고 말았던 것.

“···그냥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일뿐이야. 원래 모든 위대한 일에는 장애물이 있는 법이잖아.”

제시카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는 매튜에게 하는 대답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설마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 것인가 하는,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불안을 내리누르기 위해.

“매튜, 마음을 다잡아야 해. 이제 곧 큰일을 할 때가 다가오고 있잖아.”

자잘한 시도가 계속 무산되는 마당이라, 그들은 아예 크게 한 건 터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사라의 말을 들은 매튜의 표정은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그 계획 말이야, 꼭 해야만 하는 걸까? 분명 많은 사람들이 다칠 텐데.”

“···집사님이 그래야 더 의미가 있는 거라고 하셨잖아. 큰일을 앞두고서 자꾸 이렇게 흔들려 할 거야?”

소녀는 동료를 향해 다그치듯이 물었다. 사실은 자신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더욱 날카롭게.

“우리는 특별한 힘이 있잖아. 그러니 집사님도 우리가 그분에게 더욱 큰 도움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신 거고. 그리고 그분이 잘 되셔야 우리도···.”

끝없이 이어지는 제시카의 설교에, 매튜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큰 힘에 그만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특별활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초능력 수업에 임하는 다른 학생들이 너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드르륵.

쉬는 시간이 거의 다 끝났을 무렵, 수련장의 문이 열렸다.

당연히 다음 수업의 선생님이 들어올 줄 알았던 매튜는 예상 밖의 인물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레이 루체스 백작.’

그와 이 아카데미는 자신들이 이번 일을 시작하게 된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집사가 시킨 임무에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 자신이 이렇게 고민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그러나 일단 그의 앞에서는 좋은 학생인 척해야 했기에, 매튜는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린 것뿐이니, 다들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루체스 백작의 가벼운 인사가 끝나고, 그와 함께 온 선생이 그에게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발전도를 설명해 주었다.

백작은 진지한 얼굴로 관심 있게 들으며, 학생들에게 간단한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매튜의 차례. 그는 반듯한 자세로 꾸벅 인사하며 힘 있게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힘을 갈고닦아 쓸모 있는 인재로 거듭나겠습니다!”

“······.”

백작은 잠시 말없이 매튜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은회색 눈동자에 매튜가 점점 부담감을 느낄 때쯤,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쓸 필요는 없습니다.”

“···예?”

“무엇보다, 쓸모 있는 인재라는 말이 걸리는군요.”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초능력의 유무, 또는 그 능력의 고하가 아닙니다.”

“······.”

집사에게 매일같이 들었던 말들과 정반대되는 내용에, 매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를 본 백작은 그제야 온화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튜 군은 아직 어립니다.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주어진 능력을 갈고닦되,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군요.”

* * *

다음날 오후.

[사장님 말이에요, 아이들에게는 사려 깊고 멋있는 어른인 척하더니! 학생들은 사장님이 사실은 괴도에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까요?]

“후후, 원래 어른들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죠.”

서혜리와 수다를 떨며 도시공원에 들어선 페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벤치에 앉았다.

쿠르르릉···.

“어, 비가 오려나?”

“와, 구름 몰려오는 것 좀 봐라. 야, 얼른 가자!”

회색의 파도처럼 빠르게 밀려오는 구름떼를 보며,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피난처를 향해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러나 페니는 벤치에 앉은 그대로 여유롭게 우산을 폈다.

솨아아아!

순식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과 탄식 소리가 들렸다.

모두 자신의 머리를 가리며 실내로 대피하기 바빴던 것.

덕분에, 허공에 검은 별 하나가 떠오르는 장면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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