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
쿠르르릉···.
잠깐의 소나기가 지나간 후.
찰칵, 찰칵!
“어때,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냐?”
“예. 그런데 정말, 영화에서나 보던 세계 종말이 생각나는 색감이지 않습니까? 그나마 비라도 그쳐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초능력자인권부 소속의 두 남자는 회색의 구름바다가 노랗게 물드는 광경을 눈에 담으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게 저희가 기다리던 ‘신호’입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장관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두 사람은 아까부터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오스틴을 힐끗 보며 조용히 속닥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오스틴 또한 레이가 말한 ‘신호’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놓칠 수 없는 신호라고 했을 땐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저것인가 보군. 정말이지··· 음?’
오스틴이 마른침을 삼키며 부하들에게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들이 점점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어? 아니, 카메라 세팅 다 맞춰놨는···!”
기록용 촬영을 담당하고 있던 공무원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
온 하늘을 뒤덮은 수백 갈래의 번개가 세레누스 전역에 퍼져 있는 마천루 위로 내리꽂혔다.
그와 함께 천지가 개벽할 듯한 굉음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콰콰쾅!
콰콰콰콰쾅!
한 번. 두 번. 세 번.
콰콰콰콰쾅!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번개들은 제국의 수도를 대낮보다도 훤히 밝히며 수백 개의 피뢰침들을 연신 강타했다.
그 압도적인 광경 한복판에 갇힌 사람들은 잠시 하던 일을 전부 멈출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비교적 안전한 자동차 안이나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러했는데, 옥상정원 등의 높은 곳에 있던 이들이 받은 충격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털썩.
특히나 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이해한 전기 초능력자들은 다리의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제, 제시카, 괜찮아?”
옆에서 매튜가 걱정스레 물어왔지만, 제시카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크게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니, 혼란스러움을 넘은 공포가 온몸을 덮치는 바람에 사지에 힘이 풀리고, 살짝 벌어진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드릭이 기대했던 ‘마지막 발악’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연히 주저앉아 있는 상태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얘들아.”
다정하지만 단단한 손이 어린 초능력자들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선, 선생님···.”
제이슨을 비롯한 아카데미 교사진은 짧은 시간이나마 직접 가르쳤던 학생들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오스틴이 이끄는 초능력자인권부 소속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같은 시각, 레이와 식사 중이던 세드릭 알무스의 뒤에도 오스틴과 그의 사람들이 자리했다.
* * *
솨아아아···.
하늘을 찢어버릴 듯했던 번개의 폭풍이 지나가고, 세레누스에는 다시 굵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
“······.”
사전에 전달받은 장소로 출동한 오스틴은 기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테이블을 조용히 주시했다.
그곳에는 두 젊은 귀족이 감정이 사라진 듯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드릭이었다.
“···이거,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 않았나 싶군요.”
그의 목소리는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레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세드릭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저는 아마도 그리 오래 자리를 비우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이대로 체포되어 수감된다 해도, 오래지 않아 다시 나올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는 사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가 예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드릭 알무스에게는, 룩스 제국에서 대적할 곳이 몇 없는 가문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세드릭이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다른 이들과 다소 달랐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희는 아직 제대로 자웅을 겨뤄보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백작님을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꼭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역이 내뱉을 법한 대사라고 생각하며, 레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니라 본인의 가족들을 빨리 만나러 나와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가족이요?”
세드릭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에 레이는 한숨을 삼키며 조금 더 자세히 짚어주었다.
“저번에 보니, 형님께서 아우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요. 과년한 동생의 친우 관계를 친히 부탁하실 만큼.”
“아아, 에드윈 형님 말씀이시군요.”
친형이 자신을 염려했다는 말에도, 세드릭은 그저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신을 향한 가족의 걱정과 애정을 당연시하며,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 훤히 보이는 태도.
이를 본 레이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날렸다.
“세드릭 씨는 삶이 지루한 것이 아니라, 그저 철이 덜 든 것이 아닐까 싶군요.”
“제가 말인가요?”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에는 감사할 줄 모르고, 공연히 먼 곳에 시선을 두니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흠, 글쎄요. 저는 저와 지나치게 다른 사람에게는 금방 관심이 떨어져서 말입니다. 마음이 가지 않는 상대를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선순위에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서로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죠.”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대답하는 세드릭을 보며, 레이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딱 한 대만 때릴까?’
하지만 너무 약한 나머지 그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렇듯 레이가 속으로 참을 인자를 열심히 새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세드릭은 더더욱 속 터지는 소리를 늘어놨다.
“흔히 하는 얘기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도 짧은 우리네 인생이지 않습니까. 특히나 저 같은 경우엔, 제가 관심 가는 사람들에게만 신경을 쏟기에도 더더욱 부족한 시간이고요.”
세드릭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가 이어서 내뱉은 말에, 레이는 표정을 와락 구기며 손에 든 포크를 상대방에게 날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는 처음부터 백작님께서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황당하다 못해 모욕적인 발언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런, 너무 그렇게 정색하실 것 없습니다. 추후 저와 함께 많은 것을···.”
“아니요, 세드릭 씨와 무언가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호하게 세드릭의 말을 끊어낸 레이는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뒤에 계신 분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군요. 무의미한 대화는 여기까지 하시죠.”
* * *
그로부터 며칠 후.
“사장님, 알무스 공작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세드릭을 가문에서 제명한다고요.”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레이는 쌤통이라며 속 시원해하는 서혜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무스 공작가의 차남이 초능력자들의 인신매매 및 인체실험에 연루되었다는 소식은 세간에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다.
비록 서류상 그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렸다는 정황은 없었으나, 그에게는 방조죄가 적용되었다.
한편, 알무스 공작가에서는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일찍이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이번 일의 여파는 지난번 카엘레스티아 비밀 기지 발각 사건 때보다 오히려 컸다.
어디까지나 기업인 프로비던스 및 엘릭서와는 달리, 알무스 공작가는 대대로 제국민의 사랑과 지지를 받아온 가문. 그러니 대중이 느끼는 배신감도 훨씬 클 수밖에 없었던 것.
더불어 가장 강대국인 룩스 제국의 대귀족이 그런 일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국제사회에서 룩스 제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대중의 매서운 비난과 황실의 질책이 이어지자, 알무스 공작가는 세드릭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가문에서까지 버림받았으니, 사람들은 그 자식이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겠죠?”
“아마도요.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는 감옥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겁니다.”
“왜요?”
“대외적으로야 연을 끊은 것처럼 보여도, 그의 형만큼이나 아버지 역시 둘째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 같거든요.”
“참, 악인인 걸 뻔히 아는데도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니!”
서혜리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자, 애런이 차 한 잔을 건네며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세상에 그런 작자들이 그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감시하기 용이한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지요.”
“그것도 그렇지만요.”
레이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그 언젠가 헤이든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레이는 슈네스펠트의 지도층은 어째서 음지에서 활동하는 ‘악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뿌리 뽑지 않는 것이냐고 물었었다.
이에 헤이든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 대답했다. 기생충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정치인의 첫 번째 덕목이라고.
‘정치에 한해서는 빈센트보다 한 수 위인 사람이라고 했으니··· 아마 그의 형인 발렌시아 공작이 한 말이겠지.’
결국, 악인을 뿌리 뽑지 못하는 것은 슈네스펠트 왕국보다 훨씬 발달한 룩스 제국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세상은 권선징악의 논리만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많은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절대 악처럼 보이는 세드릭조차도 그를 순수한 마음으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선인과 악인, 사회에 이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칼로 자르듯 냉정하게 끊어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더욱 커다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 노릇.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자신을 돌아본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천천히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거겠죠.”
그런데 레이의 말을 들은 서혜리와 애런의 표정이 묘해졌다.
“음, 저기 사장님. 제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내긴 했지만요··· 사장님이 모든 걸 해결할 필요는 없잖아요?”
“···네?”
“아니, 물론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는 게 도리인 건 맞지만! 그 뭐냐, 지금 사장님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고 해야 하나?”
“백작님께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실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
레이는 그제야 두 사람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세상을 구해야 하는 영웅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를 바로잡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백작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맞아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적당히 이득도 보시면서 말입니다.”
두 사람은 마치 미리 말을 맞춘 것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분명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임에도, 레이는 묘하게 부부사기단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은 누구처럼 욕심 때문에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사고를 안 치시는 것은 아닙니다만···.”
“에이, 그래도 우리 사장님 정도면 애교죠. 끽해야 건물이나 인프라 몇 개 날려 먹은 게 전부잖아요?”
“산도 있습니다만.”
“아, 맞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