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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화 (6/131)

6화

‘금전적으로 손실이 있을 뿐, 역으로 재단사가 동정을 살 수 있지.’

게다가 벤자민에게 무언가 기대를 할 수도 없었다. 행동을 취할 만한 사람은 그레이스, 자기 자신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래의 그레이스와 비교하자면 지금의 그레이스는 성격이 썩 좋지 않았다.

받은 건 갚아 줘야 성미가 풀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레이스는 선한 낯으로 앞에 있는 재단사의 밥줄을 합법적으로 끊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그를 재단사가 불렀다.

“부인?”

“아, 계속 말하게.”

물론 그레이스는 앞에 있는 재단사의 헛소리를 듣지 않았다.

더 들어 봤자 가뜩이나 좋지 않은 기분이 더 좋지 않아질 테니, 그냥 소음으로 처리하며 머릿속으로 바삐 굴렸다.

‘좋아…….’

이제부터 그레이스는 재단사가 무슨 말을 하든 트집을 잡을 것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고 자시고, 해야 한다. 누군가가 ‘너’는 할 수 없다고 속삭였지만 그레이스는 그 소리를 싹 무시했다.

그녀는 재단사가 자신에게 말을 걸길 기다리며, 카탈로그를 양손에 꼭 쥐었다.

“그래서, 이 디자인의 경우…….”

“촌스럽군.”

“네?”

그레이스는 카탈로그를 탁 덮으며 재단사 쪽으로 던졌다.

“촌스럽다고 했네만.”

“……아, 하하. 부인께서 잘 모르셔서 그럽니다.”

“내가 뭘 모르는데?”

“네?”

“내가 뭘 모르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겠나?”

그레이스는 심드렁한 낯으로 앞에 있는 재단사를 바라보았다.

재단사는 수많은 귀부인을 상대한 경력 덕에 낯 하나 바뀌지 않고 번드르르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별관에만 계셔서 잘 모르시는 겁니다. 물론 부인의 체형과 이번에 유행하고 있는 디자인, 컬러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제가 이번에 고안한…….”

그레이스는 재단사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는 말을 가만 듣다가 옆에 있는 종을 울렸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한 명 들어왔다.

“샐리, 너는 종종 시내로 나가지?”

“네, 마님.”

“그러면 너도 옆에서 나 좀 도와주겠니?”

샐리는 의아한 낯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지. 내가 별관에만 있다 보니 최근 유행을 잘 모른다지 뭐니. 아무래도 내가 감각이 없기는 하나 봐. 너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그레이스는 우울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별관에 콕 박혀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별관 내에 있는 사용인은 전부 그레이스에게 우호적이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실수해도 크게 책잡지 않아서 그런가?’

벤자민과 그레이스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레이스는 공작 부인이었고, 다른 귀족 가문에 비해 봉급도 많이 준다.

뒷방 공작 부인이라 해도 고용인 입장에서는 돈을 잘 주는 사람이 최고였다.

그레이스는 적어도 그런 이유로라도 고용인들이 제 편이라 생각하며, 샐리의 앞에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샐리가 눈을 크게 뜨며 재단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이야, 그냥 이번에 움직이기 편한 옷을 주문할까 했을 뿐인데…… 재단사가 자꾸 고가의 드레스를 권하지 뭐니. 역시 내가 말할 때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부, 부인.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래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게 있었는데 내 몸에는 그게 안 어울린다지 뭐야. 물론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샐리는 재단사를 보며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스는 부러 눈을 깔고 슬픈 낯으로 말하느라 샐리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하긴 각하께서 추천해 준 재단사니, 황실의 드레스도 만들 텐데 나 같은 건…….”

“부인! 아닙니다! 제가 언제 부인께 그런……!!”

재단사가 당황하며 그레이스의 말을 끊었다. 샐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단사에게 말했다.

“마님께서 말씀 중이십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끊습니까?”

“…….”

“아니야, 괜찮아…… 화내지 말렴, 내가 편해서 그러는 것일 테니까.”

그레이스가 힘없는 어투로 말을 흘리자 샐리의 주변 공기가 흉흉해졌다. 그레이스의 행동에서 재단사의 저런 행동이 하루 이틀이 아니란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아래로 내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역시 나는 이런 위치에 안 어울리겠지?”

그레이스의 말에 샐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재단사를 쏘아보았다.

그레이스는 그 둘 사이에서 태평히 생각했다.

‘샐리는 하녀니까 평민일 텐데 괜히 난처해지려나.’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

이 별관의 고용인들은 전부 사이가 좋았다. 맨날 다 같이 모여 숙덕숙덕했고 그레이스가 그걸 보기만 해도 후다닥 도망쳤다.

‘내가 논다고 혼낼까 봐 그런 건가?’

오늘 그레이스가 재단사와 있는 응접실에 샐리가 불려 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날 테고 모두 샐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게 뻔했다.

그레이스는 제 드레스의 사이즈를 적나라하게 보이기 싫었기에 그간 재단사를 만날 때는 모든 이를 물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질문을 받다 보면 샐리도 결국 재단사가 얼마나 못되어 처먹었는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지. 대충, 재단사가 나에게 무례했다는 정도?’

그다음, 별관의 사용인 중 몇몇이 시내에서 조금만 이야기를 흘리게 되면 끝이었다.

‘누가 큰돈을 써 가며 무례한 사람을 쓰고 싶어 하겠어. 귀족들은 자부심이 높으니까 아무리 싫은 귀족이라도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무시당한다면 같이 화를 내는 족속이니까.’

그레이스가 쓴 이 방법은 원작의 아리아가 썼던 것이다.

‘원작의 아리아는 나처럼 외관으로 무시당하지는 않았지만, 출신이 문제였지. 고향을 무시당한 것 때문에 움직였던가?’

이게 정말 제대로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레이스로서는 최선이었다. 물론 그레이스의 마음 같아서는 카탈로그의 책자를 전부 죽죽 찢어발겨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재단사를 바라보며 샐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재단사를 부르는 게 낫겠구나. 나는 지금 다른 옷이 필요한 거니.”

그레이스가 방긋 웃으며 샐리에게 마차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샐리는 꾸벅 인사하며 밖으로 나섰다.

“부인, 저에게 이럴 순 없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부인의 체형에 맞추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십니까?”

그레이스는 재단사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카탈로그를 발로 툭툭 찼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예?”

“유행하는 디자인이 내 체형과 어울리고 말고를…….”

그레이스가 픽 웃었다.

“그걸 내가 왜 고려해야 하지? 각하께서 너에게 주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닐 텐데, 받은 돈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재단사는 이제까지 알고 있던 그레이스와는 전혀 다른 행동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왜 자네가 받는 돈에 비해 능력이 없는 걸 이해해 줘야 하는지 설명해 보게.”

“…….”

“옷을 못 만들면 입이라도 잘 놀려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하나 보군. 그럼 잘 돌아가고.”

그레이스는 재단사에게 그리 말하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이, 이래도 되나?’

그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온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배가 고파서 다소 날카로웠던 거 같기도 하다.

“아냐, 나는 잘한 거야.”

내가 더 힘이 있었다면 밥줄을 끊는 것 이상으로 가게 자체를 문 닫고 빚더미에 앉게 해 줬을 텐데.

그레이스는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가 아차, 하며 정신 차렸다.

‘아냐.’

그건 진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일을 하고 그녀가 마음 편히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딱 자신을 괴롭힌 정도까지만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그게 맞지 않나.

그녀는 생각을 다잡았다.

그레이스는 양손으로 제 뺨을 챱챱 때렸다. 너무 세게 때려서 눈물이 핑글 돌았다.

“……정신 차리자.”

얼른 독한 마음 먹고 살도 빼고 이혼도 하고 이 집을 나가서 오래오래 사는 거야.

그레이스의 다짐은 소박했다.

지방 영지의 건물 하나를 사서 소박하게 월세 받아먹으며 사는 것.

그것이 그레이스의 작은 꿈이었다.

‘아니, 좀 큰 거 같아.’

따지고 보면 건물주였으니까.

⋆★⋆

그로부터 며칠 뒤,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티타임을 갖자며 제안했다.

‘싫은데…….’

그레이스는 영 껄끄러웠지만 벤자민의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의 심기가 언제 어그러질까 신경 쓰였다.

치장하자는 고용인을 전부 무르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정도의 복장만 갖췄다.

“부인, 오셨습니까?”

먼저 와 자리에 앉아 있던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나타나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스는 주인을 만난 멍멍이 같은 표정을 짓는 벤자민을 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부인, 제가 이번에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 왔습니다. 아, 그리고 최근 커피가 유행이라 커피를 내왔는데 괜찮을까요?”

“커피요?”

그레이스는 커피라는 말에 안색이 환해졌다.

‘커피라니!’

빙의하기 전에는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 오랜 시간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빙의 후에도 이 세계는 홍차가 주류인지 커피 원두 한 톨도 본 적 없었다.

“부인?”

화색이 돌던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부르자 퍼뜩 정신이 들며 목을 가다듬었다.

“괜,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하던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화답에 해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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