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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1)화 (11/131)

11화

귀족으로서의 역사는 깊지만, 장점이라고는 이상한 전설이 붙어 있는 호수뿐인 영지를 소유한 가난한 자작가의 영애였던 그레이스.

그레이스가 여기까지 생각한 이유는, 펠튼 공작의 힘을 생각하면 황제의 제안 아닌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나긴 역사 동안 북쪽의 마수와 가장 효율적으로 대립할 수 있는 존재도 펠튼 공작가의 사람이 유일했고, 최상급 마석을 공급할 수 있는 자도 펠튼 공작가가 유일했다.

장기적으로 아쉬운 건 제국 쪽이지 벤자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펠튼 공작이 군사를 물리면 마수들이 ‘크아아앙’ 하면서 수도로 내려올 게 뻔했다.

하지만 펠튼 공작은 제국을 향한 충성과 죄 없는 제국민을 지키기 위해 결혼했다.

그레이스는 아마 벤자민의 충성심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중에서 벤자민은 황태자가 뭘 제안하면 거의 다 응했기 때문이다.

‘이번 가면 축제도 황태자가 주최하는 뭐가 있었지.’

그리고 거기에 벤자민을 초대했었다.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때문이구나.’

황실에다가 당신들이 주선한 결혼생활을 잘 이어 가고 있다고 어필하기 위해서 제안한 거구나.

그레이스는 이 모든 기나긴 생각을 마치며 후련해졌다.

“큰일 날 뻔했네. 또 벤자민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뻔했어.”

좋아할 리가 없지.

하마터면 나중에 이혼하자고 말하면서 내가 내 말에 상처 입을 뻔했잖아.

그레이스는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생각도 정리되었으니까, 잠이나 자자.”

한층 후련해진 그레이스는 일기장을 침대 옆 탁자 서랍에 넣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슬슬 분리가 되어 편한 것 같았다.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다정한 이유는 황실에 자신의 충성을 보여, 반란 의사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는데, 생각이 정리되니 편안했다.

‘근데 이러다가 아리아 때문에 미쳐 가지고 납치하려고 하는 거야?’

제국의 충신이 성녀를 납치하려고 제국뿐 아니라 세계의 적이 된다고?

그레이스는 이불을 꼭 덮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내 남편이지만 정말 미친놈이네.’

그래, 로판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캐릭터치고 미치지 않은 인물이 어디 있겠어.

원래 사랑이라는 게 좀 미친 짓이지, 그레이스는 중얼거렸다.

‘곧 전남편이 되겠지만.’

⋆★⋆

생각을 정리한 그레이스는 성격이 조금 밝아지고 말투도 깔끔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빙의 전 그레이스와 자신의 감정을 잘 분리하게 된 것뿐이었지만, 다들 그녀가 가면 축제 때문에 들떴다고 생각했다.

‘음, 몸이 가볍다.’

가면 축제 전까지 그레이스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날짜도 별관의 사용인들이 매일매일 카운트다운하고 있었고, 그날 걸칠 망토와 가면도 뭐가 좋을지 사용인들이 매일 고민했다.

그레이스는 다시 식이 조절이나 하며 한결 가벼워진 몸을 쭉 기지개했다. 이제 가벼운 운동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긍정적인 생각도 들 정도였다.

‘확실히 다이어트는 초반이 가장 잘 빠지니까.’

그레이스가 샐리를 떠보니, 원래의 그레이스 자체도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듯했다.

애초부터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다 보니, 감정 위주의 일만 떠오르고…….

짝사랑하는 사람의 감정만 자꾸 되새김질하니 우울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냥 짝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혐오를 가지고 있는 이의 짝사랑이라니.

자기감정이 아니라고 몇 번을 되새겨도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정은 전염성이잖아.’

“마님~ 이 색은 어떤가요?”

그레이스가 스트레칭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샐리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응?”

샐리의 손에는 군청색의 두꺼운 망토가 들려 있었다.

“덥지 않을까?”

“괜찮아요. 이게 마수의 털로 만든 거거든요. 레흐턴이라는 마수인데, 열을 흡수해 낮에는 덥지 않고 밤에는 쌀쌀한 공기를 차단해요.”

그거 정말 편리한 효능이다. 샐리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레이스는 한 단어에 반응했다.

“마수?”

그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샐리를 바라보았다.

“마수의 털이 왜 여기 있어?”

마수의 털은 최하급이 아닌 이상 우선 경매장으로 가, 마탑과 마도구 연합 그리고 드레스 숍에 나뉘어 팔렸다.

‘내가 보기에 저건 최하급이 아닌데.’

털의 손상이 전혀 없고 윤기가 반지르르했다. 그리고 저런 건 고작 마을 축제에서 쓰기 위한 망토로 적합하지 않았다.

“우연히 구했어요!”

“우연히?”

“네!”

그레이스는 샐리의 뒤쪽 창밖으로 보이는, 미묘하게 너덜거리는 모습의 펠튼 공작가 기사단을 눈에 담았다.

“……우연히?”

그레이스가 다시 물었다.

샐리가 자연스럽게 그레이스의 시야를 가렸다.

“네, 우연히요!”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어쩐지 부담스러운데.’

여기서 군청색은 취향이 아니야,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레이스는 레흐턴인지 뭔지가 어떻게 생긴 마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수는 본디 해치우기 성가신 생명체라는 걸 알았다.

‘물론 나를 위해 방금 막 레흐턴을 잡아다 망토를 만들어 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지금 바로 망토를 공수해 온 건 맞는 거 같다.

그레이스는 적어도 이런 눈치는 있었다.

최하급이 아닌 마수의 가죽으로 망토를 만들어 왔는데, 이걸로 색상 투정이나 부리는 염치없는 안주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샐리, 잠깐 비켜 줘.”

그레이스는 샐리를 옆으로 비키게 하고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

기사단 중 몇이 무척 지친 기색으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샐리, 정말 우연히 구한 게 맞아?”

“그, 그게.”

샐리는 망토를 꼭 끌어안고 그레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각하께서 우연히 구했다고 말하라 했니?”

“…….”

침묵이었다. 그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 마님은 연약하시니까요. 축제는 길고, 사람도 많으니…….”

‘연약?’

그레이스는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연약과는 거리가 먼 두꺼운 몸체였다.

“그래도 지금 당장 잡아서 만든 건 아니에요!”

“그래.”

“몇 달 전부터 잠복해서 잡은 거예요.”

“……?”

그레이스는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며 샐리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의 동그란 눈에 샐리는 죄를 고하듯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레흐턴은 지금 활동기가 아니라서 찾기 위해서 특별히 인원을 선출했어요. 그, 그리고 또…….”

“아냐, 됐어. 그만 말해.”

그레이스는 손을 들어 샐리의 말을 저지했다.

“……음.”

그레이스는 미간을 꾹 누르며 생각에 빠졌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벤자민이 자신에게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선물해 준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저 기사들에게 무언가 보상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벤자민이 따로 그들에게 노동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주겠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사단의 일이 안주인의 망토를 만들기 위해 잡기도 힘든 마수를 잠복까지 해 가며 잡는 건 아니었다.

‘응?’

그레이스는 샐리가 들고 있는 군청색의 망토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군청색의 망토에 달린 황금색 끈, 그 끈의 가장자리에는 연녹색의 보석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이거.”

“취향이 아니신가요?”

“아냐.”

그레이스는 이 망토를 알고 있었다.

‘이거, 나중에 벤자민이 아리아를 납치하고 가장 먼저 주는 선물인 거 같은데.’

공작 부인이 죽고 더 이상 유부남이 아니게 된 벤자민이 아리아를 납치한 뒤, 뭔 망토 하나를 덮어 준다.

그다음에 당신과 참 잘 어울린다며 웃는 장면이 있었다.

‘그 미소가 다정한데 아리아는 두려웠다고 했지.’

두렵겠지. 다정하게 미친놈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또 미묘해지려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다정했던 이유는 전부 황실에 충성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진심은 전부 아리아를 향했고 어쩌구 저쩌고. 속으로 세 번 복창한 그레이스는 또 튀어나오려는 기대감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냥 입을게. 괜찮은 거 같아.”

그레이스의 긍정에 샐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이 망토를 공수하러 다녀온 기사들에게 선물을 줘야겠어.”

“선물이요?”

“돈만 주는 건 성의 없나?”

역시 돈이 좋기는 한데. 돈만 주는 건 성의가 없어 보이나. 그레이스는 고민했다.

하지만 돈이 좋기는 하잖아.

그레이스는 전생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만연했던 황금 만능주의를 떠올리는 한편, 자신의 집이 부유했음에도 괴로웠던 나날을 떠올렸다.

“돈이랑 음……, 줄 만한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먹을거리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최근 그레이스는 극단적인 식이 조절 중이었기에 달콤한 음식이 별관에는 하나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다가 좋은 게 떠올랐다.

“일단 인원수에 맞게 밖에서 쿠키 세트라도 사 올 수 있을까?”

“네!”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은 벤자민이 줄 테니 그레이스가 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돈으로 환산이 되면, 누군가는 만족할 수 없는 금액이라 감정이 상할 수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기사의 명예니 뭐니 하며 기분 나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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