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레이스의 뒤에서 여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최근에는 펠튼 공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없네.”
“그러게 말이에요. 저번 일이 부끄러워서 그런 걸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뒤이어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 몇 가지가 들려왔다. 한동안 실리지 않았다고 해도, 상당히 자주 거론되었는지 많은 관심을 받았다.
비록 그 관심이 좋지 않은 방향이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진짜더라도 내가 저지른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거짓이 대다수이니 자신이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리 되뇌며 한 사람을 골라 밖으로 나섰다.
⋆★⋆
그레이스와 동행하기로 한 사람은 릴리라는 사람이었다. 수 계산을 잘하고 지는 걸 싫어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돈 아래에 두지 않는 걸 보니, 공방에 데려가 면식을 쌓기 좋을 듯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였으니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었지만, 지금껏 봐 온 릴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원래 추천받은 이는 마리안이었으나, 채터스 잡지 애독자인 그녀와는 대화하기가 껄끄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또 다른 이가 추천해 준 릴리를 고른 것이다.
‘머리가 맑다.’
그레이스는 문득, 오늘따라 말이 잘 나오고 머릿속이 청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저택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여기만 오면 머릿속이 맑아졌다.
사고가 똑바로 돌아가며, 말이 똑바로 나왔다. 그렇다고 이전의 그레이스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이전의 그레이스의 기억도 분명 남아 있었다.
약간의 우울감이 남았지만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사람과 마주할 수 있었다.
⋆★⋆
둘은 작은 공방 세 군데를 거쳐,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꽤 작고 허름한 직물 공방과 거래를 하기로 했다. 릴리는 ‘여기 정말 괜찮을까요?!’ 싶은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내부의 상태를 둘러보고, 샘플로 보여 준 모슬린을 보며,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검토한 뒤, 계약서를 가져가서 동료들과 다시 검토하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빠르고 허무하네요.”
가게를 나서며 모슬린 한 필을 품에 안은 릴리가 말했다.
“그래요?!”
“네, 저는 뭔가 더 있을 줄 알았거든요. 이런 작은 가게도 자기들만의 체면이나 명예 같은 게 있으니까요. 여자들끼리 무슨 거래야! 라거나 그런 거요.”
그레이스는 그녀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큰 규모의 가게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고아원 엄마들의 대화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그레이스를 보던 릴리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런데 린덴 씨, 왜 하필 저 공방과 거래하기로 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게…… 솔직히, 겉보기로는 두 번째 공방이 저희가 들렀던 곳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좋아 보였잖아요.”
“그건, 그랬죠.”
그레이스는 공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공방을 둘러볼 때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내부를 둘러보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주변을 관찰하고 그들이 만들고 수입한 직물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레이스의 안목은 이래 보여도 높은 편이니까.’
정확히 어떻게 좋은 건지는 몰라도, 평소에 보던 것과 비교를 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른 공방의 직물 상태는 외부에서 수입해 온 것들은 상당히 평범한 축이었지만, 직접 만든 것들은 세밀했다.
작은 규모의 가게에서 나온 솜씨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두 번째로, 그녀는 외출할 때마다 레흐턴의 가죽으로 만든 클로크, 망토를 걸치고 다녔다.
물론 평범한 사람은 이게 마수의 가죽인지 뭔지 모르지만 최고급 드레스 숍에서도 없어서 못 사는 옷감이니, 직물을 만드는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앞선 공방 세 군데는 알아보지 못했지.’
계약하기로 한 곳만 알아보았다. 그곳이 진짜 실력이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릴리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던 그레이스는 그녀가 들고 있는 모슬린 한 필을 톡톡 건드렸다.
“모슬린을 얇게 잘 만들더라고요. 저희가 필요한 건 모슬린이니까요.”
“아, 그랬군요.”
릴리는 납득하면서도 살짝 미심쩍은 시선을 그레이스에게 보냈다.
‘어쩔 수 없지.’
그레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은 작은 공방과 거래를 트고 신뢰를 쌓는 게 유리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공방의 규모를 키워 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레이스의 기억이 맞는다면, 직물 공방은 도제 체제가 아주 잘되어 있다.
그리고 이게 너무 잘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고인물…… 이라는 거지.’
대략 두 군데의 아주 거대한 규모의 직물 공방이 다 해 먹고 있는 체제였고, 나머지 공방은 작았다. 실력이 좋아도 인맥을 키우기 힘들었다. 제자가 공방을 나가서 새로이 공방을 차리면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고 망하게 만드는 그런 끔찍한 체제였다.
그리고 원작에서 이 사실이 어쩌다가 밝혀지고, 이 때문에 큰 두 직물 공방의 작업이 완전히 중단된다. 그러자 다른 작은 공방 쪽에 일감이 와르르 들어오지만 갑자기 넘치는 주문에 제대로 옷감을 만들 수 있을 리가. 결국 외국에서 옷감을 수입하기까지 잠시 동안 옷감의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른다. 그리고 딱 그 시기에 맞물려 아리아가 무슨 파티에 나가야 했는데…… 이건 그레이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옷감도 사 두긴 하는 게 좋겠지만, 공방 하나를 키워 두는 것도 좋긴 하겠다.’
이러면 나중에 고아원 쪽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겠지. 일감이 넘쳐도 예전에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을 무시하진 않을 테니까. 그레이스는 나름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 같자 뿌듯해졌다.
감당하기 어려운 우울감에서 벗어나는 건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일하니까 즐거웠다. 가치를 찾은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기뻤다.
“……?”
눈앞의 남녀 한 쌍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각하?”
뒤에 릴리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호칭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벤자민은 제 옆에 서 있는 아리따운 여성에게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원래 다정한 성정이니 그럴 수 있기는 했다. 그가 아리아에게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건넸다. 그것도 그럴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벤자민 펠튼은 아리아를 짝사랑하니까.’
그레이스의 짙은 청록색 눈에 아리아가 담겼다.
아리아 밀러.
‘성녀의 소원’의 주인공이자 이 세상의 사랑을 받는 존재.
과연 사랑을 받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을 만큼 아름다웠다.
‘소설에 있던 모든 외모 관련 지문이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거짓말은커녕 아리아를 제대로 담지도 못했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여신을 마주하면 저런 외관을 가지고 있을 거라며, 여신을 본 적도 없는 그레이스도 바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하늘에서 내리는 첫눈도 아리아의 머리카락만큼 하얗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칼 또한 굽이쳤는데, 억센 그레이스의 머리칼과 달리 아름다운 물결 같았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금빛의 눈이 있었는데, 황금보다도 빛났고 어떤 보석도 아리아의 눈을 표현할 수 없었다. 어떤 별도 아리아의 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일 수 없었다.
‘저래서 여주인공인가 봐.’
새하얀 머리칼을 가졌지만, 살결이 하나도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뺨은 너무 당연하게도 사랑스러운 분홍빛이었다.
억울하게도 벤자민과 잘 어울렸다. 그는 이 소설 속의 서브 남주였다.
‘저러니까 당연히 아리아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
그레이스는 납득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해. 저렇게, 완벽하게…….
‘예쁘잖아.’
귀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 너랑은 다르게.>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다정한 말을 해 줄 때마다 내심 설렜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 순간, 그레이스를 발견한 벤자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부인?”
그는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듯했다. 그레이스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꾹 깊게 눌러썼다.
“릴리, 얼른 가죠.”
“네? 네.”
릴리는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바로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를 따랐다. 벤자민이 다급하게 그레이스의 뒤를 쫓았다.
“부인, 부인. 어디 가십니까? 짐이 많습니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일행이 있으시잖아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벤자민의 말에 그레이스가 걸음을 딱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이스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제국의 유일한 성녀님을 중요하지 않다고 하실 건가요?”
“…….”
벤자민이 놀란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걸…….”
“제가 아무리 이제까지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했어도, 그 정도는 알아요.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왜 이리 화가 나는지.
그레이스는 입을 꽉 다물고 그를 세게 노려보았다.
“아름다운 성녀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리고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고아원 쪽으로 향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