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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28)화 (28/131)

28화

“네?”

샐리는 그레이스가 보여 준 조약돌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음, 밝은색으로 바꿀까요? 하긴 요즘은 밝은색 돌이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잖아, 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레이스의 손에 있던 조약돌이 파사삭! 하며 터졌다.

“꺄아악! 마님!”

“……어?”

그레이스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오자, 다친 당사자인 그레이스보다 샐리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주치의! 본관에 있는 주치의! 의사!! 집사님, 의사를 불러 주세요!”

“새, 샐리, 진정부터 하자. 응?”

“마님, 안 아프세요?”

“……조, 금 놀랐지만, 생각보다 안 아파.”

도리어 그레이스가 샐리를 달래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어?’

“마님. 얼른 가요. 손부터 씻고, 의사한테 가요.”

“어어, 어. 응. 알았어.”

샐리의 재촉에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그러면서 힐끗힐끗 옆쪽을 바라보았다.

‘나 방금, 실베스터랑 눈이 마주친 거 같은데.’

⋆★⋆

“조약돌이 터진다니 말도 안 돼요, 정말.”

“그러니까 말입니다.”

“진짜요. 샐리가 같이 있지 않았더라면 마님은 억울하게 다치고 끝날 뻔했잖아요.”

그레이스는 공작가의 주치의에게 꼭 달라붙어 상황을 보고하는 사용인들을 침침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주치의는 그들의 호들갑스러운 설명을 침착하게 들었다.

“저는 애석하게도 마도폭탄 전문가가 아니라 의사라서, 조약돌이 터지는지 아닌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말 침착하네.’

그레이스는 멀뚱멀뚱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레이스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고맙네.”

“아닙니다. 마님께서 저를 찾으시는 일은 드무니, 도움이 되어 기쁘군요.”

그레이스는 그 말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별관에 있는 애들은 내가 몸이 약하다는 말을 종종 했던 거 같은데.’

하지만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그레이스는 원래 ‘의문의 병사’를 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아플 때 꼬박꼬박 의사를 찾아갔으면 의문의 병사를 당할 일 따위도 없겠지.

‘애초부터 잔병이 많으면 장수한다는 이유도 병원을 자주 들러서 병을 초반에 발견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그레이스는 주치의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붕대를 큼지막하게 두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오늘에 합당한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레이스는 오늘에 맞는 치료가 있고 내일에 맞는 치료가 있나?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치의가 고개를 들어 그레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아, 마차가 온 걸 봤네.”

“아마 저녁까지 드시고 가시겠죠.”

“……!”

그레이스는 바로 주치의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챙겼다.

“……나는 오른손을 다쳐 오늘 식사 예절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우니까. 가족 외의 분들과 식사를 하긴 어렵겠지.”

“예, 의사로서의 소견도 같습니다.”

‘황태자의 성격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

원작의 실베스터는 아리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떠돌이 한량이었다. 어딘가에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한 사람과 길게 교류하는 일도 없었다.

벤자민과 한 번도 큰 갈등이 없었다는 게 제일 신기할 정도로 실베스터는 양아치에 가까웠다.

유일한 황제의 아들이었기에 황태자였지, 만약 황제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실베스터는 암살당한 뒤 사라졌을 거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얼굴만큼은 잘생겼지, 라는 말도 따랐다.

‘나랑은 상관없는 인물이지만 굳이 이 시기에 온 게 나한테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아.’

주치의가 굳이 그레이스에게 황태자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그의 목표 자체가 그레이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본관에서 머무는 주치의였다. 본관에서 도는 소식에 대해서만큼은 그레이스보다 밝았다.

망토를 옆구리에 낀 그레이스는 그럼 오늘 저녁 약속은 자연스럽게 취소될 테고, 지금 여기서 나눈 대화도 자연스럽게 벤자민에게 전달될 거라 판단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외출은 해도 되나?”

“뭐, 외출은 발로 하는 거지 손으로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말도 옳아.”

그레이스가 의무실을 나서자 별관의 하녀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때, 한 청년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 형-!!!”

“……?”

그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뚝 섰다. 그녀를 뒤따르던 하녀들도 우뚝 섰다.

“됐어! 형 진짜 말 안 통해!”

저 멀리서 실베스터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레이스는 허둥지둥 망토를 걸치려고 했으나, 그가 그레이스를 발견하는 게 더 빨랐다.

“……음?”

“아.”

그레이스는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실베스터를 바라보았다.

‘인사를 해야겠지? 그래도 황제가 주선한 결혼이었으니 아무리 한량이라고 소문난 황태자라도 참석했을 테니까.’

그레이스가 실베스터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예를 표하려는 순간 그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냥 지나가.”

“……?”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려던 그레이스는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응? 일 보라고. 바쁘잖아. 예절 안 지켜도 돼. 안 잡아가.”

“……어. 네……?”

그레이스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고아원에 잠깐 찾아가기 위해 최대한 평범하고 평범한 옷을 골라 입었던 참이었다.

‘음, 못 알아볼 수도 있지.’

못 알아볼 수 있나?

그래도 공작 부인인데? 결혼식도 했고.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소문나 있지 않나?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는 여러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결국 그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래, 나에게 그럴 만큼의 가치는 없나 보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베스터를 힐끗 훔쳐보다가 그를 힐끗 비켜갔다. 하녀들은 실베스터 몰래 그를 한 번씩 톡 쏘아보았다.

‘그냥 이대로 나가야지.’

그레이스가 복도를 걸어가며 망토를 펼치며 고개를 숙였다. 아래에 구둣발이 보였다.

“아.”

“부인?”

목소리를 듣기 전, 구두를 보자마자 벤자민임을 알아챘다.

“각하.”

벤자민이 당황한 낯으로 그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는 어쩐, 아니 오른손은…….”

“작은 사고가 있었어요.”

그레이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그의 표정이 오히려 복잡해졌다.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어찌.”

“음,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저녁 식사는 함께하지 못하겠네요. 오늘 손님이 식사를 함께할 거 같다면서요.”

“예, 황태자…….”

벤자민은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오른손을 들어 그레이스의 얼굴 옆으로 쑥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깜짝 놀라 몸을 왼쪽으로 비켰다. 벤자민의 오른손은 누군가의 얼굴을 꾹 밀어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여행을 즐기시더니 예법을 잊으신 듯합니다.”

벤자민이 다정하게 웃으며 실베스터에게 말했다.

“베, 펠튼 공작, 그대가 그대의 아내를 내게 한 번도 안 보여 준 잘못이 아닌가.”

“전하께서 제 결혼식에도 오지 않은 걸 왜 제 탓으로 모십니까. 분명 전 초대했습니다만.”

“나는 그때 게이트가 없던 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제 탓이 아니죠.”

“…….”

그레이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제 부인께 무례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아니, 제 부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에게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미는 것은 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실베스터는 아리아를 처음 봤을 때도 얼굴을 들이밀었었지. 그래서 아리아가 주먹을 날렸던가.’

그레이스는 그냥 그게 그의 습관임을 알게 되었다.

“매번 나에게 부인의 이야기를 하더니. 음……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살피는 사람 같군.”

“…….”

그레이스는 실베스터를 덤덤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도리어 그 사이에 낀 벤자민이 당황해 이도저도 못했다.

“전하, 이곳은 저의 집입니다. 더 이상 무례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음? 내가 무슨 무례를 저질렀다고?”

“다시 들어가 계십시오.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벤자민은 실베스터를 조금 전 방에 꾹꾹 밀어 넣고 빠른 걸음으로 그레이스에게 되돌아왔다.

‘올 필요 없는데.’

벤자민은 방금 전보다도 더 속이 상한 낯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레이스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자민이 물어본 건 손이 아니었기에 조금 우울한 낯이 되었지만, 더 이상 그레이스에게 캐묻지도 못했다.

“……외출하시는 것이라면 제가 뒷문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서 망토를 가져가 조심스레 둘러주었다.

“레흐턴의 망토지만 요즘 날이 쌀쌀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벤자민의 말대로 레흐턴의 망토였기에 날이 쌀쌀하다고 걱정하는 건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굳이 그 부분에 대하여 딴지를 걸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팔을 내주거나 손을 내밀었겠지만 벤자민은 그저 그레이스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그, 전하와 저는, 전하께서 어리실 적 제가 잠시 말동무가 되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연으로 요즘도 가끔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모임에 초대받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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