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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32)화 (32/131)

32화

여기서 이야기가 끊기면 쉬기는커녕 신경 쓰여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결론을 내릴 게 뻔했다.

“……그러면…….”

그레이스가 고민하다가 물었다.

“……들어, 오실래요?”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물음을 듣고 얼어붙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어안이 벙벙해진 듯했다.

그레이스 또한 말해 놓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나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아프다 보니 미친 건가?’

그를 멀리한다고 해 놓고 이젠 또 들인다고?

그레이스가 다급하게 취소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벤자민의 질문이 빨랐다.

“저, 정말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

“정말로 괜찮습니까?”

그레이스는 차마 두 번이나 확인하는 벤자민에게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뻣뻣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또 활짝 웃었다.

“그러면 들어가도 됩니까?”

“그, 그러니까…… 제가 ‘들어오실래요?’ 하고 물었는데요.”

“……아!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들어가서, 부인의 방에 가겠습니다. 창문은 그만 닫고 계십시오. 바람이 찹니다.”

그레이스는 또 목소리를 내는 대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벤자민은 그래도 좋다고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별관의 문으로 향했다.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별관의 집사는 모른 체하며 멀끔한 낯으로 벤자민을 반겼다.

그레이스는 창문을 천천히 닫으며 그 자리에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어, 어지러워.’

잠깐만 바람을 쐰다는 게 너무 오래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말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머리가 또 핑그르르 돌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방금 전 침대에 누워 있을 때처럼 우울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감정 제어가 너무 안 돼.’

그레이스는 갑자기 미칠 듯이 우울해지고, 자기 비하가 심해지는 순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갑자기 안정된 지금이 불안해졌다. 우울과 불안이 없어진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무튼, 곧 벤자민이 들어올 테니까 일어나야지.’

아무리 아프더라도 방바닥에 쓰러진 채 사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아마 벤자민이라면 들어오기 전에 노크부터 하겠지만.’

그레이스가 바닥에 손을 짚으며 몸을 느릿느릿 일으켰다. 그녀가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아.”

그레이스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벤자민이 들어와도 되냐고 하면, 들어와도 되기는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그레이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솜이불 속에 꽁꽁 덮인 채 앓느라 땀에 푹 절어 있었다.

‘크, 큰일 났다.’

속으로 아무리 벤자민을 헐뜯으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그를 좋아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거울로 본 그녀는 정말 끔찍하게 엉망이었다.

조금 전에는 어둠 속에라도 파묻혀 있었지, 여기는 실내였다. 그가 들어오면 등이 켜질 테고, 등은 달빛보다 밝았다.

그레이스가 당황해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지?”

문 너머에서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에 비친 못난 그레이스의 잔상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왜 이런 걸로 동요하는 거지?’

나는 어차피 벤자민과 이혼할 건데. 그런데 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가.

물론 좋아하지 않아도 못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이유를 말하자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레이스는 공황 상태였다.

똑똑.

한참 침묵하던 노크 소리가 또 울렸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늪에서 빠져나와, 숨을 쉬며 문을 바라보았다.

“부인, 잠드셨습니까? 음, 잠드셨으면 답을 못 하시겠죠. 그러면 그냥 가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간다는 말에 다급하게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자, 잠든 게 아니라…….”

“…….”

“제가 지금 보니까 상태가 엉망이라서요…….”

그레이스는 이걸 벤자민에게 말하려니까 창피했다. 떼쓰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 오늘은 돌아갈까요?”

“아, 아뇨!”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붙잡아야 했다.

대체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는 소리들은 그를 내쫓으라고 속삭였다.

내쫓고 다시는 들이지 말고, 멀리하라고 했다. 어차피 그는 그레이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기만한다. 이건 불변의 진실이다.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붙잡아야 했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저 목소리를 듣고 아예 그를 멀리할 테니까. 비록 반년 뒤에 그와 이혼을 할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싫었다.

‘모르겠어.’

왜냐하면, 그레이스가 생각하기에 벤자민은 결국 아리아를 사랑한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에 의해 사망한다. 그레이스는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무능하고 못난 공작 부인이다.

‘내가 본 글에서는 그랬어. 그런데 다르잖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의 그레이스가 차례차례 겪고 있는 일이 달랐다.

‘8개월 사이에 바꿀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바꿀 필요 없이, 알기만 해도 될지도 몰라.’

예를 들면, 가면 축제 때 벤자민은 원래의 그레이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으나, 그레이스가 거절하여 아리아와 갔다.

게이트 참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지금은 그냥 피하고 멀리하면서 이혼을 기다리는 게 최상책이 아니야. 난, 8개월 동안 벤자민과 주변을 전부 이해해야 해.’

그레이스가 이 별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긴 시간, 흐릿하고 듬성듬성한 기억 사이.

어쩌면 그 기억 사이에서 그레이스가 죽은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고, 벤자민과 그레이스가 이렇게 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인간관계잖아.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 그레이스야.’

“……읏.”

그레이스는 양손으로 제 머리를 꾹 눌렀다.

‘도망치고 싶어.’

아마 원래의 그레이스는 평생 이런 기분이었겠지. 그녀는 그레이스를 마음속 깊이 이해했다.

하지만 더는 그래서는 안 돼.

그레이스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도망치고 싶은 이유는 살고 싶어서잖아.’

“지금 이야기해야 해요.”

그레이스는 손을 내리며 두 발을 딱 버티고 서 벤자민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들어와 그레이스를 보며 웃었다.

“누워 계시지 않고 왜 서 있으십니까.”

“……손님이 왔는데 어떻게 누워 있어요.”

“저희는 아직 가족입니다, 부인.”

벤자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레이스의 빈 침상을 바라보았다. 꽤 익숙하게 침대 이부자리를 정리해 이불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한 손으로 이불자락을 걷은 채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가 머뭇거리다 침대에 눕자 벤자민이 이불을 덮어 주었다.

벤자민은 주변에 앉을 만한 의자가 없나 둘러보았다. 샐리가 그레이스를 돌보기 위해 가져다 두었던 동그란 나무 의자가 있었다.

“다행이군요.”

벤자민은 넉살스럽게 웃으려 애썼으나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조금 전 그레이스에게 ‘가족’이라고 했으나, 둘이 밤에 같은 방을 쓴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양손을 깍지 끼고 말문을 열기 위해 눈을 굴리던 벤자민은 살짝 열린 서랍장 틈으로 그레이스가 먹지 않고 쌓아 둔 약 봉투를 발견했다.

“…….”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고 부러 모른 척하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친구라는 건 말입니다. 가문이라거나 서로의 입장과 상관없이 만날 수 있는 그런 사이잖습니까.”

“……네?”

“조금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방금 벤자민과 창문을 통해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아, 하며 작게 대꾸했다.

“그런 의미에서 성녀와 저는 아직 친구가 아니죠, 아쉽게도. 그렇게 되면 꼭 부인을 소개시켜 주고 싶군요.”

“……그러면 정말 친구가 되고 싶어서일 뿐인가요?”

원작의 벤자민도 자신을 경계하는 아리아에게 그저 친해지고 싶을 뿐이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사심이 있는 건 비밀로 부쳐 달라 부탁했다.

‘그게 진짜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고?’

상당히 의뭉스럽고 꿍꿍이가 있어 보이며, 누가 봐도 사심이 있어 보이는 듯한 멘트였다. 전생의 그레이스만 벤자민은 유부남이니 사심 없는 말일 거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제가 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아팠습니다.”

“……아팠어요?”

“부인께서 지금 앓고 계시는 열병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나았고요. 그 일을 계기로 선대 공작 부부께서는 신실한 신도가 되셨죠.”

그레이스는 소설 속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벤자민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벤자민은 조금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하여 선대께서는 그게 전부 신께서 내린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각하께서는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생기면 결국에는 신을 찾는 수밖에 없지요.”

벤자민은 그리 말하며 그레이스의 침대 옆 등불을 낮추었다.

“부인께서는 신을 믿으십니까?”

“음…….”

신을 믿느냐는 벤자민의 질문에 그레이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딱히 믿지 않는 줄 알았는데, 끝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죽을 거 같을 때라든가. 정말 힘들 때 감히 누구를 불러도 될지 모르겠어서, 그럴 때면 신을 찾게 되는 거 같았다.

그레이스는 그런 날을 떠올렸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침대에 푹 늘인 그레이스는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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