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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64)화 (64/131)

64화

그레이스가 독자였을 적, 보리스를 꽤 좋아했다. 벤자민이나 주역들만큼 좋아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사실 서브남으로서의 면모는 벤자민보다 보리스가 더 또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가 서브남이 되지 못한 이유는 보리스는 아리아에게 있어 보호자 포지션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보리스를 좋아했던 이유이지만.’

보리스는 아리아의 지지자이자 신전 내에서의 보호자, 버팀목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완벽하게 제 소임을 다했는데, 왜 벤자민은 갑자기 흑화를 해서 통수 치는 만악의 근원이 되었을까.

그레이스는 힐끗 제 앞에 서 있는 벤자민의 뒤통수를 올려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인지 벤자민의 어깨가 약간 움찔했다.

‘아차.’

그제야 그레이스가 제 심정을 겉으로 드러냈음을 깨닫고 입가를 매만졌다.

보리스가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부인?”

“아…… 다름 아니고 자르테 공작께 예상치 못한, 귀한 선물을 많이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답니다.”

“여러분께서 제국 귀족을 대표하여 이리 도움에 앞장서시니, 그 영예로운 분들에게 어떠한 재물을 드려도 감사함을 다 담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보리스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며 다가왔지만, 사실 조금 전까지 여기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이곳에는 황실, 귀족 그리고 신전 세 가지 파벌이 전부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고위 귀족임에도 황실과 가깝고 약소 귀족이나 신흥 세력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펠튼 공작가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레이스가 놓친 사실이 있다면, 펠튼 공작가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 대단한 펠튼 공작가여서가 아니라, 그레이스 때문이었다.

펠튼 공작가의 현 공작인 벤자민의 위상이 높은 만큼 그레이스에 대한 좋지 않은 풍문은 은근하게 돌았다.

무능하고 자신의 의무를 전혀 하지 않는 못난 부인이라는 소문이 평민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는 그레이스였다.

또한 약 1년간 제도에 위치한 공작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그녀가 이번 원정에 선뜻 응하고, 뿐만 아니라 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니,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평범한데?’

‘소문으로는 엄청 추녀라고 했는데.’

‘평범하시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자가 워낙에 출중한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그렇지, 그레이스 자체는 소문이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통통할 뿐이지 평범하디평범한 외관을 가진 여성이 피해 지역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작은 몸을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질 지경이었다.

자극적인 소문을 좇아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하던 과거의 자신을 향한 죄책감이었다.

“나와 부인은 재물을 받고자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네. 이것이 옳은 일임을 알고, 할 수 있으니 한 것이지. 펠튼 공작가의 힘은 받쳐 주는 이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니 응당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겠나.”

그레이스는 그런 것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이 쓰였다.

‘왜 자르테 공작의 선물 처분에 대해 고위 사제가 왈가왈부하는 거지?’

오는 길에 만나 합류하였다고 해도 신전 측에서 이에 신경 쓸 이유는 되지 않았다.

또한, 오히려 약자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는 건 신전의 교리에서도 권장하는 일이었다.

“…….”

그레이스는 슬슬 이 대화가 쓸데없다고 느껴졌다.

대체 왜 신전 소속의 사제가 자르테 공작의 선물에 대해서까지 참견하는지, 알 노릇도 없었거니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원래 오지랖이라고 할 만큼 주변을 많이 챙기는 성격이었던가.’

원작의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외우고 있지는 않았지만, 보리스의 이런 행동을 보고 있자니 원작에서 아리스의 성의를 무시한 이들에게 끝없는 설교를 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으음…….’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자르테 공작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몇 가지는 받도록 할게요. 하지만, 사제께서도 오면서 사태를 보았다시피 공작의 성의를 조금 더 제국민에게 베푸는 것이 도움이 되며 그분의 성의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그분께서는 우리의 선의와 영예에 보답하기 위해 구호물자와 함께 선물을 보내온 것인데, 그것을 오염 피해자들을 돕는 데에 쓰는 것은 절대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의 말에 보리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네, 그럼 후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주세요.”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팔을 잡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

저벅저벅,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잘 대처한 걸까?’

항상 말하고 나면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대단하셨습니다.”

그녀의 불안을 읽기라도 한 듯, 벤자민이 말했다.

“……그리 대단하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잘 대처하셨습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판단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달라라.’

보리스 베네디크는 신전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속하는 사제였다.

그런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달라고 말한 것은 펠튼 공작가가 이 원정에서 신전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으며 사실상 원정대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리는 바였다.

‘더군다나 저자가 대답하기 전에 떠났으니.’

벤자민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각하,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떠올랐나요?”

“비밀입니다. 일이 바쁘니 얼른 움직여야겠군요.”

“네, 각하도 힘내세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서 떨어져, 샐리가 기다리고 있을 천막 쪽으로 향했다.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다시금 채비하기 위함이었다.

늘 불안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러다가도 벤자민과 대화하면 사라지는 게 신기했다.

그레이스는 조금 전까지 벤자민의 팔을 잡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꽉 주먹 쥐며, 걸음을 재촉했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며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잠시 후, 도난 사건이 벌어졌다.

도난 사건의 피해자는 아리아 밀러, 이 제국의 유일한 성녀였다.

⋆★⋆

“그래도 이제는 꽤 일에 적응한 거 같아.”

“마님께서 몸소 나서서 하시니, 모두의 의욕이 샘 솟는 거지요.”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샐리가 너스레 떨며 말하자 그레이스가 바로 부정했지만, 예전처럼 힘없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전에 비해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느낀 샐리는 괜스레 뭉클해졌지만, 그녀의 아랫사람으로서 그러한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성녀님께서도 도착하셨으니 정화 작업을 마치고 나면 돌아가도 되겠죠?”

“응,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요.”

“이럴 때 보면 성녀님이 한 분이 아니라 여럿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국은 이렇게 넓은데 성녀님은 늘 한 분만 탄생하시니, 피해를 빨리빨리 수복하지 못하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원작 설정이 그런걸.’

성녀가 발견되는 시기나 지역이 일정한 건 아니었다. 한 세대에 딱 한 명. 그것만이 특징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신전에서 꼬박꼬박 한 명뿐인 성녀를 찾아내는 것도 대단하네.’

그것도 설정 덕에 그런 건지.

애초에 설정이 그렇다 해도 이제는 실존하는 세상인데 발견하는 원리가 있는 게 아닐까? 하며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고민이지. 방법이 있다고 해서 한 명뿐인 성녀가 여럿으로 늘어날 리가 없으니까.’

“음? 저게 무슨 일일까요?”

아직 해가 지기 전, 일을 빨리 마쳐 돌아가고 있던 샐리와 그레이스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지금 사람이 모여 있을 이유는 없었다. 샐리는 그레이스의 허가를 받아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신전 기사로 보이는 자가 샐리의 질문에 답했다.

“성녀님의 물품이 도난당했습니다.”

“……?”

그레이스는 또 원작과 다른 전개가 벌어져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왜?’

자신이 다르게 행동하는 만큼 원작과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 도난 사건이라는 변수와 자신의 행동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뭘 도난당한 건지 알 수 있겠나?”

그레이스가 침을 삼키며 신전 기사에게 물었다.

그녀와 샐리보다 한참은 커다란 신전 기사는 어째 위협적으로 보였다.

‘보리스와 비슷한 키인 것 같은데.’

보리스와 대면했을 때에는 그리 무섭지 않았는데, 왜 이 기사는 버거운지.

자신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어깨를 서서히 움츠렸다.

“……자르테 공작께서 준 선물이 사라져 곤혹스러운 사태입니다. 자르테 공작의 선물이 사라졌으니 후에 공작께서 이 사실을 알면 성의를 무시당한 것이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게 문제였나.’

자르테 공작의 원조는 원작에서 없던 것이니, 도난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다.

그레이스는 이리 사건의 순서를 정리하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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