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레이스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통통 두들겼다.
“뭘 그리하십니까?”
“잠시만요.”
잠시 후, 바닥 어디선가 다른 곳보다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군.’
비교적 가벼운 소리가 들린 곳의 타일을 들춰내자 안쪽에 작고 허름한 상자가 존재했다.
어느새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은 벤자민도 흥미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물찾기 같군요.”
“그러게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음…… 정원 일기요?”
상자 안에는 그레이스가 심었던 식물의 정보와 기록, 온실의 각 위치에 무엇을 심었는지 등이 적힌 작은 책자와 말린 꽃으로 만든 책갈피가 정갈히 담겨 있었다.
“책갈피가 있네요.”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하네.’
그녀는 공작 부인에게 꽤 예전부터 압화를 만드는 취미가 있음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보통 꽃의 종류나 특징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는 게 정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레이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벤자민에게 설명했다.
“어릴 때 처음 만든 압화로 만든 책갈피예요. 종류별로 하나씩 만들었죠.”
그레이스는 별 의미 없이 설명해 주었는데, 어디선가 열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레이스는 굳이 열기의 출처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벤자민은 수줍어하면서도 착실하게 꽃 책갈피를 챙겼다.
‘저게 그렇게도 좋을까.’
“그래서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요, 이 정리본이 좀 보기가 어려워서요.”
그레이스는 이것저것 신기한 걸 심어 보고 실패하는 걸 반복했다.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묘종이 고정적이지 않아 이리저리 페이지를 덧대 수정을 반복했다.
줄이 쫙쫙 그어진 옆, 수정되어 있는 글귀를 따라 읽어 내려가며 온실 지도를 보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마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샐리는 벌써 저택의 지리를 익힌 것인지, 둘을 찾아와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안내했다.
“벌써? 빠르네.”
그레이스는 방의 창을 보았다. 해가 진 뒤 한참 지났는지 새까만 하늘이 보였다.
‘저녁이라기보다는 밤에 가깝구나.’
둘이서 뭘 했다고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건지, 그레이스는 자작가 사람들이 둘을 배려한 것을 느끼며 머쓱해졌다.
“서둘러 가야겠어요. 다른 분들은 배고플 테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현재 자작가의 일원은 총 셋이었다. 현 자작 부부와 차기 자작인 길버트 린덴, 즉 그레이스의 오빠였다.
‘그레이스의 언니는 결혼해서 출가했으니까.’
그러나 그레이스는 식당에서 반가우면서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고 우뚝 섰다.
“언니?”
“그레이시, 오랜만이구나!”
글로리아는 그레이스를 어릴 적 부르던 친근한 애칭으로 부르며, 활짝 웃었다. 중앙에 걸린 초상화와 그녀의 기억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쪽에 앉아, 이쪽에. 너무 보고 싶었어. 1년간 연락도 되지 않아서 어찌나 걱정했는지…….”
“글로리아, 그러지 말아라. 공작 각하도 계시는데 예의에 어긋나잖니.”
“아닙니다. 보기 좋습니다.”
벤자민은 훈훈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레이스는 힐끗 보다가 글로리아 옆에 앉았다. 그레이스가 그녀의 옆에 앉자, 정말로 보고 싶었는지 글로리아는 그레이스의 손을 부드럽게 포갰다.
“언니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기는, 네가 오랜만에 온다길래 나도 왔지.”
글로리아는 그레이스가 펠튼 공작가로 시집간 뒤 얼마 가지 않아 다른 집안 영식과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펠튼 공작가와 연이 생겨 아주 약간의 입지가 생긴 덕분이었다.
‘물론 이런 건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았지.’
뜨문뜨문 떠오르는 그레이스의 기억이었다. 예전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날 열병을 앓으면서 꿈을 꿨던 게 계기였나?’
마을 아이들이 그레이스를 따돌리고, 이를 길버트가 외면하는 꿈이었다. 그레이스는 껄끄러웠던 내용을 떠올리며 자작과 벤자민의 근처에 앉은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그는 그레이스를 만났음에도 그다지 살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기억과 비슷하네.’
길버트는 차가운 성격을 가진 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레이스와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어릴 적부터 이에 대한 이유를 자신이 ‘창피한 여동생’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벤자민까지 합쳐진, 자신을 제외하면 완벽한 가족이 앉은 식탁은 영 불편했다.
원정 마지막 날 밤 아리아가 말해 준 힌트가 아니었으면 그레이스는 이 자리에서 헛구역질하거나 뛰쳐나갈 뻔했다.
자작 부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그레이스가 공작가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었나 봅니다. 그레이스가 좋아하는 것이라 후식의 일부로 트리클 타르트를 준비했는데, 괜히 준비한 게 아닐까 염려스럽네요.”
“아닙니다. 저 또한 트리클 타르트를 좋아하니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트리클 타르트는 만찬회에 나오기엔 검소한 메뉴였다. 그래서 남들이 듣기에는 그레이스가 그만큼 공작가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아온 것에 관해 감사함을 표하며,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꼽 주네.’
하지만 저건 그레이스에게 눈치를 주는 말이었다. 트리클 타르트의 트리클이란 당밀, 골든 시럽이다.
‘기억에도 없는 1년은 그나마 연락했던 거 같은데, 나머지 1년 동안은 연락도 안 했고.’
그러니까, 자작 부인의 말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었다. 연락 안 되는 1년 동안 어떻게 지냈길래 관리도 그렇게 엉망이니, 후식까지 다 챙겨 먹으면 더 찔 테니 알아서 관리해라.
그레이스는 입 안이 썼다.
그녀는 이것을 피해망상의 일종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으나, 너무 익숙하게 들으며 자라 온 터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인 린덴 자작 부인은 무의식중에 저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냥 넘어가자.’
여기서 걸고넘어져 봤자, 나만 민감한 인간이 되는 법이다. 그레이스가 그리 생각하며 넘어가려는 때였다.
“한동안 부인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입에 대지 않으셨으니, 오늘 같은 날 함께하면 더없이 기쁘지 않겠습니까?”
벤자민은 자작 부인의 말뜻을 파악한 건지 아닌지 의연한 낯으로 그리 말했다.
“늘 자작가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들어온 터라, 첫 식사부터 기대가 됩니다.”
‘이해했네.’
그레이스는 웃는 낯으로 모르는 척, 장인 장모와 기싸움 하려 드는 벤자민을 보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나,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매번 좋게 말했으니까 인상 망치기 싫으면 잘하라는 거 아냐, 이거.’
세상에 장인어른이랑 기싸움 하는 사위가 어디 있나. 그레이스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길 바랐다.
“이제 식사가 나오는군요. 공작가의 주방장만큼은 아니지만, 자신할 수 있습니다.”
첫 디쉬는 수프였으나, 시원하고 새콤해 산뜻한 맛이었다.
‘정말 자신할 수 있었네.’
공작가에서 지내면서도 먹어 본 적 없는 류의 시큼한 풍미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게 뭐지?’
접시 속 수프는 맛만큼이나 안에 담긴 색도 특이했는데, 분홍빛이 감도는 부분이 있었다. 토마토라고 하기에는 그 외에 다른 것도 느껴졌다.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그레이스가 수프 위에 얹어진 장식 겸, 먹을 수도 있는 채소 이파리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처음 먹어 보는 맛이군요, 좋습니다. 새로운 레시피입니까?”
“아, 예. 새로운 농작물을 드디어 수확하는 데 성공해서 말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오셔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흐음.”
벤자민은 썩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수프지만, 이 정도 산미면 잼이나 디저트에도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곳에서 수요가 붙으면 린덴 자작령도 금전적으로 형편이 나아질…….’
그레이스도 제 고향이 발전한다는 데는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순간 머리에 큰 충격이 꽂히며 잊힌 기억이 떠올랐다.
“이, 이거 먹으면 안 돼요!”
“……뭐?”
“그, 그레이시, 왜 그러니?”
“독이라고요!”
이 수프에는 그레이스가 키웠던 식물이 들어가 있었다.
‘기억났어.’
그레이스는 어릴 적부터 쓸데없는 씨앗이나 묘종을 산다고 구박 아닌 구박을 듣곤 했다.
그 이유는 키우는 족족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울 때마다 죽었던 이유는 그레이스가 무언가를 키우는 데에 재능이 없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린덴 자작령은 상행의 규모가 크지 않은 상인들이 한번 거쳐 가 보는 곳인 만큼 특이한 품종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다.
어릴 적 그레이스는 그것을 한 번씩 사 보고는 했다.
‘만약 키우는 데 성공하고 수요가 있다면 린덴 자작령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이 수프에는 그렇게 키운 품종이 재료로 들어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이 재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주방장을 불러 주세요.”
그레이스는 차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수저를 쥐고 있는 그레이스의 손이 떨렸다.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보고 있다 식기를 내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