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벤자민의 행동을 보면…… 연기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짝사랑 대상이 둘이라는 의미인가? 이건 더욱 그레이스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턴가 내 가설이 잘못된 것 같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그레이스는 생각의 기조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원작과 아예 다른 세계라고 할 수는 없어. 분명 비슷한 흐름이 존재했으니까.’
벤자민이 아리아와 실베스터를 볼 때 아련한 눈빛을 보낸 이유, 후에 그가 아리아에게 그러한 행동을 보이고 발언을 한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존재할 터였다.
‘그래,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자.’
앞으로 남은 이혼 조정 기간, 결정의 날이 다가올수록 아무리 입을 막아도 고위 귀족 사이에서는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만약 그레이스를 몰래 죽이려고 한 세력이 따로 있다면, 펠튼 공작가 못지않은 힘을 가졌을 터이니 언제고 이혼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것이다.
‘내가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면, 그들은 계획이 어그러져 초조해질 거야. 그때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계획이 어긋나 불안한 만큼 서두르려 할 테니까 꼬리가 잡히겠지.’
만약 벤자민이 그 죽음에 일조했다면? 그레이스는 그 가정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레이스의 대외활동 자체를 그가 방해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벤자민이 빙의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찜찜하지만 지금 당장 내 목숨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니니까…….’
“그레이시?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겨 있니.”
“앞으로 집에 돌아가면 뭘 해야 하나, 해서?”
“하고 싶은 게 많나 보구나.”
‘하고 싶은 게 많다기보다는 안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지.’
그레이스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목 끝까지 턱, 하고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글로리아는 그레이스의 속도 모른 채 옅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땋아 내려 주었다. 어릴 때 두 자매가 같이 잠자리에 들 때면 꼭 하던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다.
“어릴 때는 많이 엉뚱한 아이였는데, 이젠 어엿한 레이디구나.”
“제가 그랬나요?”
“그럼. 기억도 안 나니?”
가족과 있던 일, 성장하며 린덴 자작령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는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정확히 ‘그레이스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부끄러웠던 일이라 그런지, 잘 기억나지 않네요.”
그레이스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냥 울보에 소심한 사람이 아니었나?’
기억 속의 그녀는 괴롭힘을 받아 엉엉 우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가족을 좋아한다거나, 책을 많이 읽거나, 무언가를 키우는 취미가 있다는 정도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보통 기억을 회상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늘 자신에 대해 정의 내리는 걸 어려워했다.
내린다고 해 봤자, 음침하거나 무능한, 우울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평했다.
‘마치 꼭 그래야만 한다고 규정된 것처럼 말이야.’
마치 머릿속에 검은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식사 때 일 때문에 나를 부른 건가?’
오늘 식사 시간에 분위기가 영 좋지 않기도 했으니, 글로리아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였겠지.
‘오랜만에 온 가족끼리 한 식사의 마무리가 그리되었으니, 언니는 어떻게든 분위기 좋게 만들고 싶겠지.’
길버트는 든든하지만 무뚝뚝한 편이었고, 그레이스는 기본적으로 소심한 성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집에서 윤활제 역할을 하는 건 글로리아뿐이었다.
다만, 그레이스에게 신경 쓰이는 건 다른 점이었다.
‘언니는 분명 결혼했을 텐데?’
별채 서재의 서랍장, 정리된 편지 더미에는 글로리아가 보내 주었던 청첩장도 끼어 있었다.
‘결혼 전에 파혼했다면 그에 대한 소문도 100퍼센트 내 추문으로 붙었을 테니까, 확실해.’
그레이스는 씁쓸하게 확신하며,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언니, 그래서 어쩐 일로 불렀나요?”
“어쩐 일로 불렀긴, 자매끼리 하룻밤 정도 같이 보내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니?”
글로리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레이스가 자작령에 도착한 당일이었다.
도착 당일은 여독을 풀라며 홀로 두는 게 보통이었다. 제안을 하더라도 며칠 뒤를 예정하는 정도지 이렇게 당일에 대뜸 같이 잠을 자자고 청하진 않았다.
그레이스도 원래라면 이런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곤하니까…….’
그레이스의 몸에 남은 기억은 글로리아를 반기고 애틋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1년 동안의 칩거 생활 때문인지 집안사람을 꺼리는 감정도 느껴졌다.
차라리 지금은 벤자민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글로리아의 제안을 승낙한 이유는 글로리아는 그레이스에게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고, 그 부탁의 내용이 자작가와 관련이 있어 보인 탓이었다.
딱히 가족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도와줄 수 있다면 기쁘겠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이 심어 둔 농작물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내가 남기고 간 루바브로 대량 재배를 한 건 상관없어. 루바브에 독성이 있는 걸 몰랐을 수도 있어. 하지만 독이 있는 수프를 먹게 한 것에 대해서는 따로 사과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길버트의 발언만으로 모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는 듯 지나갔다. 심지어 길버트도 독이 든 음식을 먹인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것이 영 찜찜했다.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건가?’
이건 귀족식으로 돌려 말하려는 건지, 말하기 껄끄러운 내용이라 그런 건지. 그레이스는 일단 글로리아와 나란히 누웠다.
글로리아가 한참 침묵하다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네가 결혼하기 전에는 이렇게 종종 같이 자고는 했지.”
“……그랬죠?”
글로리아가 말을 꺼내니, 그레이스도 기억이 났다. 그레이스의 방은 구석져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글로리아는 종종 그레이스의 방으로 찾아와 같이 잠을 청하곤 했다.
“그땐 언니가 제 방으로 왔었죠. 지금은 제가 언니 방에 왔지만요.”
“참 좋았는데 말이야.”
글로리아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문득, 그레이스는 글로리아의 추억에 담긴 목소리를 듣다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내가 언니보다 먼저 결혼했다고?’
“언니.”
“갑자기 왜 그러니?”
그레이스는 상체를 일으켜 글로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공작님이 왜 저와 결혼한 건지 알고 계시나요?”
보통 혼담이 오가는 집안에 미혼인 딸이 둘 있으면, 어지간한 하자가 있거나 약혼자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첫째와 이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왜 나랑 벤자민이 결혼한 거지?’
누가 봐도 글로리아가 펠튼 공작 부인이라는 타이틀과 어울리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이스의 눈에 달빛을 담은 아름다운 여성이 보였다.
‘언니가 거절했나? 그럴 리가 없어.’
이 사람은 자작가의 안정을 위하는 쪽이었다. 애초에 삼남매는 전부 린덴 자작가와 영지를 위하는 이였다.
황실에서 주선한 결혼이었고, 펠튼 공작가는 린덴 자작가에 과분한 혼처였다. 글로리아는 사랑을 좇아 결혼할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후에 다른 가문과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레이스는 그러다 또 다른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 거치고는 린덴 자작령은 거의 성장하지 않았어.’
그레이스는 펠튼 공작 부인이 되었고, 글로리아는 동생이 공작 부인이 된 만큼 나쁘지 않은 가문으로 시집갔다.
보통 그러면 린덴 자작령도 위세가 커지기 마련이었다.
‘이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아?’
원작에서도 린덴 자작령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스와 관련된 요소는 벤자민이 유일했다.
절대로 등장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허가된 비중은 이 정도만 되는 것처럼.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웠다.
“…….”
글로리아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흔들리는 제 여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청혼서는 너에게 왔었단다, 그레이시.”
“……!”
린덴 자작가가 아니라, 그레이스 린덴을 향해 청혼서가 왔다는 의미였다. 이는 의미가 크게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의 이름이 표기되지는 않았지만, 펠튼 공작가에서는 너를 원했단다.”
“제 이름이 표기되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그레이스는 혼란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청혼서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소공작이시던 각하께서 자작령을 찾아왔거든. 나를 만났을 땐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연회가 끝난 후 너에 대해 말하더구나.”
“왜, 왜요?”
“글쎄……당시의 나도 이상했지만, 너의 행복을 비는 게 우선이었으니.”
이건 어디에서도 알려 주지 않은 정보였다.
‘나를 왜?’
가문의 격도, 외모의 수준도 맞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잘난 구석이 없는 그레이스 린덴을 원하는 이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레이스, 너는 어릴 적 엉뚱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현명한 아이니까 잘 알겠지?”
글로리아는 숨을 죽이며 마주 앉아 그레이스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잡았다.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비밀인 듯했다.
“나중에, 르마네티 남작을 조사해.”
“그 사람이 누군데요?”
뜬금없이 이름을 말해 오는 글로리아의 말에 그레이스가 의문을 표했다. 글로리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