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78)화 (78/131)

78화

“……내 남편. 그 사람.”

‘음?’

“잠깐만요.”

그레이스는 이상한 점을 느끼고, 말을 멈췄으나 글로리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게 붙잡힌 어깨를 통해 느껴졌다.

‘언니의 남편은 분명 파르머 백작이었는데?’

대뜸 현명하니까 잘 알 거라고 말해도, 이 맥락 없는 발언은 그레이스에게 불안감만 안겨 주고 해결해 주는 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한계인 건가?’

그럼에도 이 정도가 글로리아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인 듯했다.

그럼 이쯤에서 그레이스가 유추할 수 있는 가설이 몇 가지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 있는데, 그 일에 르마네티 남작이 연관되었거나 곧 무슨 일이 벌어질 때 르마네티 남작이 연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데 언니의 남편은 르마네티 남작이 아니라 파르머 백작이란 거야.’

파르머 백작에게 작위가 여러 개 있던가?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글로리아가 굳이 르마네티 남작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글로리아의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쥐어 떨어트렸다. 그녀의 손이 차게 느껴졌다.

‘겁먹고 있어.’

“언니, 일단 진정해요.”

비록 그레이스는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글로리아가 최선을 다해 꺼낸 말이었다.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올까요?”

“……괜찮아.”

르마네티 남작, 혹은 파르머 백작이란 사람은 원작에서 등장은커녕 이름조차 나온 적 없었다.

그래서 갑작스레 나온 또 다른 이름은 당황스러운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뜬금없는 인물은 아닐 거야. 언니의 남편이니까, 소설에서는 묘사되지 않은 것뿐일 거야.’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올 터였다.

‘조만간 무슨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날 거야. 그것도 내 신변 주변에.’

글로리아가 그레이스에게 대뜸 말한 것은 원작과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스가 원작과 달리 대외 활동을 하며, 린덴 자작령으로 찾아왔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굳이 르마네티 남작에 대해 조사하라고, 부탁 아닌 조언을 하지 않았겠지.’

“저와 각하가 알아서 할게요.”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언니, 혹시 제가 예전에 언니에게 따로 무언가를 보낸 적이 있나요? 부모님에게 들은 바는요?”

“……무엇을?”

“금, 붙이 같은 거라던가?”

글로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하는 눈치는 아닌데, 그러면 장부에 빈 구멍은 어디로 빼돌려진 거지?’

⋆★⋆

그날 밤, 글로리아가 ‘르마네티 남작’에 관해 말한 이후로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허무해질 만큼 조용했다.

오히려 다음 날, 새벽부터 글로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만나느라 바쁘다는 사유였다.

뿐만 아니라, 자작저에 있는 모두……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스의 가족이 그레이스를 보면 어색하게 눈을 피하거나 조심스러워했다.

지난 저녁에 있던 사건 탓이라고 그레이스는 추측했다.

딱히 괜찮다며 넓은 아량을 베풀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기에 그레이스는 그들이 계속 눈치를 보게끔 두고, 벤자민과 일정을 보내기로 했다.

남은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폭풍전야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부인께서 친구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 없군요.”

“음…….”

생각보다 평화로운 오전, 오늘도 여유롭게 린덴 자작령 밖을 노닐고 있던 중 벤자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사실 친구가 없으니까.’

그레이스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애칭은 그레이시지만 그래서 시시한 그레이스라고 불리는, 그저 이상한 놀림거리였다.

“그리 인연이 오래간 사람이 없네요. 각하께서는요?”

“저 또한 어릴 적 교우관계에서는 그리 오래된 자가 없습니다. 그나마 있다면, 실베스터…… 황태자 전하려나요.”

“……황태자 전하와 그렇게 오래되셨다고요?”

“예, 그분께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뵈었으니 말입니다.”

‘오,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레이스는 처음 듣는 정보에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경청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귀 끝을 약간 붉게 물들며 뒤로 주춤했다.

“그럼 나름 소꿉친구라는 걸까요?”

“뭐, 흠. 큼.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벤자민은 가까이 다가온 그레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럼 샤를 소후작님은요?”

“그 사람은 제가 말하기 부끄러운 시절 만났던 자입니다.”

“오…….”

“……제발 흥미를 갖지 말아 주십시오.”

벤자민의 말이 오히려 그레이스의 흥미를 돋우었다. 벤자민이 생각하는 그의 부끄러운 시절이란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흥미를 갖기 이전에, 이제 제도로 올라가면 저도 사교 활동을 해야 하니까 혹시 가능하다면 각하의 연줄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그레이스의 발언에 벤자민은 매우 놀라우면서도 기꺼운 표정이 되었다.

“사교계에 다시 나가실 생각입니까?”

“네, 각하께서 괜찮다면요.”

그레이스는 처음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 제도 사교계 데뷔에 대차게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차라리 집에 얌전히 있는 게 도움이 된다고 반응해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벤자민은 오히려 그레이스가 활동하길 바라는 듯했다.

‘그리고 샤를 후작가가 어딘지 기억났어.’

샤를 후작가는 제국을 수호하는 검 중 하나였다.

‘펠튼 공작가는 태양을 받치는 나무, 샤를 후작가는 태양을 비추는 호수쯤이었나. 칭호 한번 거창하네.’

몇 세대 전까지는 동부 전체를 호령하며 동부의 끝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타국과 맞서 싸운 가문이었다.

하지만 제국에서만 탄생하는 성녀의 입지가 더욱 튼튼해지고, 날로 발전하는 마도구 기술을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샤를 후작가에서는 예전처럼 무예에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맡은 바라며 여전히 제국의 안전을 위해 검술을 배웠으나, 눈길을 다른 곳에도 돌리기 시작했다.

‘사교계.’

그렇게 제도 사교계의 주축 중 하나가 샤를 후작가가 되었다.

‘벤자민이 샤를 소후작과 사이가 좋다면,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레이스에 대한 소문이 아무리 안 좋다고 해도 권력 앞에서는 대놓고 싫은 소리는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돌려서 꼽을 먹여도 대놓고는 먹일 수 없겠지.’

그리고 그전에 큰 파벌에 속한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각인시켜 주면, 자신들의 편에 넣어 줄 게 뻔했다.

“샤를 소후작 부인이 아이를 가졌으니 조만간 파티를 열 것입니다.”

“베이비 샤워군요.”

조만간 태어날 아이, 임산부의 순산을 기원하는 파티였다. 전통적으로는 임산부나 파티에 초대된 여성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저는 친분이 없으니, 각하에게 부탁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걱정 마십시오. 아마 샤를 소후작에게 말하면 초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와 소후작 부인은 친분이 없는데도요?”

“……소후작 부인은 당신을 꽤 보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저 인사치레라도 기쁘네요.”

험담뿐인 펠튼 공작 부인을 사교계의 주축이 왜 보고 싶어 할까? 보고 싶다 해도 부정적인 호기심일 거라 생각한 그레이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 참.’

“혹시 글로리아 언니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 어렵다면 말고요. 최근 심란해 보여서, 나들이라도 같이하면 좋을까 싶어서요.”

“음…… 글쎄요, 파르머 백작 부인도 소후작 부인과 교류가 없을뿐더러 백작 또한 소후작과 개인적 친분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레이스는 진짜 글로리아를 초대하고 싶어 꺼낸 게 아니었다. 그저 질문을 던지기 위한 미끼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각하께서는 파르머 백작과 만나 본 적 있나요?”

“가끔 있었습니다만, 사적으로는 없습니다.”

‘높은 확률로 황실이나 연회 같은 곳에서 만났나 보네.’

그렇다면 파르머 백작이 글로리아와 결혼한 이유가 펠튼 공작가와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부인께서 파르머 백작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군요.”

“지난밤 언니와 같이 지내다 보니, 언니의 남편에 대해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다지 친분이 없기에 딱 잡아 말하긴 어렵지만, 그자가 현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르마네티 남작은요?”

“르마네티 남작이요? 그런 작위는 들어 본 적 없군요. 어디 지방 귀족인가요?”

“저도 이번에 들어서요. 혹시 각하께서는 아나 싶어 물어봤어요.”

“…….”

‘구리다.’

완전 구린내가 느껴졌다.

‘너무 구린내가 느껴져서 어디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레이스는 그저 본인만 살기 위해 조금 발버둥 치려고 했는데, 물장구 한번 치자 눈앞에서 해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겠냐, 이게 내 팔자지.’

그레이스는 허공을 잠시 보다가 후,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속을 모르는 듯한 반가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저쪽에 그 호수가 있지 않습니까?”

“네? 아, 잘 아시네요?”

린덴 자작령의 유일한 자랑거리, 말도 안 되는 전설이 붙어 있는 호수.

‘뭐였더라, 어떤 병이나 상처든 치료해 주는 거였나.’

어찌나 허황되고 근본이 없는 전설이었는지, 매번 앞에 붙는 수식이나 효과가 미세하게 바뀌곤 했다.

그 탓에 진짜 효과를 믿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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