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3)화 (103/131)

103화

바깥으로 나가자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며, 아까 전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달래 주었다.

그레이스는 문득, 벤자민에게 부탁했던 내용이 떠올라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각하, 제가 각하에게 부탁했던 물건은 두 개인데 보석함은 하나였네요. 하나만 들고 오셨나요?!”

그레이스는 큰 알이 박힌 보석 잔과, 자잘하지만 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를 부탁했다.

“아, 그것은 제가 부인께 또 사죄드려야 할 부분이군요.”

벤자민은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눈을 굴리다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그레이스는 그의 표정을 보며 ‘잃어버렸나?!’ 하고 불안해졌다.

“서, 설마…….”

“예, 신전에 먼저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예상과 전혀 다른 답이 벤자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

“예? 이것을 예상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 아니었는데요.”

“음, 그러면 정정하죠. 부인께선 예상치 못하셨겠지만, 신전에 먼저 들렀습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굳이 정정한 벤자민은, 다소 얼빠진 표정을 한 그레이스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신전에서는 방문 일자를 잡겠다고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신전은 늘 신자들을 위해 문을 열어 두는 곳이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로서 찾아갔지요. 제가 신실한 신자라는 건 온 제국이 아는 사실이잖습니까.”

“그으, 건 그렇죠.”

비록 소설 후반부에서 흑화한 벤자민이 제도에 있는 신전을 터트려 버리긴 하더라도, 그전까지는 신실한 신자다.

“그래서 그냥 갔습니다.”

“대사제님을 만나는 건요?”

“권력에 기대는 발언은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이럴 때만큼은 펠튼 공작이라는 게 참 좋더군요.”

“…….”

맑고 선한 얼굴로 저리 말하니 저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오디오와 영상을 따로 떼어서 붙인 듯한 느낌이었다.

“신전이 정치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운영을 하기 위해선 신전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거나 기부금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제국에 정식으로 기록된 신전의 사업체 중, 적절한 수익을 내는 곳은 없습니다. 물론 종교적 특성상 세금 감면을 받고 있지만, 제도에 저만한 건물을 유지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죠.”

“…….”

“그런 겁니다.”

‘치, 치졸해.’

결국 돈으로 찍어 눌렀다는 거 아닌가?

‘그런데 솔직히 조금 속은 시원하긴 한데…….’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행위를 생각하면, 약간 갑질당해도 싸지 않나…… 하고 못된 마음이 들려다가도 ‘아니 그래도 그건 안 되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불러냈는지만, 들어도 될까요?”

“헌금함에 100만 젠 묶음과 가주 인장을 넣었습니다.”

“…….”

“그리고 기사를 통해 실수로 가문 인장이 들어갔으니 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와 주시더군요.”

100만 젠이면 대체 얼마야. 그레이스는 또 아득해지려던 머릿속을 다 잡았다.

“그래서 만나는 김에 마침 드릴 게 있다며 목걸이도 넘겼습니다. 부인께선 그것을 황제 폐하께서 보는 앞에서 신전에도 건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만.”

“……네, 잘 아시네요.”

어느 곳의 권위가 더 높은지 모르는 이때, 굳이 펠튼 공작가에서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레이스는 차라리 약간 다른 물건으로 비교할 수 없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양쪽에 동시에 선물을 주는 길을 택했다.

하필 신전에 목걸이를 진상하는 것도 ‘태양의 가호’ 때문이다. 아무리 그레이스가 진상한 목걸이가 귀하고 아름답다고 한들, ‘태양의 가호’가 가진 상징성을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부인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여러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것 때문에 가신 거였군요?”

“제가 지금으로서 그것 외에 거길 갈 일은 없잖습니까?”

벤자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꽃이 만개한 정원 쪽으로 그레이스를 이끌었다.

“부인께 무례하게 군 신전 기사와 사제는 전부 남부 끝의 신전으로 이동한다고 하더군요. 사실상 강등입니다. 또한, 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신전에서 뵙고 싶다고 하였고…….”

“…….”

“전 보고 싶다면 직접 오라고 하였습니다.”

“예?”

“아쉬운 자가 움직이는 법입니다. 어딜 감히 제 부인에게 오라 가라 합니까?”

벤자민은 하하 웃으며 명료하게 말했다. 어딘가 속이 시원해 보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렇겠지요. 신전의 사제가 저택을 방문한 적이 없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라고 못 올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말에 잠시 의아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뿌연 머릿속, 울렁거리는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으, 으윽.”

머리가 울렁거리고, 땅이 흔들거리며 눈물이 아롱지듯 시야가 흐렸다. 누군가가 억지로 묶어 놓은 기억이 표면에 슬슬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부인?”

뿌연 시야, 그럼에도 그곳이 어딘지 그레이스는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제 별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검은 안개는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녀의 근처에 앉아 있는 하얀 옷을 입은 인영도 검은 안개가 드문드문 탐내었으나, 어째서인지 다가가지 못했다.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레이스 주변에 있는 검은 안개는 점점 강해졌지만…….

‘왜?’

그레이스의 얼굴은 점점 더 평온하고, 고요해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전혀 기억에도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떠올린 그녀를 벤자민이 부축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조금씩 흘리던 그녀는 괜찮다고 말해야 했지만 입술 끝이 떨려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나, 나는…….”

그때, 저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이의…… 그러나 그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슬프고 절망스러운 목소리였다.

“……성녀님 목소리 같아요.”

“부인.”

“저기로, 저기로 가 봐요.”

“부인!”

순간,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터져 나왔다. 결국 전개를 또 막지 못했어. 어떻게 해도 큰 흐름은 막지 못한다는 거야? 왜?

‘그럼 나는 진짜로, 결국 죽는다는 거야?’

죽고 싶지 않아.

절망적인 생각이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벤자민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이 몸도 점점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게 되는가? 발버둥 쳐도 지정된 미래로 나아가는 것만 같아 끔찍했다.

방금 갑작스레 떠오른 이상한 기억보다도 이 사실이 더 끔찍했다.

<죽어.>

<죽어 버려.>

<그게 모두를 위하는 거야.>

<네가 죽어야 모두 행복해질 수 있어.>

짐덩이, 문제만 많아 가지고, 주변을 귀찮게 만드는 쓸모없는 것!

한동안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검은 안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리는 것인지, 그레이스는 이것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부인!! 진정하십시오!”

그런 그레이스의 머릿속 소리를 흐트러트린 것은 벤자민의 격양된 소리였다.

“가, 각하?”

“제가 보기엔 부인도 괜찮지 않습니다!”

“하, 하지만 성녀님께서…… 성녀님은 이 제국의…….”

“예, 성녀님은 이 제국의 하나뿐인 보물이시지요. 중요한 거 압니다. 그러면 부인은요?”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양 어깨를 잡고, 몸을 낮춘 채 목소리를 줄였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게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지독한 슬픔이 보였다.

“부인께서는 하나뿐인 제 가족이지 않습니까…….”

“…….”

“저는 당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 그것만이 있을까? 벤자민은 그 외의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그제야 진정하고, 숨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저, 저기에는…… 기사가 아무도 없어요. 도움을 요청, 할 수가 없을 거예요.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레이스의 말에 벤자민이 그제야 몸을 세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원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 주변도 없는 것 같군요.”

벤자민과 그레이스는 산책을 하며 생각보다 안쪽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둘 중 한 명이 안쪽의 상황을 살펴보기엔 그레이스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단 함께 가서 보도록 하죠.”

한 번의 비명 후로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벤자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레이스를 번쩍 안아 들고 비명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서둘러 갔다.

“그, 제, 제가 걸을 수…….”

“안 무겁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

그레이스는 아무 말 없이 벤자민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체온이 곁에 있으니 확실히 점점 빠르게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흑, 흐윽…… 흐으으, 어, 어떡…….”

점차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벤자민의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고 그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어 보려고 하자, 벤자민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눌렀다. 보지 못하게끔 저지하는 행동이었다.

“괘, 괜찮아요.”

“…….”

벤자민은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그레이스를 내려 두고, 아리아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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