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6화
어느새 손정은 넋을 잃고 대로를 지나가는 무림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현은 그런 손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림인이 꿈이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저 표정을 보니 정말 무림인을 좋아하기는 엄청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구경은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사실 손정과 함께 구경하던 마현은 약간 실망했다.
당장은 그들의 일검(一劒)도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서늘해질 만큼 시린 느낌을 주는 무림인도 없었다.
서서히 흥미가 사라진 마현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아, 가야지?”
“으, 응?”
여전히 무림인들 구경에 정신을 빼앗긴 손정의 대답은 그저 반작용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가자.”
마현은 그런 손정의 어깨를 툭 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손정은 기지개를 쭈욱 펴며 어기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보아하니 일어나기 싫은 모양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눈치였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일어난 손정을 보며 마현은 그들의 구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쿵!
커다란 대로를 가로질러 가던 마현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발걸음을 딱 멈췄다.
부들부들.
마현은 고뿔에 걸려 오한이라도 오는 것처럼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순간 마현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감을 느꼈다. 어떤 무형이나 유형적 압박에 의해 생긴 공포심은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본능적인 거부감에서 생기는 공포감이었다.
어딘가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자신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빛의 마나였다.
아니 빛의 마나와는 조금 달랐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확실한 것은 백마법사들의 빛의 마나처럼 어둠의 기운을 억누르는 성질을 가진 마나라는 점이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느새 등은 식은땀으로 인해 축축이 젖어 있었다.
꿀꺽.
마현은 힘들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십여 명의 특이한 복장을 한 사내들이 대로 한가운데를 걸어오고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찬 것으로 보아 무림인임에 틀림없다.
더불어 같은 복장을 입은 것으로 보아 손정이 말했던 어느 문파의 무림인인 듯했다.
“우와! 무, 무당파 도사들이다.”
그런 마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정은 그 무리를 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현아, 나 처음 봐! 저들이 말로만 듣던 무당파 도사들이야. 저기 검과 소맷자락에 새겨진 태극 보이지? 저게 무당파를 상징하는 무늬야. 우와, 멋있다.”
손정은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황홀한 눈빛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무당파 도사들을 쳐다봤다.
마현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당파라면……, 천존을 모신다는 신관기사?’
마현은 애써 눈을 돌리며 가빠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더 이상 그들을 보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허억, 허억. 휴우…….”
가까스로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다. 그런데 마현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
조금 전 심장이 타버릴 듯한 공포를 느꼈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마현은 공포에 움켜쥐었던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더욱 꽉 쥐었다.
긴장감과 환희가 뒤섞인 묘한 눈동자를 한 마현은 무당파 도사들이 오는 대로(大路)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로 끝으로 여유롭게 섭선을 천천히 부치며 걸어오는 중년 서생 보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평범한 서생으로 보이겠지만 마현에게는 아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가 그의 몸에서 느껴졌다.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 원초적인 향기.
바로 어둠의 마나, 마기였다!
* * *
무당파 제일의 검수(劒手).
무림에 알려진 청명진인의 별호는 무당제일검이다.
현 무당파 장문인과 같은 ‘청’자 항렬 중 제일 막내인 그는 다른 사형들이 장로의 신분인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진무각(進武閣)의 각주로 있었다.
그는 사형들과 10년 이상 나이 차가 있지만, 그 때문에 장로가 되지 못하고 한 단계 아래 배분인 ‘학’자 항렬과 함께 각주 자리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진무각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진무각이 어떤 곳인가?
진무각은 무당파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무공서와 무당파 제자들의 무공 전수를 총괄하는 곳이었다. 더불어 무당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제자들을 따로 모아 무공을 하사하는 곳이기도 했다.
진무각주는 무당파 내에서 단지 배분만 높다고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오직 무당제일검의 호칭을 가진 도인만이 앉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 때문에 진무각주의 권위는 여타 장로들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다.
또한 무당파 주요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에 장로들과 나란히 참석하며, 그 발언권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말만 각주이지 실상은 장로나 다름없는 위치였다.
무당파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그 자리에 40대 초반에 오른 것이 바로 청명진인이었다.
이번 행차는 진무각주에 임명된 후 근 5년간 한순간도 쉬지 못한 청명진인을 위해 장문 사형인 청하진인이 휴양을 권해서 나서는 길이었다. 더불어 곤륜파에 가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 여행길이 불편하지 않도록, 경험도 쌓게 할 겸 열 명의 ‘송’자 항렬 무당파 제자들까지 함께 내보냈다.
여유로운 행보였기에 청명진인은 느긋한 마음으로 열 명의 사손들을 이끌고 사천성 성도로 들어섰다.
특히 이번에 청명진인을 따라나선 열 명의 사손들은 무당파에 입문한 뒤 모두 도인의 호칭을 받고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 그들을 배려해 굳이 발걸음을 서둘지 않았다. 산문 밖 세속의 바람을 충분히 쐬게 해줄 생각이었다.
청명진인은 가슴을 쭉 펴고 보무도 당당하게 뒤를 따르는 어린 사손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깨물었다.
문득 젊었을 적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과거의 자신 역시 첫 외출 때 한껏 가슴을 펴고 걸었었다. 다른 이들이 눈에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랑스러운 무당파 도인임을 뽐내며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당시 함께 나왔던 스승님에게 얼마나 큰 꾸중을 들었는지, 새삼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런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서인지 청명진인은 멋을 부리며 걷는 그들의 걸음에 대해 굳이 타박하지는 않았다.
물론 저녁에 따로 모아 따끔한 언질을 주겠지만, 지금만큼은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었다.
그렇게 사천성 성도 번화가 대로를 걷던 청명진인의 눈에 두 명의 거지 아이가 보였다.
그들은 대로 한가운데에서 길을 비키지 않고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옆으로 치울까요?”
사손 하나가 다가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어왔다.
“어허! 어찌 천존님의 말씀을 행하는 도인이라는 자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이 없음을 어찌 모르느냐.”
청명진인의 질책에 그 사손은 찔끔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는 아이들을 보던 청명진인은 찰나이지만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두 아이 다 좀처럼 보기 힘든 좋은 근골들을 가졌다.
근골로만 따진다면 자신을 보고 벌벌 떠는 아이가 더 좋았지만 성정이 그다지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들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떠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심약한 아이라고 청명진인은 짐작했다.
반면 그 아이에 비해 근골은 조금 떨어지지만 자신을 보고 떨기는커녕 호기심과 동경이 가득한 눈망울로 쳐다보는 아이는 성정이 매우 뛰어나 보였다.
어린아이라면 자신들을 보고 겁먹지는 않더라도 움찔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무각주로 있으면서 생긴 버릇일까?
청명진인은 별 생각이 다 든다면서 옅은 웃음을 내뱉었다.
“대사숙님, 관심이 가는 아이들입니까?”
송천이라는 사손이 다가와 물었다.
‘송’자 항렬에서 제법 두각을 나타내는 무당파 제자였다.
“아니다.”
청명진인은 송천의 말을 들으며 두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대사숙님께서도 슬슬 제자를 맞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자라…….”
청명진인은 다시 한 번 두 아이를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두며 나직이 말을 되씹었다.
청명진인은 진무각주로 있으면서 수많은 무당파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정식제자는 아직 없었다.
진무각주의 일로 무당파 제자들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제자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무당파에서 제자를 맞이하겠다고 한다면 수많은 제자들이 앞뒤 제쳐두고 달려올 것이다.
“제자라…….”
청명진인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다시 한 번 되씹었다.
제자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제자를 생각할 시간의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고 진무각주의 일을 수행한 것인지 송천의 말에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제 나도 슬슬 제자를 받아들일 때가 된 건가?’
안 그래도 요즘 사형들이 자신이 제자를 하나라도 들였으면 하는 눈치를 자주 주곤 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당파에서 뛰어난 아이를 선별해서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만약 청명진인이 제자들을 받아들인다면 무당파 내에서 뽑을 생각은 없었다.
스승이 청명진인 자신을 외부에서 발탁해 가르친 것처럼 근골이 좋고, 심성이 곧은 아이를 골라 처음부터,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치고 싶었다.
실은 그리 근골이 좋지 않아도 된다. 자신만 해도 어릴 적 근골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만큼 스승이 더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자신을 이만큼 키워준 것이었다. 자신이 제자를 기른다면 그런 스승의 사랑을 대물려 주고 싶은 것이었다.
‘슬슬 제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겠지.’
불현듯 찾아온 제자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든 청명진인의 눈에 저 멀리 다가오는 한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푸른 비단으로 만들어진 학사의(學士衣)에 멋들어진 수묵화가 그려진 섭선을 살랑살랑 부치며 여유롭게 걸음을 내딛는 자의 얼굴을 보자 청명진인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저, 저자는?’
5년 전 진무각주가 되기 전 한창 무림에서 이름을 날릴 때 한 번 부딪힌 적이 있었던 자였다.
“……염라서생 허진.”
청명진인의 머릿속에서 두 아이와 제자에 관한 생각은 이미 지워졌다.
청명진인은 오로지 앞으로 걸어와 한 자가량 거리를 두고 멈춘 염라서생 허진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오랜만이오, 염라서생!”
뒤에 따라오던 사손들은 그 별호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염라서생 허진.
결코 무림에서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십만대산 마교의 부교주였다.
염라서생 허진은 다른 마인들과 달리 마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자였다. 서생이나 학사들이 입는 옷을 즐겨 입으며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는 자였다.
또 마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넓어 무림인이 아닌 일반 범인들에게는 그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살수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무림인을 대할 때는 달랐다.
염라서생 허진이 마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역시 엄연한 마인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덤비는 자들은 가차 없이 손을 썼다. 특히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면 그 누구도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염라서생 허진은 청명진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긴장한 탓일까?
챙 챙 챙 챙 챙!
무당파 제자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며 내력을 발산시켰다.
그 순간!
휙 휙 휙―, 착착착!
몇 줄기 하얀 그림자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 하얀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염라서생 허진 뒤에 내려서며 강렬한 마기를 내뿜었다.
‘유령대!’
청명진인은 염라서생 허진 뒤로 선 복면에 하얀 피풍의를 입은 자들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교 부교주 염라서생 허진의 직속 무력단체인 유령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