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1화
쾅!
새하얀 손이 서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제자? 아버지께서?”
한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크게 소리쳤다.
“제자를 또 받아들이시겠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격노하는 사내는 마교 교주 철혈마제 사공소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제자 신분으로 있는 사공찬이었다.
교주 사공소에게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대(大)공자 웅천마군(雄天魔君) 추도영, 이(二)공자 독혈마군(毒血魔君) 사공찬, 그리고 막내이자 삼(三)공자인 귀영마군(鬼影魔君) 도종극이 그들이었다. 셋 모두 현재 공석으로 비어 있는 소교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렇다니까요, 사형.”
격노하는 사공찬 앞에서 사기(邪氣) 가득한 눈동자를 빛내며 앉아 있는 이는 삼공자 도종극이었다.
“도대체 사부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 하셨는지…….”
도종극은 슬쩍 사공찬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니 절로 도종극의 입 언저리가 뒤틀렸다.
“제가 오죽했으면 사형을 찾아왔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무뚝뚝한 대사형을 찾아갈 수도 없고. 이사형도 답답하겠지만 저 역시 이사형 못지않게 답답합니다.”
“시끄럽다!”
사공찬은 짜증스레 소리치며 도종극을 노려봤다.
그러자 도종극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나! 그나마 의논이라도 하자고 찾아온 내가 바보지. 하지만 이사형,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비록 우리가 소교주 자리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다지만 가끔은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요. 미리 말씀을 드리는데 당분간 우리는 한편입니다.”
“갈!”
마기를 내뿜으며 사공찬이 일갈했다.
“내가 너와 손을 잡을 것 같으냐! 그런 피라미 녀석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
도종극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사형.”
“누가 이사형이라는 것이냐! 나는 사형도 사제도 없다.”
“알겠습니다. 그 말 꼭 되씹어 머릿속에 새겨두죠.”
차가운 눈빛으로 사기를 내뿜던 도종극은 몸을 홱 돌려 사공찬의 방을 빠져나왔다.
처소로 돌아가며 도종극은 생각했다.
‘정말 대사형은 대단해……. 이사형의 행동을 완벽히 예상했어. 이걸로 마현인가 뭔가 하는 놈은 사공찬이 알아서 할 테고, 난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흥분한 사공찬의 얼굴이 생각나자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멍청한 놈. 조금만 더 냉정해지면 우리보다 소교주 자리에 더 유력하다는 것을 모르는군. 훗, 사실 뭐 그런 모습이 우리가 원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대사형은 쉽지 않은 상대야.’
대사형 추도영을 떠올리자 도종극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마웅총.
아무리 마도 역사상 한 획을 그은 네 영웅이 묻힌 영광스러운 성지라고 해도 무덤가는 무덤가다. 밤이 되어 음산한 사기가 맴돌기 시작하자 마웅총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스산해졌다.
부엉이의 울음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마웅총 안으로 마현이 들어섰다.
화려한 비석 등으로 꾸며놓은 네 개의 거대한 봉분이 눈에 들어왔다. 마현은 천천히 걸으며 봉분 네 개에 세워진 비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개벽권마(開闢拳魔) 맹우림, 파천검마(破天劍魔) 예파흔, 무적창마(無敵槍魔) 지일산, 그리고…… 광풍도마(狂風刀魔) 사극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인들이었지만 그 이름값에 비해 별호가 너무 초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웅총 중앙에 새겨진 글귀를 읽자 마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마도 영웅 중 가장 먼저 활동했던 개벽권마 맹우림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개벽권마 맹우림은 비록 자신이 마교 교주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게 되었지만 감히 교인으로서 교의 상징이자 주인인 마교 교주의 별호와 동급인 ‘황(皇)’자나 ‘제(帝)’자를 사용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개벽권마라 칭했다.
그게 효시가 되어 파천검마 예파흔, 무적창마 지일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광풍도마 사극유까지 스스로의 별호에 ‘황’자와 ‘제’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별호라는 것이 아직 생소하지만 그저 그런 허명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자신 있다는 소리였겠지.’
마현은 마도 영웅의 봉분을 다 둘러본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살짝 긴장한 탓이다.
데스나이트를 깨우는 흑마법은 어렵지 않다. 그들이 죽어 남긴 육신의 흔적에 영혼을 불러 다시 강제로 결합시키면 된다. 흑마법사의 길에 들어선 자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데스나이트를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하지만 방법이 쉽다 해도 아무나 그들을 깨우지는 못한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데스나이트를 깨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오로지 복종심만 주입시켜 깨우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최대한 복종심을 최소화하고 생전의 기억 그대로 온전한 이성을 가진 채 깨우는 방법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지운 복종심만 가득한 데스나이트는 부리기엔 좋으나 스스로의 사고력이 없어 그냥 단순히 힘만 좋은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탓에 처음 길고 긴 어둠에서 깨어났을 때 곧바로 주인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때 데스나이트는 마법을 시전한 자가 자신보다 약하면 단숨에 달려들어 죽여 버린다.
지금 마현이 첫 번째 방법으로 네 명의 마도 영웅을 깨운다면 죽는 것은 기정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만에 하나 어떻게 수를 강구해 자신을 주인으로 인식시킨다고 해도 얻는 것이라고는 단순히 힘만 좋은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마현은 이성을 지우지 않은 채 두 번째 방법으로 그들을 깨우려고 한다.
마현이 그들을 깨우려는 일차적 목표는 그들이 가진 지식, 정확하게는 최고의 마공심법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성이 살아 있다고 해서 소환자의 목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이성을 가진 채 데스나이트로 깨우는 것이다.
보통 데스나이트로 소환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사들이고 기사들이다.
그런 그들이 깊고 깊은 어둠에서 깨어났다고 해도 마현에게 넙죽 엎드려 어둠의 기운에 기대 충성을 맹세할 리 없다. 그들의 자존심은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높아 자신을 깨운 것이 별 볼일 없는 자라면 망설임 없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은 힘에, 이성을 가지고 있어 본능에만 의지해 마구잡이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수의 조합이 정확하다. 더욱이 데스나이트로 깨어난 터라 웬만한 공격에는 상처조차 받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훨씬 강한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또 소환자가 그 기사에 버금가는 힘이 있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고 쳐도 한 가지 과제가 더 남는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어설프게 데스나이트를 불렀다가 죽음을 당한 흑마법사가 부지기수다. 그 후 데스나이트를 소환하는 일은 최소 6서클 이상이라는 암묵적 한계가 정해졌다.
그 정도는 되어야 그들을 소환해 수족으로 삼지는 못해도 적어도 죽지 않을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마현은 목 언저리를 손으로 만지며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마기의 양이 적은 것이 내 목을 지켜주는군.’
이제 갓 3서클에 올라선 마현이 데스나이트를 무리하게 소환하려는 이유는 바로 마기의 양 때문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이제껏 풍부한 마기를 가지지 못해 답답해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적은 마기로 인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마현이 지닌 마기로 데스나이트를 깨운다면 그 시간은 고작 길어야 2분이 조금 안 될 것이다. 그 정도로는 사실상 그들을 깨우기에도 벅찬 시간이었다.
그들은 깨어나 마현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마기가 끊겨 다시 깊고 깊은 어둠으로 강제 귀환될 것이 분명했다.
무모하지만 마현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 데스나이트를 소환해 계약식이 시작되면 그것을 인위적으로 중간에서 멈출 수가 없다.
계약식의 주체인 흑마법사가 강제로 도중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마현은 강제로 마기가 끊어진다.
가진 마기의 양이 일천했기에.
‘한 번 영원한 어둠에서 깨어난 자는 다시 영원한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나 역시 한 번 죽어봤으니까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안다.’
깨어났다가 다시 어둠 속에 잠들면 그들은 세상에 나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마현이 깨우는 그들은 살아 있을 적 온전한 이성 그대로 깨어날 테니까.
‘어차피 나는 죽지 않는다.’
당분간은 그들을 몇 번이고 소환한다 쳐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2분이 채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끝내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더는 소환하지 않으면 된다. 결국 의식을 마치지 못한 채 영원히 봉인해 버리면 된다는 소리다.
마현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며 세 개의 서클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다음 내공을 이용해 자그만 마법진을 허공에 그렸다.
단순히 데스나이트를 깨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마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3서클에 오른 마현도 어렵지 않게 허공에 연속으로 네 개의 마법진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마법진이 완성된 후 마법진에 불어넣는 어둠의 기운, 즉 마기였다.
마현은 긴장감이 묻어난 얼굴로 마기를 끌어올려 마법진에 주입했다. 그러자 희미한 빛을 머금던 마법진이 어둠보다 더욱 진한 색으로 새까맣게 변했다.
“크으으으…….”
근 일 년 동안 모은 마기가 순식간에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기의 양이 충분치 않은 마현은 재빨리 마법진을 네 개의 봉분 위로 날렸다. 자그맣던 마법진이 봉분 위로 날아가 내려앉자, 주위의 사기들이 몰려들었다.
‘빠, 빨리!’
2분가량은 지속되리라 여겼던 마기는 금세 고갈되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가며 끊임없이 마법진을 향해 마기를 주입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마법진과 네 구의 시체와의 공명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마기뿐만 아니라 내력까지 서서히 고갈되어가자 마현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현의 눈에서도 초조함이 생겼다.
그 순간!
우우우웅―
마현의 서클과 봉분에서 동시에 작은 울림이 터져 나왔다.
‘됐다!’
공명이 된 것이다.
“어둠의 신 키야…….”
반사적으로 마법 주문을 읊던 마현은 낯을 찡그리며 얼른 입을 닫았다. 하지만 눈빛을 반짝이며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어둠의 기운의 주인인 나 마현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깨운다. 일어나라, 어둠 속에서 깊이 잠든 전사들이여!”
쑤아아아악!
마현의 몸에서 검은 빛이 솟아났다.
“컥!”
주체가 어둠의 신이자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 키야가 아닌 마현 자신이 되자 마현의 모든 마기가 뿜어져 나와 봉분 위로 쏟아졌다. 그 충격으로 마현의 입가에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쿠구구구국―
마현의 모든 마기를 흡수한 봉분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하얀 뼈가 위로 불쑥 튀어 올라왔다. 이내 각 봉분마다 네 구의 해골이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