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4화
술잔을 나누던 허진이 살짝 사공소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령유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마현 그 아이를 데려와라.”
“명!”
령유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는데 사공소가 손을 들며 허진을 말렸다.
“됐네. 이미 명을 내렸으니까. 쇠뿔도 단숨에 빼라고 하지 않았나? 내 여기 오면서 그 아이를 찾아오라 시켰네.”
“아, 그러셨습니까.”
허진은 가벼운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속하,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금세 령유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느긋한 자네가 이리도 서두르는 것을 보니, 제안을 안 했으면 본좌에게 반기라도 들었을 것 같군 그래.”
사공소의 농에 허진은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늦어지는군.”
사공소가 허진의 방을 방문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예상대로라면 벌써 마현을 찾아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교내이니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찜찜했다.
“수혈(首血)!”
사공소는 조금 언짢은 목소리로 자신의 수신호위인 십혈수마(十血守魔)의 수좌 수혈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몸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수혈이라 불린 사내의 음성이 허진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음성 역시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마현이라는 아이를 데리러 간 것은 어찌 되었나?”
“방금 그 아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 주군.”
“알았다.”
비록 늦었지만 이곳으로 온다는 말에 사공소의 언짢았던 마음은 어느 정도 풀렸다.
“기대되는군. 그 아이가 본좌를 택할지, 아니면 부교주 자네를 택할지 말이야.”
사공소는 느긋한 모습이었지만 허진의 얼굴에는 다시 어색한 웃음이 감돌았다. 허진은 그동안 살아오며 이렇게 어색한 표정을 풀지 못한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시 후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속하 십혈(十血)이옵니다.”
“들라.”
문이 활짝 열리고 한 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교주 사공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십혈수마의 철칙에 따라 마현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불을 켜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단둘이 달빛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일 때와는 달리 마현이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허진의 명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와 방 안 곳곳에 놓아둔 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어두웠던 방 안이 촛불로 인해 환해졌다.
어둠이 가시고 안으로 들어온 마현의 모습이 확연히 들어오자 사공소와 허진의 안색이 돌변했다.
파리한 얼굴.
피에 젖은 옷.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붕대.
그리고 그 붕대에 은은히 배어 물든 붉은 핏자국.
“무슨 일이냐?”
사공소의 목소리에는 격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비록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지 않았다지만 오늘 교주 자신이 마현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가벼운 상처도 아닌 중상을 입고 자신 앞에 나타났다.
“십혈!”
허진과 있을 때 다정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한없이 무겁고 냉정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
곧바로 나와야 할 십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감히 어느 놈이 본좌의 뜻을 거스른 것인가?”
사공소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이공자와 충돌이 있었습니다.”
십혈의 목소리에 사공소뿐만 아니라 조용히 앉아 있던 허진까지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찬이를 말하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공찬의 이름이 거론되자 사공소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실망스러운 음성이 씁쓸하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지금 마의당(魔醫堂)에 계십니다.”
“마의당?”
마의당이란 말에 사공소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의독노조(醫毒老祖) 가릉 당주께서 이공자를 살피고 계십니다.”
“뭐라, 가 노(老)가?”
사공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아무리 중한 환자가 마의당에 실려 온다고 해도 웬만해서는 가릉이 직접 나서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아주 중한 환자이거나 아니면 흥미로운 환자였을 때만 움직였다.
“부교주, 이야기는 잠시 나중으로 미뤄야겠네.”
사공소는 허진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지만 사공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허진의 눈에 측은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강한 아버지이기에 아들을 더욱 강하게 키워야 하는 사공소, 그런 기대감을 알지 못한 채 몸부림치는 아들 사공찬.
언제부터인지 그 두 부자는 어긋난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일대로 파인 그 어긋난 감정의 골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였기에 아들이 다쳤다는 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아마 마의당에 가서도 사공소는 사공찬을 보지 않고 돌아서 나올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감히 신하이지만 사공소를 보는 허진의 눈동자에 측은함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그런 감정을 완전히 지우고 허진은 시선을 돌려 마현을 쳐다봤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검에 베인 윗옷을 보건데 옆구리에, 그리고 가슴에 중한 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몸은 괜찮으냐?”
허진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지만 마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을 자근자근 씹는 얼굴에는 지독한 패배감과 함께 복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나 주먹을 꽉 움켜쥐었는지 손바닥은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대단하군. 고작 입마관을 졸업한 녀석이 사공찬을 마의당으로 보내다니 말이야.’
교주는 놀라 마의당으로 뛰어갔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사공찬이 그리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무리 가릉이 전전대부터 마의당 당주 자리를 지켜와 사공소의 말에도 콧방귀를 뀐다지만 교주의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상처가 중하든 중하지 않든 사공찬을 돌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마의당으로 뛰어가는 사공소 역시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깨달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진은 그저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보며 분노로 가득 차 몸을 떨고 있는 마현을 쳐다봤다.
지금 이 순간 허진뿐만 아니라 누가 와서 말을 건다고 해도 아마 마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질도 자질이지만 누구보다 약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현의 모습은 더욱 허진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제자로 삼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사공소의 말이 떠올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마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허진을 쳐다봤다.
“부교주님.”
그 목소리에 허진은 마시려고 들었던 술잔을 내리고 마현을 쳐다봤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마현의 눈에서 갈등하는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쳐다만 볼뿐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
여전히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목젖이 크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마현이 입을 열었다.
“부교주님의 제자가 되면…….”
허진의 두 눈동자가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최고의 마공심법을 익힐 수 있습니까?”
퍼석!
그 순간 허진이 잡고 있던 술잔이 그의 손 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 * *
마현은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사공찬을 떠올리자 몸도 떨리고 심장도 떨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지독한 패배감이 이 같은 분노의 감정을 일으킨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렇게 약해진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리고 사공소와 허진이 있는 이 방으로 들어서면서 느꼈다.
사공찬의 말대로 자신이 죽지 않는 이상 제자 자리를 거부할 수 없음을. 그렇다면 반드시 사공찬과 다시 부딪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상태로 다시 그와 부딪친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감히 자신에게 검을 들이민 자, 사공찬을 죽일 수 없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솟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빨리 힘을 키워야 했다.
언제 다시 그를 만날지 몰라도, 다시 만나는 날 이처럼 또 패배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검을 든 죄를 물어, 반드시 죽여야 했다.
내공심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데스나이트를 깨웠지만, 그들에게서 내공심법을 알아내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그들의 손에 살아남아야 하며, 또한 살아남더라도 굴복시켜야 한다.
긴 시간을 내다보고 그들을 깨운 것이지 단시일에 마력을 키우고 서클을 늘리려 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시일에 힘을 길러야 한다.
적어도 5서클까지는 반드시!
마현은 고개를 들어 홀로 남은 허진을 쳐다봤다.
스승 같은 존재를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힘없이 누군가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마현은 허진을 쳐다보며 말하려 했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현은 바싹 마른 목을 마른침으로 적시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떠 허진을 쳐다봤다.
“부교주님의 제자가 되면…… 최고의 마공심법을 익힐 수 있습니까?”
퍼석!
그 순간 허진이 잡고 있던 술잔이 그의 손 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잔이 깨지며 술이 탁자와 옷을 적시는 것도 모르는 듯 허진은 한동안 마현을 쳐다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허진의 눈에 열린 문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마의당에 갔던 사공소였다.
막 입을 열려는 허진을 향해 사공소는 손을 들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인연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 했던가?’
사공소는 자신을 보필하는 호위부대인 수마대(守魔隊) 대주 막자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아이의 몸이 괜찮아지면 부교주와 함께 본좌에게 찾아오라 전하라.”
“예, 주군.”
수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사공소는 문득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훗, 오늘밤 달을 벗 삼아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은 부교주가 아니고 본좌군.’
사공소가 가고 활짝 열렸던 문이 조용히 닫혔다.
허진은 문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마현을 쳐다봤다.
“내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예.”
“이공자에게 당한 것이 어지간히도 억울한 모양이구나.”
허진은 뒤틀리는 마현의 눈매를 보고는 입술 끝으로 피식 웃었다.
“최고의 마공심법을 익힐 수 있느냐고 물었냐?”
“예.”
“너의 관심사는 오로지 심법뿐이구나.”
허진은 입마관에서도 유달리 심법에만 매달렸던 마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느냐?”
“…….”
그 질문에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마현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허진의 눈동자에 언뜻 서운함이 내비쳤다.
“네 눈빛을 보니 다른 걸 가르쳐 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구나.”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때가 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마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