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5화
“정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일단은 그럴 수밖에.”
허진은 의자를 하나 가져와 마현 앞에 놓고 앉았다.
“최고의 마공을 원한다면 잘못 찾아왔다. 최고의 마공은 교주님의 천마지공(天魔之功)이다. 하지만 마공심법만을 놓고 따진다면 본좌의 마공심법 역시 천마지공에 뒤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허진은 의자에 앉은 채 마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좋다면 구배지례를 하거라.”
허진의 말에 마현은 고개를 들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마현은 허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지상 최고의 마공이라 해도 당장 익히지도 못할 마공을 바라보며 교주님의 제자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마현은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큰절을 아홉 번 올렸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허진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지만 그를 향해 올리는 아홉 번의 절은 정성을 다했다.
과거 한 번의 배신으로 사제지간에 대한 불신감이 여전했지만 제자로서 최소한의 예의라 여겼다.
“이리로 앉아라.”
허진은 마현을 맞은편 의자에 앉힌 후 자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탁 서랍에서 목함 하나를 꺼냈다.
허진은 서탁 위에 올려진 목함을 잠시 내려다봤다.
어쩌면 영원히 서랍 밖으로 나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목함이었다. 그걸 꺼내니 마음 한편이 싱숭생숭했다.
‘절기도 전수받지 않는 제자라…….’
남들은 자신의 절기를 전수받지 못해 안달인데 제자가 되겠다는 마현은 오로지 마공심법만 원할 뿐이었다. 또 그런 마현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과 마현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묘한 사제지간이 되어 버렸다.
쓴웃음을 지으며 허진은 목함을 집어 들고 탁자로 걸어가 마현 앞으로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부교주님.”
“스승님이라 불러라.”
“죄송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스승님?”
마현은 허진의 말에 다시 그에 대한 호칭을 정정했다.
“본좌는, 아니 이 스승은 약한 제자를 용납하지 못한다.”
허진은 진지한 눈으로 마현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뜻이 완고한 듯하여 일단 네 뜻대로 잠시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네가 내 생각만큼 강해지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너는 무조건 나의 뜻에 따라 이 스승의 모든 것을 전수받아야 한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허진으로서는 최대한 양보를 한 것이었다.
“약속하겠습니다.”
마현이 왜 모르겠는가?
잠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봐도 지금 자신이 상당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허진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준 것이다.
“열어보아라.”
허진의 말에 따라 마현은 목함을 열어보았다.
책자 몇 권과 자그만 목함이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이 스승의 마공이 담긴 무공서와 본교 비전 영약인 마령단(魔靈丹)이다.”
허진의 말을 들으며 마현은 목함 안에 들어 있는 자그만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이것이 너에게 일 갑자의 마력을 줄 것이다.”
영단을 보자마자 마현의 서클 내에서 잠들어 있던 마기가 꿈틀거렸다. 엄청난 양의 마기를 가진 영단임에 틀림없었다.
“그 서책들 안에 네가 원하던 마공심법이 있다.”
마현의 눈에 서책들 가장 위에 놓인 마라역천공(魔羅逆天功)이 들어왔다.
“일단 나머지는 봉인을 해두겠다.”
허진은 마라역천공 아래 놓인 책자들을 가져가 품에 넣었다.
“이 스승은 네게 실망했으면 싶구나.”
가볍게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마현은 그 말이 허진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휴우…….”
마현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온 것이다.
“스승 역시 말재주가 없고, 네 녀석도 그러니 마지막으로 짧게 한 마디만 더 말하겠다. 스승은 아비요, 제자는 자식이다. 그것만 지키자구나.”
“…….”
허진의 말이 비록 딱딱했지만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다. 마현은 처음으로 허진의 무공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다. 일단 그곳까지는 걷자. 그 후 일은 그때 생각하자.’
마현이 생각을 정리할 때쯤 허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아, 저기 양탄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거라. 마라역천공의 첫 길은 이 스승이 열어주마.”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
“제자의 절을 다시 받아주십시오.”
“절을?”
허진의 되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현은 다시 정성을 다해 아홉 번 절을 올렸다. 제자가 되어 스승의 온전한 절기를 전수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마공심법만 가져간 죄송스러운 마음에 다시 절을 올리는 것이다.
비록 미래에는 어쩔지 몰라도 진심 어린 허진의 목소리와 말에 꽉 닫힌 마음의 문을 다시 한 번 열어보고 싶었다. 노력하고 싶었다.
“……녀석.”
허진 역시 마현의 절에 담긴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자 섭섭하고 씁쓸하던 눈빛이 조금이나마 희석되었다.
“마라역천공 책자는 품에 넣고 마령단을 가지고 저기 양탄자 위로 올라가 앉아라.”
“예, 스승님.”
마현은 허진의 말에 따라 방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깔린 푹신한 양탄자 위로 걸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령단을 먹은 후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은 마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스승이 그 기운을 다스려 마라역천공의 구결에 따라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때 넌 이 스승이 움직인 흐름을 이해하고 몸으로 외워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음으로 마라역천공의 구결을 일러줄 테니 역시 외워야 한다. 알겠느냐?”
마현 뒤로 앉은 허진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마령단을 먹어라.”
“예.”
허진의 말에 마현은 자그만 목함을 열어 고급 한지에 쌓인 영단을 꺼내들었다. 조심스럽게 겉을 포장한 한지를 벗겨낸 후 검은 빛이 맴도는 마령단을 입에 넣었다.
마령단은 마현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액체로 변해 스르륵 목으로 넘어갔다.
입 안에서는 향긋한 향이 느껴졌지만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뜨거운 불덩이라도 삼킨 듯한 고통이 몸을 덮쳤다. 그 고통에 마현의 몸은 경직되며 미약하게 떨렸다.
그때 허진의 손바닥이 명문혈에 닿는 것이 느껴지며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허진의 마력이었다. 허진의 마력은 순식간에 마령단의 기운을 잡아당겨 마현의 단전에 안착시키더니 마라역천공의 구결에 따라 마령단의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주천을 하며 마라역천공의 길을 알려준 후, 이주천 때 전음으로 구결을 전해 주고 허진은 조용히 자신의 마력을 거두려 했다.
‘응?’
막 마력을 거두려는 그때 이상함을 느꼈다.
마라역천공의 구결에 따라 마현의 몸을 일주천했을 때였다. 온전한 마력으로 변해 단전에 안착하던 기운들이 단전에 머물지 않고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는가 싶어 마현의 몸을 살피던 허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단전 주위로 또 하나의 그릇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허진은 이내 그것이 원통관같이 생긴 띠 모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현의 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살폈다. 하지만 그것은 단전처럼 굉장히 안정적으로 마력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흠…….”
허진은 마현의 몸에서 손을 떼며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 순간 입마관 졸업시험 때가 떠올랐다.
특히 자신과 사공소의 눈마저 따라가지 못하는 보법을 펼쳤던 마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허진의 눈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마현이 무언가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 같은 범인은 볼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을 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현에 대해서는 이미 비마대와 비영대를 통해 모두 알아보았다. 그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그의 조상들의 행적까지 샅샅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교의 정보력을 피해 무언가를 숨겼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데 마현을 대하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허진은 마현의 등을 쳐다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구배지례는 분명 진심이 느껴졌다.’
흔들리던 마음이 이내 단단한 바위처럼 중심을 잡았다.
‘때가 되면 일러준다고 했으니 믿자. 스승이 제자를 믿지 못한다면 이 세상 누가 믿어주겠는가?’
허진은 깊은 눈으로 마현의 등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허진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방문을 다시 조용히 닫으며 어느새 기울어져 가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괜스레 스승님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허진은 전대 부교주였던 스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먹어야 하는 날이군.’
허진은 자신의 집무실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후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임맥과 독맥을 타고 흐르던 마령단의 기운이 어느 순간부터 기경팔맥을 탔다.
그 순간 마현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한 검은 안개는 곧 마현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우두두둑.
마현의 몸 곳곳이 뒤틀리고 어긋나며 뼈가 빠지고 다시 맞혀지기를 반복했다. 생뼈가 빠지고 다시 맞혀지는데도 마현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또한 가슴과 옆구리에 아물었던 검상이 다시 터졌다.
그런데 응당 터져 나와야 할 피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며 언제 검상이 났을까 싶을 정도로 상처가 아물어가더니 사라졌다.
기경팔맥을 모두 돌아 대주천이 완성되어 단전으로 들어간 마령단의 기운을 세 개의 서클이 마구 잡아먹었다. 급기야 세 개의 서클이 터질 듯 가득 차자 세 개의 서클이 겹치는 두 지점에서 또 하나의 서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네 번째 서클도 앞선 세 개의 서클과 별반 다름없이 단전으로 들어오는 마령단의 기운을 마구 삼키다 지쳤는지 다시 서클 하나를 더 만들었다.
다섯 개의 서클은 서로 사이좋게 단전의 마령단 기운을 다 빨아 마셔 기분이 좋은 듯 단전 주위를 맹렬히 회전하고 또 회전했다.
그러자 마현을 짙게 둘러싼 검은 안개가 마현의 코로 스며들었다.
번쩍!
감겼던 마현의 눈이 떠지고 그의 안광에서 시퍼런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다시 눈을 감는 마현의 아랫배에 위치한 단전 주위로 다섯 개의 서클이 맴돌고 있었다.
비록 5서클까지밖에 올라서지 못했지만 마력의 양만 따진다면 과거 6서클과 7서클의 중간쯤이었다. 6서클과 7서클의 마법은 쓰지 못하겠지만 그 대신 풍부한 마력으로 좀 더 다양한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싸움이 일어나도 마력이 부족해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는군.’
마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날 반드시 넌 죽는다. 그 이유가 어떻던…….’
마현의 몸에서 살기를 동반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