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11화
가릉의 시선은 흑도의 머리에서 시작해 전신을 훑더니 그가 들고 있는 도에서 멈췄다.
“혹…….”
가릉의 목소리에 흑도는 신경질적인 안광을 뿜어내며 노려보았다.
“사, 사극유 어르신이십니까?”
가릉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흑도의 안광이 번뜩였다.
-본좌를 아느냐?
가릉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흑도가 들고 있는 도를 가리켰다.
“사극유 어르신이 맞습니까?”
-네놈은 누군데 나를 알아보는 것이냐?
“마의당 귀마독의(鬼魔毒醫) 지서악 당주님의 제자, 가릉이옵니다.”
-지 당주의 제자?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흑도가 가릉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열 살배기 그 꼬마?
“맞습니다. 어르신을 처음 본 게 열 살 때쯤이었습니다.”
-허어……, 이거 쪽팔리군. 근데 너 지금 몇 살이냐?
“나이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어르신. 아마 백이십이 조금 넘었을 겁니다.”
-너도 어지간히 질기게 사는구나.
“어르신도 여전하십니다.”
-뭐가?
“그 왜…… 입이 걸쭉하신 게 말입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불같은 언행과 행동으로 아마 전전대 교주님의 골치를 제법 아프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가릉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는지 아련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시끄럽다! 죽고 싶은 게냐?
한순간 살기가 가릉의 몸을 휘감았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가릉이 하얗게 질리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다시 뵐 줄 몰랐습니다.”
-이런 젠장……, 끄응.
흑도는 언짢은 목소리를 씹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데 저분들은…….”
가릉은 시선을 돌려 나머지 세 구의 해골, 흑사신들을 쳐다봤다.
-신경 꺼라. 크크크, 곧 내가 찍어 눌러 버릴 놈들이니까.
흑도는 세 흑사신을 향해 강렬한 투기를 발산했다.
-저, 저놈이?
-허어…….
-……!
흑사신들 또한 가릉을 향해 섬뜩한 눈빛을 뿜어댔다.
가릉은 흑도의 성격을 잘 알기에 한 귀로 흘리며 살기를 내뿜는 세 흑사신을 면밀히 살폈다. 그렇게 살피던 가릉이 눈을 번뜩이더니 이내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 사공자님. 호, 혹 저분들은…….”
“아마 네가 생각하는 이들이 맞을 것이다.”
마현의 대답에 가릉은 입을 달싹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쉽게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 마웅총의…….”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린 가릉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록 해골의 모습이었지만 흑도를 보는 순간 그저 잠시 반가움에 과거를 회상했었다. 하지만 마웅총에 잠든 네 마도 영웅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무쇠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이 사실이 마교에 알려지는 순간…….’
가릉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너의 이름은 무림 역사의 한 장에 서술될 것이다. 전대에도 후대에도 없을 최강의 강시가 네 손에 완성되는 것이다.”
마현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하지만 그 달콤함에 지독한 독도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릉은 잘 알고 있었다.
“하, 하지만…… 제가 어찌 저분들의 옥체에…….”
가릉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들에게 다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이는 천하를 통틀어 가릉, 너밖에 없다.”
가릉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흑사신들을 쳐다봤다.
-허락한다.
흑권의 말에 가릉은 다시 마현을 쳐다봤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가릉은 눈을 감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차피 이제 죽음만 기다리는 몸. 후회할 시간도 없다.’
가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대로 사공자를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릉은 마현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때 별안간 하얀 뼈로만 이루어진 손이 다가와 그의 몸을 낚아챘다.
-너 이리와!
흑도가 가릉의 몸을 낚아채 여섯 구의 시체 앞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가 해(孩)야, 본좌는 이 녀석이다.
흑도가 가리킨 시신은 누가 봐도 옥석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 어르신.”
가릉은 그 시신을 쳐다보며 흑도를 불렀다.
-왜?
흑도는 서슬 퍼런 안광을 뿜어대며 가릉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바로 앞까지 끌어당겼다.
“고, 골격이 맞지 않습니다. 다른 인물로 선택하심이…….”
-하라면 해! 나도 한 번쯤 이런 얼굴 좀 해보자!
흑도는 생전에 우악스러웠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항상 자신의 얼굴이 사내답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마음속으로는 옥석 같은 미남들의 얼굴이 부러웠었다.
“흑도!”
보다 못해 마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본좌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
그리고는 가릉에게 더욱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크크크, 어차피 네 녀석 때문에 본좌의 성격이 개차반이란 거 다 들통 났다. 책임져야지?
흑도는 음침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다시 미남의 시신을 가리켰다.
“하아…….”
마현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만 같았다.
“흑권, 흑검, 흑창.”
마현은 가릉을 잡고 마구 흔들며 졸라대는 흑도를 쳐다보며 세 흑사신을 불렀다.
“조만간 시간을 줄 테니 흑도를 반쯤 죽여 놔라.”
-본좌에게 맡겨라. 소멸되기 직전까지 아작을 내주지. 빠드득!
흑검이 앞으로 나오며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부마전 앞뜰.
그곳을 지나쳐 마현이 부마전으로 들어섰다.
데스나이트에게 새로운 신체를 주는 일은 의외로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마현이 항상 가릉과 함께 있을 수 없기에 그에게 임시방편으로 데스나이트를 부를 수 있는 소환 스크롤을 만들어 주었다.
‘음!’
마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단전에 위치한 서클에서 조금씩 마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느껴지는 공명으로 보아 가릉이 흑권을 가장 먼저 부른 모양이었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군.’
마현은 조금씩 사라지는 마기를 느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현의 표정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더 어두워졌다. 단순히 서클에서 마기가 사라지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미루고 또 미뤘던 대답을 오늘 허진에게 할 생각이었다.
“후우…….”
어차피 답은 나와 있다. 이 이상 시간만 끌어봐야 둘 사이만 더 어색하게 만들 뿐이다.
허진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뜻에 따를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뼈를 묻을 생각이 없고 하르센 대륙으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자신이었다.
마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허진이 있는 부마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너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허진이 기다렸다는 듯 마현을 맞이했다.
“대공자가 너를 찾는다는구나.”
“대공자께서요?”
마현은 허진이 눈으로 가리키는 시녀를 쳐다봤다.
“너를 찾아갔는데 자리에 없어 이리로 온 모양이다.”
아마 가릉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이냐?”
“대공자께서 전에 말씀을 드린 자리를 오늘 마련하시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마현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생겨났다.
느닷없는 초청이었지만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 부교주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이 되면 다시 찾아오너라.”
마현은 손을 저어 그만 물러가라 명을 내리고는 다시 허진 앞으로 몸을 돌렸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현의 목소리는 무겁고 어두웠다.
허진은 마현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현이 네 번째 공자 자리에 오른 후 둘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평소 말이 없는 둘이 서로의 감정을 의식해 더욱 말수를 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마현이 찾아와 먼저 말을 꺼내고자 하는 용무는 하나밖에 없었다.
“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마현이 어렵게 입을 열었고, 허진이 그런 마현을 섭섭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 마현이 축객령을 내렸던 대공자의 시녀였다.
“……사, 사공자님.”
마현의 얼음장 같은 눈초리가 바로 시녀에게로 쏘아졌다.
차가운 그 눈빛에 시녀가 와들와들 떨며 몸을 움츠렸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냐?”
“그, 그게 아니오라…… 대공자께서 사공자님을 바로 모시고 오라…….”
“뭐라?”
마현의 음성이 높아졌다.
이것은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백 번 양보를 해 오늘 갑자기 자신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고 전해 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녀가 와서 한다는 말이 지금 자리를 마련했으니 바로 오란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초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 지금 바로…….”
마현이 잘못 듣기라도 했을까 걱정이라도 된 것인지 시녀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마현은 얼굴을 더욱 굳히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만 해라. 시녀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허진의 말에 마현은 표정을 애써 풀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대공자가 초대했으면 참석하는 것이 예의다. 다녀오너라. 그리고…….”
허진의 목소리가 급격히 흐려졌다.
“……다녀온 뒤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구나.”
힘이 하나도 없는 쓸쓸한 목소리였다.
마현은 고개를 들어 허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허진은 고개를 돌려 마현의 눈을 피했다.
마현은 그런 허진의 모습에 착잡함을 느꼈다.
‘하아…….’
마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가자.”
마현은 시녀와 함께 몸을 돌렸다.
『현아.』
그때 마현의 머릿속에 허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조심하거라, 그리 녹녹한 자리는 아닐 게다.』
대공자의 시녀가 있어서인지 허진은 전음으로 뜻을 알렸다. 마현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마현의 마음을 더욱 쓰리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스승님은 못난 제자를 두었습니다.’
마현은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자신의 처지를 말할 수 없는 마현은 유달리 쓴 침을 삼키며 부마전을 나섰다.
* * *
마현의 경우 부마전에서 생활하지만 다른 세 공자는 각기 독립된 거처에서 생활했다.
각각의 별호를 따 대공자의 거처는 웅천각, 이공자는 독혈각, 삼공자는 귀영각이라 불리었다.
아마 마현이 허진의 제자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역시 별호를 본떠 흑풍각이라 명명된 거처를 받았을 것이다.
시녀를 따라 대공자 웅천마군 추도영의 거처인 웅천각으로 들어섰다.
웅천각의 내부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주인인 추도영이 거주하는 본 건물과 그 뒤로 그의 직속 수하들인 웅천대가 머무는 2층 건물이 있었고, 그 사이에 대형 연무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독혈각과 귀영각 역시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안으로 드시면 됩니다.”
시녀는 방문을 가리키며 허리를 숙였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웅천각 내 접객실로 들어갔다.
“……!”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딛던 마현의 동작이 순간 멈췄다. 다름 아니라 접객실 안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신을 불렀으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어이가 없어 실웃음이 새어나왔다.
‘훗.’
마현은 비어 있는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반각 정도 흘렀을까?
문이 열리며 제일 먼저 추도영이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