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3화
마현도 알고 있었다.
지금 흑풍대가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곧 마심단이 지급되고 한순간 힘이 커진다면 자칫 나태해지고 안주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마현은 그런 마음이 혹 생길까 싶어 미리 싹을 잘라 버린 것이다.
더욱 악착같이 강해지라는 뜻이었다.
“나는 약한 수하는 두지 않는다. 만약 흑풍대가 강해져 있지 않다면 나는 너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목숨을 다해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왕귀진은 허리를 숙인 채 마현의 명을 받들었다.
마현은 고개를 들어 철용을 보고, 그 후 흑풍대를 쳐다봤다.
“강해지겠습니다!”
“강해지겠습니다!”
흑풍대는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강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연무장이 떠나갈 듯 복창했다.
* * *
흑풍대와 약속했던 3개월이 오늘이 지나면 끝이 난다.
마현은 흑풍대에게 어찌 보면 가혹할 명을 내렸었다. 수하들에게 그런 명을 내린 이상 자신 역시 마음 편히 3개월을 보낼 수는 없는 법. 마현도 그들 못지않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마법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무공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마현의 무공 공부는 무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허진의 조언에 따라 보법은 완벽하게 익혀나갔고, 그 외 마라공 중에서 마법의 단점인 방어적 수비를 보완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기본공 정도는 직접 몸으로 익혔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학문적으로 접근해나갔다. 그렇게 마현은 무공의 원리들을 하나 둘씩 파고들어갔다. 그렇다 보니 하루 종일 무공을 공부했지만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토록 무공에 집중을 하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마법의 단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단전.
평범한 단전이 아닌 서클 단전 때문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마현의 서클 단전은 5서클에서 완전히 정체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5서클을 넘어 6서클, 7서클, 아니 그 이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그 어떤 깨달음을 거쳐야 했다. 그 깨달음이 허진의 조언대로 무공 안에 있을 거라 여기며 더욱 무공 공부에 매진하게 된 이유였다.
가끔 실소도 터져 나왔었다.
마법사가, 그것도 흑마법사가 더 높은 서클로 가기 위해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공을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실소를 한 달 전부터는 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
무공을 더욱 깊이 있게 파고들어갈수록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서움을 느낀 탓이다. 또한 어떤 부분은 마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까지 있어 마현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약속한 3개월이 끝났다.
마현은 과연 자신이 얻은 것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확인해 보는데 가장 좋은 것이 비무였다. 그래서 마현은 흑사신을 불러냈다.
라이트 마법으로 대낮처럼 밝은 지하 연무실.
듬성듬성 찢어지고 베인 무복 사이사이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현의 입술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쳇!”
그런 마현을 보며 흑도는 기분 나쁜 듯 토라진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홱 돌렸다.
단순히 둘의 모습만 본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온몸에 도상(刀傷)을 입은 마현은 웃음을 짓고 있었고, 상처 하나 없는 흑도는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며 돌아섰으니 말이다. 마현은 고개를 들어 천장에 떠 있는 빛 덩어리를 올려다보았다. 만족스러움으로 가득 찬 마현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전처럼 흑도에게 졌지만, 또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분명 달라졌다.
허무할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으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빈틈을 보았고, 그 빈틈 속에 나름 날카로운 공격도 할 수 있었다.
“제법 틀이 잡혔네만…….”
흑권의 목소리에 마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 멀었네.”
그 말에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는 거지.”
마현은 다시 진한 웃음을 보였다.
“후우. 역시 어색해. 새로운 숙제가 생긴 것인가?”
마현은 잠시 눈을 감고 흑도와의 비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마법과 무공 사이의 조화가 어색했다. 물 흐르듯이 연계가 되어야 하는데 흐물거리는 조청처럼 뚝뚝 끊어졌다.
순수하게 마법을 익힐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마 무공을 공부하며 공수 조화의 감각에 눈을 뜬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할 따름이었다. 특히 보법은 무공에서 공수 조화의 핵심 요소였고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진 힘을 최대한 표출할 수 있다.
“숙제가 생겼다는 것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이러한 문제점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마현이 미소를 짓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보법과 간단한 몇 가지 방어 기술로 인해 공격 마법의 효과가 엄청나게 증폭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마법사의 최대 약점은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하는 사이에 생기는 공백이다. 그 방어의 취약점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아직 마법과 무공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앞으로 공수에 매진하여 조화를 이룬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우리가 도와주지.”
흑창이었다.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던 그가 먼저 제안하자 마현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수장 말대로 어정쩡한 이런 관계가 싫어서.”
그 말에 마현의 표정이 상당히 밝아졌다.
“듣던 말 중에 가장 반가운 말이군.”
“도와주기는 뭐를 도와줘? 흥!”
흑도가 퉁명스럽게 끼어들며 둘 사이의 대화를 잘라먹었다.
잔뜩 토라진 모습으로 그가 마현을 노려봤다.
마현은 그간 무공 공부에 빠진 탓에 근 석 달 이상을 흑사신을 소환하지 않았다. 아니 안 했다기보다 못했다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무 전에도, 비무가 끝난 후에도 마음을 풀지 못하더니 아직까지 마음이 배배 꼬여 있는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냐?”
흑검이 그런 흑도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네 흑사신 중에 자존심이 가장 약한 이는 바로 흑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먼저 마현에게 주인이라고 부르며 희희낙락한 것도 흑도였다.
“그 입 같지도 않은 주둥이 닥쳐라, 이놈!”
흑도를 꾸짖는 흑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흑검이라고 왜 불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마현이 자신들을 부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 그만큼 마현은 앞으로 어떤 무인으로 완성될지 모르는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어찌되었든 흑사신과 마현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고, 좋든 실든 그는 자신들의 본질적 주인이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마현이 자신들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를 잡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뭐? 이 새끼가…….”
흑도가 애꿎은 화를 흑검에게 쏟아 부으며 도를 집어 들었다.
“오냐, 차라리 잘 되었다. 오늘 네놈의 버릇을 이 본좌께서 단단히 고쳐주마.”
“본좌 좋아하시네. 여기서 본좌 아닌 놈이 어디 있어?”
흑도 역시 흑검에게 지지 않고 어금니를 살벌하게 드러냈다.
“그만!”
결국 흑권이 둘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나직이 호통 쳤다.
“오늘은 반드시 저놈과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흑검은 흑권을 보고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평소 흑권이 나서면 흑검은 조용히 물러났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수장, 비키쇼. 이 본좌 역시 저 빌어먹을 놈과 결판을 내고 말테니.”
흑도는 그 와중에도 흑검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허……, 그래도…….”
“흑권, 놔둬.”
그 둘을 말리려는 흑권을 마현이 말렸다.
“그냥 나둬 봐.”
“……?”
흑권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마현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꺼낼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크크크! 잘 생각했어, 주인. 너 오늘 본좌한테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거다.”
흑도는 도를 빙빙 돌리며 흑검을 노려보았다.
“너는 본좌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이미 한 번 겪었을 텐데 여전한 걸 보면 머리가 나쁜 모양이지? 그렇다면 몸으로 알게 해주지.”
흑검은 흑도와는 달리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운이 좋아 반 수 차이로 이겨놓고서는 말이 많아! 그런 반 수쯤이야 기백으로 뒤집어주지.”
흑도의 몸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그런 비무가 아닌 진정한 힘겨루기, 소멸까지도 각오한 생사 비무를 펼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네놈이 아무리 날고뛴다고 해도 영원히 본좌 아래라는 것을 오늘 확인시켜 주지.”
흑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흑도를 상당히 자극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조금 커져감을 느낀 흑권이 마현을 잠시 쳐다보다가 결국 다시 말리기 위해 둘 사이로 발걸음을 떼려고 했다.
마현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런 흑권을 막았다.
“흑권, 그리고 흑창.”
마현의 호명에 흑권과 흑창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자.”
“……?”
“……?”
“일 년 전 약속을 오늘 지킬 생각이다.”
흑권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곧바로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감췄지만, 오히려 눈꺼풀이 더욱 크게 떨렸다. 흑창의 표정 역시 흑권과 그리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밧―
“이 새끼, 오늘 뒈졌어…….”
“오늘 본좌가 친히 너의 그 버르장머리를…….”
동시에 몸을 날리던 흑도와 흑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딱 멈췄다.
“주인, 뭐?”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흑도가 마현을 향해 물었다. 흑검을 향해 달려가는 도중 강제로 몸을 멈춘 상태로 마현을 향해 고개를 돌려서인지 그 모습이 참 어정쩡하게 보였다.
“……?”
흑검 역시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었다.
“왜? 더 싸우지 않고?”
마현은 흑권과 흑창만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 둘은 바쁘니까 우리만 가지.”
“험험…….”
흑검은 무안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은근슬쩍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하하하. 주인도 참! 우리 안 바빠. 그지?”
흑도는 흑검을 향해 친근감을 과시하듯 싱긋 웃었다.
“아니야, 바쁜 것 같으니까 마저 볼일 봐라. 흑권, 흑창. 가지.”
마현은 그런 흑도와 흑검을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타다닥!
그러자 흑도가 재빨리 뛰어와 마현 앞에 섰다.
“안 바쁘다니까…….”
“둘이 해결할 일도 있지 않나? 지금 시간 날 때 아예 누가 죽나 실컷 해봐라.”
“하하, 하하하. 누, 누가 사이가 안 좋다고.”
흑도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재빨리 뛰어가 흑검의 소매를 잡고 끌고 왔다.
흑도는 얼떨결에 끌려온 흑검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그 순간 흑검이 인상을 확 찌푸렸고, 그 표정을 본 흑도의 눈매 역시 날카롭게 갈라졌다.
한순간 눈이 마주친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가 사라졌다.
“아닌 것 같은데?”
마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어깨동무를 한 채 서로를 노려보는 둘을 쳐다봤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흑도는 좌우로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렇지, 흑검?”
흑도는 팔에 힘을 꽉 주며 흑검을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엔 잔뜩 힘이 들어가 탁탁 끊겼다.
“대답! 빨리! 해라!”
이를 박박 갈면서도 억지로 활짝 웃던 흑도는, 마현을 보자 어색한 웃음을 남발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러면서 빨리 대답하라고 어깨동무한 팔을 살짝 들어 흑검의 목을 죄며 은근히 앞뒤로 흔들었다.
흑검 역시 똑같이 팔을 들어 흑도의 목을 감쌌다. 그런 흑검의 팔뚝에 흑도보다 더 굵은 힘줄이 불룩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