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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57화 (57/351)

# 57

7화

“아직 옷도 안 갈아입고 뭐하셨습니까?”

철용은 막 욕실에서 걸어 나온 나체의 왕귀진을 보며 약간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되었다. 저기 차가 있으니 잠시 마시고 있어.”

왕귀진은 구석에 놓인 찻주전자와 찻잔을 가리킨 후 침실로 들어갔다.

“흠?”

철용은 의외로 침착한 왕귀진의 모습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왕귀진이라면 분명 투박한 농이라도 건네며 장난을 걸었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철용은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깊은 눈으로 자리에 앉아 왕귀진을 기다렸다.

잠시 후 왕귀진은 흑풍대의 옷인 검은 피풍의를 입고 나왔다.

“대주.”

철용은 미리 따라놓은 찻잔을 앞으로 내밀며 왕귀진을 불렀다.

“왜?”

왕귀진은 목이 탔던지 차를 후르르 한 번에 다 마시며 철용을 쳐다봤다.

“어째 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나?”

그 물음에 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겠다.”

“……?”

“그냥 전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생각난다고 해야 할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며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눈을 떴는데 모든 게 달라져 보인다고 할까? 어쨌든 달라진 것 같다.”

“흠…….”

철용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왕귀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왕귀진은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뇨. 왠지 대주가 유식해 보여서요.”

“그래?”

그 말이 나쁘지는 않았던지 왕귀진은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철용은 정말 왕귀진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전 같으면 호탕하게! 라고 정의를 내릴만한 그 무식한 웃음소리를 터트렸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옅은 웃음을 터트리던 왕귀진은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철용이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집어 들고는 단숨에 후르륵 마셔 버렸다.

그 모습에 철용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주. 방금 한 말은 최소요.”

“엥?”

철용의 말에 왕귀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철용은 뭔가 뒤끝이 있는 여운을 남기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새끼, 뭐?”

왕귀진은 가슴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화기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 틀린 거 있습니까?”

철용은 삐딱하게 말대꾸를 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죽고 싶냐?”

왕귀진은 마기를 내뿜으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아씨, 진짜! 대주.”

결국 철용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나 힘이 장땡이라면서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 그랬잖습니까!”

“크흐흐흐, 너 많이 컸다.”

왕귀진은 더욱 짙은 마기를 폭사시켰다.

“나보다 대주가 더 많이 컸지요.”

“뭐?”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친구 사이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친구?”

왕귀진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래, 이 새끼야. 너 술 먹고 깽판 친 거 누가 뒷수습을 해줬냐? 앙? 언제는 술 먹고 죽어도 우정 변치 말자며? 그런데 대주되더니……, 흥! ‘그래, 너와 내가 대주고 부대주라 어쩔 수 없다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편히 말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빈 말이라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네놈이 대주라 위계질서는 확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떠받들어 줬더니…….”

철용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철용의 말에 왕귀진 역시 가슴이 한편 찔리는지라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한동안 그런 왕귀진을 보며 씩씩거리던 철용 역시 홀로 그냥 서 있기가 무안했던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미안하다.”

“알면 됐어.”

왕귀진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철용 역시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

“나는 대주, 너는 부대주! 과거야 어떻든 나는 상관, 너는 수하.”

“야, 야!”

그 말에 철용은 황당한 듯 목소리를 높이며 왕귀진을 불렀다.

“주군의 명이다. 우리 사이에 사심이 들어가면 위계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면 흑풍대에 빈틈이 생길 것이고…… 그 자그만 빈틈으로 인해 자칫 주군의 목숨을 못 지킬 수도 있다.”

왕귀진은 총기 어린 눈으로 철용을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철용의 손을 따뜻하게 움켜잡았다.

“나중에 은퇴하면 네가 깽판을 치든 개망나니 짓을 하든 내가 뒷수습 다 해주마. 그러니 그때까지만 사적인 우리의 관계를 미루자.”

‘뭐, 뭐야?’

왕귀진의 논리 정연한 말에 철용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용아……, 아니 철 부대주. 내 부탁하네.”

철용의 손을 움켜잡은 왕귀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알았습니다.”

그 진지한 눈빛에 철용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우정의 빚은 꼭 후에 갚겠네.”

‘이, 이게…… 아닌데…….’

철용이 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똑똑해진 거야? 아니면 전처럼 융통성마저 없는 단순 무식 그대로인 거야?’

“고맙네, 부대주.”

“하하, 하하, 하하하.”

철용은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 대주님, 부대주님.”

그때 흑풍각을 총 관리하는 시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공자께서 찾으십니다.”

“주군께서?”

“예. 조금 전 부마전 시녀가 두 분을 그리 데리고 오라는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주군께서 찾으시면 가야지. 그곳이 어디든지.”

철용이 보기에 별일도 아닌데 왕귀진은 잔뜩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대주.”

“……? 아, 예, 옙.”

“가지.”

철용은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 왕귀진을 따라 흑풍각을 나섰다.

타박, 타박, 타박…….

부마전으로 향하는 복도로 왕귀진과 철용의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휴우.”

철용은 긴장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왜 그리 긴장하나?”

왕귀진은 철용이 너무 긴장한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긴장 안 됩니까?”

“뭐가?”

“지금 주군께서 부교주님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긴장이 안 되냐고 물었습니다.”

“왜?”

여전히 왕귀진은 두 눈만 껌뻑거리며 철용을 쳐다봤다.

“부교주님이 함께 계신다고요.”

“알아.”

“예?”

너무나 단순한 왕귀진의 대답에 철용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주군을 뵈러 가는 거지 부교주님을 뵈러 가는 게 아니잖아. 아닌가?”

“그, 그렇지요.”

“근데 긴장할 일이 뭐가 있다고.”

“…….”

철용은 할 말을 잊어버리고 그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우리는 그저 주군을 뵙고 그리고 주군만 지키면 돼. 다른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

“…….”

왕귀진은 그저 눈만 껌뻑이는 철용의 등을 가볍게 두들기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둘은 부마전 안으로 들었다.

부마전 안에는 허진과 마현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왕귀진은 철용을 데리고 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섰다.

“주군을 뵈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왕귀진이 마현에게 군례를 취했고, 이어 철용이 군례를 취했다.

“스승님께 일단 너희 둘이라도 먼저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게 하려고 불렀다.”

마현의 말에 철용은 허겁지겁 다시 군례를 취했다.

“부교주님의 알현하나이…….”

철용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주인 왕귀진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냥 서 있었기 때문이다.

“대, 대주.”

철용은 당황을 넘어서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왕귀진을 불렀다.

“흑풍대주입니다.”

왕귀진은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반쯤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철용을 향해 근엄하게 말을 내뱉었다.

“부대주, 허리를 펴라.”

“……대, 대주. 하, 하하, 하하하.”

그 순간 허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주군께서 그러셨다. 주군 이외에 그 어떤 이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말라고.”

“하하, 하하하!”

철용은 허진의 얼굴을 살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철용의 얼굴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고로 수하란 목숨을 바쳐 주군의 명을 따라야 한다. 나는 주군의 수하다! 그리고 부대주, 자네도 주군의 수하다!”

‘이런 일에 목숨을 겁니까!’라고 버럭 소리를 외치고 싶었지만 철용은 그저 눈물을 머금으며 식은땀을 연신 닦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여기는 부마전이니까.

그런 왕귀진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마현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풋, 푸하하하하하!”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허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마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왕귀진을 처음 만났을 때 정신을 잃고 있었던 탓에 그가 얼마나 눈치 없고, 거기에 융통성마저 없는지 마현은 알지 못했다. 그저 우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벽한 오판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허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현을 쳐다보다 왕귀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고로 수하란 그래야지. 본좌가 보기에 조금 과한 것 같지만 말이야……. 그래도 흑풍대주를 보니 든든하구나.”

“감사합니다.”

묘한 칭찬이었지만 어쨌든 칭찬이기에 왕귀진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휴우…….”

마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생겼는지 이마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흑풍대주, 내 명을 바꾸겠다. 앞으로 나와 스승님에게는 최대한 예를 갖추라.”

“명!”

마현의 말에 왕귀진은 대전이 떠나갈 듯 크게 외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저기 주군.”

그때 철용이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마현을 불렀다.

“……?”

“……혹 몰라서 그렇습니다만…….”

철용은 슬쩍 왕귀진을 훑어보고는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거기에 교주님도 넣으심이…….”

철용의 말에 동시에 마현과 허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설마 교주에게까지 그러겠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왕귀진을 쳐다봤다.

“교, 교주님에게도 최대한 예를 갖추도록.”

“명!”

왕귀진은 다시 부동자세를 취하며 참으로 씩씩하게 명을 받들었다. 그런 왕귀진 옆에 서 있는 철용은 남몰래 타는 속을 애써 식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봐도 흑풍대의 앞날이 뻔했던 것이다.

허진은 곤혹스러워하는 마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아.”

“예, 스승님.”

마현은 여전히 무안함과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금 융통성은 없어 보이지만…… 든든한 건 사실이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에 이 스승은 그저 흐뭇하구나. 이제 흑풍대도 만들었으니 수신호위도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

마현은 수신호위라는 말에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수신호위는 흑풍대와는 다르니 이 스승이 만들어 줄까 하는데, 어떠냐?”

“아……, 그게…….”

마현은 좀처럼 흐려진 말꼬리를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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