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9화
부마전이라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내지 못해도 일단 외형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사공자 자리에 안착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현은 부마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도종극은 대사형인 자신에게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는 것이라 연신 낄낄거리며 마현을 무시했다.
하지만 사공찬은 달랐다.
혹 몰라 추도영은 그런 마현에 대한 행적들을 사공찬에게 은근슬쩍 알려주었다.
그러자 사공찬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반 년간 스스로도 모질게 수련했지만 직속 무력단체인 독혈대를 더욱 강하게 훈련시켰다.
분명 사공찬은 자신도 모르는 마현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아는 한 사공찬과 마현이 사적으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은 곧 그때 마현에 대한 무언가를 사공찬이 보았거나 느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일 년도 더 지난 그때의 일을 추도영이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뒤늦게 조사를 해봤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상념을 깨드리는 음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대공자님. 이장로와 삼장로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장로와 삼장로께서?”
“예.”
시녀는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모셔라.”
추도영은 보고서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맞춰 방문이 열리며 두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마교 이장로 회회혈마(廻廻血魔)와 삼장로인 역천마도(逆天魔刀)였다. 추도영을 따르는 파벌 내 두 핵심 기둥이었다.
“오셨습니까?”
추도영은 반가운 얼굴로 그 둘을 맞이했다.
“자주 찾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이장로 회회혈마는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뚱뚱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인답지 않은 후덕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회회혈마가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그에 반해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역천마도는 날카로운 인상에 걸맞게 뾰족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다들 앉으시지요.”
대공자 추도영일지라도 자신을 지지하는 파벌의 핵심 인물인 두 장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예의를 차리며 두 장로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나저나 칠장로께서 안 보이시는군요.”
추도영은 요부 삼안혈화(三眼血花)를 떠올리며 넌지시 물었다. 항상 자신을 찾아올 때는 셋이 함께 왔는데 오늘은 그녀를 빼고 둘이 왔으니 궁금한 것이 당연했다.
“그년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사타구니에 사내놈 하나 끼고 암내나 풍기고 있겠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땀을 수건으로 훔쳐가며 회회혈마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평소 둘 사이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뚱뚱한 몸으로 평생 살아와서 그런지 천성적으로 여인을 싫어하는 회회혈마와 그런 그를 마치 돼지를 보듯 쳐다보는 삼안혈화였으니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둘은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험담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의견이 맞으면 누구보다도 뜻이 잘 맞아 일을 척척 해결해 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때 역시 서로의 험담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런 둘 사이를 잘 알았기에 추도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가 보다 넘어갔다.
“이 시간에 저를 찾아오신 것을 보면 급한 볼일이라도 생긴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거 나이를 먹어서인지 금세 깜빡깜빡합니다, 그려.”
회회혈마는 부지런히 얼굴과 목에 난 땀을 닦으며 푸짐한 웃음을 터뜨렸다. 추도영은 문득 그의 땀이 멈추지 않는 이유가 땀을 닦기 위해 연신 움직이는 회회혈마의 행동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에도 숨이 턱 막힐 듯한 몸집과 비릿한 땀 냄새에 추도영은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애써 펴며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 오후 본교 회의에서 다음 달에 있을 교주님의 환갑 잔치를 크게 열기로 확정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추도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회회혈마를 쳐다봤다.
“본교의 힘을 외부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부교주님의 발언에 그리 결정 난 것입니다.”
대답은 회회혈마가 아닌 역천마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부교주님이?”
애써 편 미간에 다시금 주름이 졌다.
“그렇습니다, 대공자님.”
전 같으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과 달랐다. 부교주에게 제자가 생겼고, 그 제자가 바로 사공자 흑풍마군, 마현이었다.
그렇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이 갔다.
“하긴 너무 오랫동안 무림이 조용했지.”
허진의 주장이 이해가 되었기에 추도영은 낯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굳이 그 사실을 알리려고 이런 밤에 저를 찾아왔을 리는 없고…….”
“하하하하, 역시 대공자님이십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으며 회회혈마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모습에 추도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다가 의식적으로 몸을 다시 앞으로 당겼다.
“이번 교주님 환갑 연회에 정파 쪽과 북해빙궁, 남해태양궁, 남만야수궁을 초대할 것입니다.”
“흠……, 연회 수준을 넘어서는군요.”
“정파 쪽이야 워낙 사이가 좋지 않으니 상관할 바가 아니고, 이 기회에 세외삼궁 중 한쪽과 돈독한 사이를 만들어 두는 게 어떨까 싶어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세외삼궁이라…….”
“비록 삼궁 모두 세외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중 어느 한 곳이 대공자를 지지한다면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갓난아이라도 알 것입니다.”
회회혈마의 설명을 들으며 추도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말을 하러 온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예상하는 인물 역시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역시 대공자님의 눈은 날카롭군요.”
회회혈마는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지리적으로나 그 지닌 세력으로 보나 북해빙궁이 어떨까 싶습니다.”
“북해빙궁?”
무심코 반문하던 추도영의 눈이 순간 동그래지며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됐다.
“빙화(氷花) 설린?”
끈적거리는 웃음을 띠며 회회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북해를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그 외모가 벌써부터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대공자께도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닐 겁니다.”
“여인을 싫어하는 이장로께서 그런 생각을 해냈을 리는 없겠고…….”
추도영은 고개를 돌려 역천마도를 쳐다봤다.
“삼장로도 아니시겠고……, 칠장로 삼안혈화의 뜻이겠군요.”
“큼!”
삼안혈화가 거명되자 회회혈마는 불쾌한 음성을 토하며 몸을 뒤로 뺐다.
“맞습니다. 딱 그년다운 생각이지요.”
“뭐, 나와는 그다지 맞지 않는 계획이긴 하나 그리 나쁜 생각만은 아닌 것 같군요.”
추도영 역시 몸을 뒤로 쭉 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천하일색의 여인과 덤으로 북해의 힘이라……. 후후후.”
추도영은 나직하게 웃음을 토해냈다.
* * *
마교에서 전서구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몇 마리는 북으로, 또 몇 마리는 남으로…… 그렇게 전서구들은 사방을 향해 퍼져 날아갔다.
그 후 시종일관 엄숙하기만 하던 마교 내부가 분주해지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바로 마교 교주 사공소의 환갑 연회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 * *
사공자, 흑풍마군은 무림맹 대표들을 영접하라.
마현에게도 한 통의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비록 교주님의 개인적인 환갑 연회였지만 천하를 좌지우지한다는 거대 세력들이 모두 초청된 교의 행사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연회에 초청된 이들을 예를 갖추어 영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은 공자 위에 앉은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명령서를 가지고 온 마교 교주 직속이자, 군사 율기가 직접 관리하는 정보조직인 비마대 대원의 말에 의하면 대공자 추도영은 북해빙궁을, 이공자 사공찬은 남해태양궁을, 삼공자 도종극은 남만야수궁을 영접하기로 결정 났다고 했다.
‘위치로 보나 뭐로 보나 무림맹은 대공자가 맡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 오다니 의외군.’
사실 누구를 영접하나 마현에겐 마찬가지였기에 그다지 큰 의문은 갖지 않았다.
“한 시진 후, 무림맹 대표들이 본교 입구에 위치한 천마등선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한 시진이라면 비교적 넉넉한 시간이었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디서 그들을 영접하면 되지?”
“원칙은 천마등선비 앞에서 영접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 그보다 조금 더 나가 천산으로 들어서는 협곡에서 영접을 합니다, 사공자님.”
“그런가? 알았다. 내 그렇게 하지.”
마현은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슬슬 일어나면 대충 시간이 맞겠군.’
무림맹 대표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아마 그런 것까지 고려해 알려왔을 것이다.
“흑풍대주.”
스르륵.
안개가 모여 하나의 형체를 만드는 것처럼, 마현의 옆으로 왕귀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현이 그에게 준 능력 중 하나인 투명화 마법, 림피드 바디(Limpid body)를 이용해 몸을 숨기고 있다가 마현의 부름에 나타난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왕귀진은 군례를 취했다.
“드디어 너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 왔다.”
왕귀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쳤다.
“흑풍대를 소집하도록.”
“명!”
왕귀진의 목소리는 눈동자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안개가 흩어지듯 그가 몸을 감췄다.
그리고 한식경 후.
흑풍각 앞에 서른 명의 흑풍대원들이 검은 피풍의를 입은 채 도열했다.
“말을 대령했습니다, 주군.”
대주 왕귀진이 검은색 말 한 마리를 끌고 왔다.
마현은 말고삐를 쥐며 대원들을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말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조만간 다크 스티드(Dark steed)를 만들어야겠군.’
다크 스티드란 죽음에서 깨어난 군용마를 뜻한다.
한동안 마교를 벗어날 일이 없을 것 같아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이제는 필요할 것 같았다.
“가지.”
마현은 흑마 위에 올라탔다.
“명!”
군례를 취한 왕귀진의 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를 이어 흑풍대원들 전원이 모습을 감추었다.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감춘 흑풍대원들은 이제부터 기척을 숨기고 마현을 따라올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경공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몸을 감추고 자신을 따라올 것을 생각하자 마현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천산을 벗어날 정도로 장거리가 아니니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혹 앞으로 마교를 벗어날 일이 생기면 조금 곤란해진다.
‘며칠 내로 다크 스티드를 보급해 줘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마현은 고삐를 당겼다.
“가자.”
『명!』
전음과는 다른 왕귀진의 매직마우스가 들려왔다.
* * *
투각, 투각, 투각, 투각…….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여덟 필의 말과 새하얀 마차가 달려왔다. 그 팔두마차를 모는 마부 역시 새하얀 털옷을 입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오십여 인마들 역시 백마를 타고 있었으며 두툼한 털이 수북한 하얀 모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고는 하지만 새하얀 털옷은 조금 과한 듯 보였다.
더욱이 그런 옷이라면 더워 땀이라도 흘릴 법한테, 그들 중 누구 하나 땀을 흘리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중,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직 멀었어?”
바로 팔두마차의 주인이자 북해빙궁의 무남독녀인 소궁주, 빙화 설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