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10화
“이제 거의 다 와갑니다, 아가씨.”
대답은 맞은편에 앉은 노파에게서 들려왔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참으로 곱게 늙은 한 노파가 다정한 눈빛으로 설린을 보고 있었다. 고운 얼굴과 인자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는 무림에서 한한파파(寒寒婆婆)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마차에만 있었더니 조금 지루하네.”
“마차를 잠시 세우라고 할까요?”
한한파파는 당장이라도 일어서려는 기세였다.
하지만 설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아니야, 됐어. 곧 도착한다며.”
그런 설린을 보며 한한파파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한한파파는 원래 북해빙궁의 안주인이자 설린의 어머니인 궁련과 사매지간이었다. 궁련이 설린을 낳자마자 죽어 버린 후 어린 설린을 차마 놔둘 수 없어, 북해빙궁 내 확고하던 여장부의 이름과 직책을 버리고 보모로 들어가 이십 년 가까이 설린을 키워왔다.
그렇기에 설린을 바라보는 한한파파의 눈빛은 어머니의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였기에 설린이 또래의 여자처럼 밝고 명랑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설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라는 대로 자라지 않았다.
아마 사춘기가 지날 때부터였을 것이다. 화사한 미소가 사라진 것이.
마치 서서히 메말라가는 한 송이 꽃처럼 그녀의 감정도 메말라갔다. 그 무엇을 봐도, 그 무엇을 들어도, 그 무엇을 해도……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득도한 고승처럼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공허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일상을 무미건조하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북해빙궁의 무남독녀.
아버지의 기대, 그리고 북해의 기대를 알았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다.
마치 하루라도 무공 수련을 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지독하리만큼. 그리고 결국 북해 후기지수 중 누구 하나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높은 성취를 이루어냈고 여인의 몸으로 소궁주 자리에도 올랐다.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도 웃지 않았다.
그렇게 설린은 빙화가 되어 버렸다.
그런 설린의 모습에 궁주 설관악의 걱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고, 보다 못한 한한파파가 청을 넣어 이렇게 북해빙궁을 대표해 마교로 온 것이었다.
북해에 비해 따듯한 중원에서 들판에 핀 꽃과 산뜻한 녹음을 보면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린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하기만 했다.
멍하니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아무런 감정 없이 지나치는 설린을 보며 한한파파의 시름이 깃든 한숨은 더욱 잦아졌다.
“소궁주님, 마교에서 사람을 보낸 모양입니다.”
밖에서 웬 음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설린과 한한파파가 나오자 저 멀리 한 떼의 인마가 보였다.
“조금 의외네요.”
“뭐가?”
“보통 천산 협곡 입구에서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까지 나온 것이 말입니다.”
“아무렴 어때. 이유가 있겠지.”
설린이 무심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 * *
마교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협곡 입구.
마현은 홀로 흑마에 올라타 있었다.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마현은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년 전 허진과 함께 마차를 타고 마교로 들어오던 그때가 떠올랐다.
정말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저 그런 거지 아이에서 지금은 마교의 중요 행사에 참석할 만큼 위치 또한 높아져 있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따로 없었다.
다각, 다각, 다각…….
저 멀리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상념을 훌훌 털어 버리고 눈을 돌렸다. 과거를 떠올리느라 잠시 부드러워졌던 눈빛은 다시 강인하게 바뀌었다. 그 사이 그림자가 조금씩 커지며 손님들이 다가왔다.
투각, 투각, 투각.
그들은 대략 삼십 명 정도로 모두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마현을 발견하자 곧장 말을 몰아 다가왔다.
가장 선두에 있던 한 중년인이 손을 들자 모두들 마현 앞에 멈추어 섰다.
중년인은 특이하게 머리를 모두 삭발했으며 황색 무복에 붉은 천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소림사 승려인 모양이군.’
그 승려의 뒤로는 한 사내가 서 있었는데, 긴 여정으로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단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소매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무당파…….’
마현은 속으로 무당파를 되뇌며 말에서 내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마현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는 그런 인사였다.
마현이 홀로 나와 자신들을 영접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무림맹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지금은 정마 간의 평화가 지속되고 있어 이렇게 교류도 하고 있다지만, 좀 더 깊게 들여다본다면 서로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런 적진에 자신들이 들어선 것이니 함부로 감정을 표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승려가 말에서 내려오자 다들 내키지 않았지만 말에서 내려왔다.
“마교 사공자 흑풍마군 마현이라고 합니다.”
“소승은 무림맹 대표로 온 무허라고 합니다, 아미타불.”
무허는 합장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비록 걷는 길은 다르나 무림의 선배들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말에 무허는 흥미로운 눈빛을 띠며 마현을 쳐다봤다.
“소승의 견식이 낮아 마교에 사공자가 있었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사실 무허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무림맹 인물들 모두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이 알기로 무림에 알려진 마교의 공자는 셋이었기 때문이다.
“그새 교주께서 새 제자를 맞이하신 모양입니다. 아, 빈도는 무당파 학방입니다.”
마현이 잠시 눈여겨보았던 무당파 사내가 다가와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네 번째 공자는 맞으나 교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마현은 눈웃음을 살짝 지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좌중이 약간 술렁거렸다.
“후배가 농이 심하시구먼. 공자는 교주의 제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아는데…….”
그때 삐딱한 목소리가 무허와 학방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곧 그곳에서 푸른 비단 무복을 입은 한 장년인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굳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분은 무림맹 내 세가 대표로 오신 남궁이환 대협이십니다.”
서둘러 학방이 나서서 남궁이환을 소개했다.
‘흠…….’
마현은 속으로 나직한 음성을 토하며 무림맹 인물들을 살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자세히 살피니 묘하게 두 무리로 나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림맹이 정식 기구가 아니라고 하더니만……, 역시 오파일방과 육대세가 사이에 주도권을 두고 알력이 있는 모양이군.’
마현은 남궁이환을 향해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염라서생 허진 부교주님의 제자입니다.”
“허어……, 아미타불.”
“무량수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는지 무허와 학방이 동시에 나직한 불호와 도호를 내뱉었다.
“…….”
뒤늦게 앞으로 나선 남궁이환은 그저 눈빛을 착 가라앉히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마현은 그런 남궁이환을 향해 부드럽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무허의 말에 마현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흑풍대는 들어라. 지금부터 무림맹 귀빈들을 호위한다.”
“명!”
허공에서 방향을 알 수 없는 음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스르륵.
이어서 무림맹 인물들의 주위로 흑풍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헙!”
“헛!”
그들 바로 옆으로 흑풍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무림맹 인물들은 저마다 헛바람을 터트렸다. 이토록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제대로 기척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가시지요.”
특히 무허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만큼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이 막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천산 협곡 안으로 팔두마차와 한 인마가 들어섰다. 그리고 팔십여 인마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
새로운 무리의 등장에 마현과 무림맹 인물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북해빙궁.”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음성에 모두 자연스럽게 순백의 마차를 지나쳐 그 위에 꽂혀 펄럭이는 새하얀 깃발을 주시했다. 그것은 새하얀 비단에 파란색 눈보라가 그려져 있는 북해빙궁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마현은 북해빙궁 마차를 향해 연신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있는 사내, 대공자 추도영을 보자 살짝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소를 띠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대공자님, 오랜만입니다.”
마현은 고개만 약간 숙였다.
“오랜만이네.”
고개를 까닥이며 추도영이 말에서 내려섰다. 그리곤 무림맹 사람들을 향해 몸을 틀어 포권을 취했다. 그렇게 짧은 인사가 오갈 때 마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북해빙궁의 팔두마차를 쳐다봤다.
창문으로 한 여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흑풍마군 마현입니다.”
못 봤다면 모를까, 눈이 마주쳤으니 마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설린이예요.”
그것이 끝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주고받을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현은 다시 무림맹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마현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설린의 얼굴은 여전히 인형처럼 무표정했다. 하지만 눈동자는 미약하지만 짧게 흔들렸다.
흥미로운 사내였다.
이제껏 자신을 봐오던 다른 사내들과는 뭔가 달랐다.
솔직히 설린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별로 자각하지는 못한다. 다만 주위에서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천하일색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니 그런가 보다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내들이 자신의 외모를 보는 순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으니, 자신의 외모가 확실히 아름답긴 아름다운 모양이라고 머리로만 이해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그런 모습들만 봐왔는데 조금 전 인사를 나눈 마현이란 자는 달랐다. 그냥 인사만 주고받고 고개를 돌린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이어서일까?
왠지 마현이란 자에게 시선이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무림맹 사람들의 인사가 이어지자 그녀의 눈은 다시 공허함으로 가득 찼다.
* * *
뜻하지 않게 본산으로 들어가는 인원이 늘어났다.
하지만 1백 명이 훌쩍 넘는 수임에도 불구하고 본산으로 향하는 길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잘 어울리지 않는 세 무리가 모였으니 인사 말고는 달리 할 말조차 없었던 것이다.
“천하 어디에도 이처럼 천애의 철옹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바로 추도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