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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64화 (64/351)

# 64

14화

한한파파는 설린의 변화가 마현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웃으시면 좋으련만…….’

마현 때문에 설린의 가슴속에 감정의 변화가 생긴 것은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지 밝고 예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한파파로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좀처럼 판단할 수 없었다.

“아가씨?”

상황이 어찌되었든 한한파파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설린을 다시 불렀다.

“으, 응?”

설린이 엄지손톱을 입에서 떼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한한파파는 짐짓 모른 척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휴우.”

설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파.”

“예.”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그리고 여기가…….”

설린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상해.”

메말랐던 설린의 가슴에 감정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한한파파는 부드럽게 웃으며 설린의 손을 잡아 침상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지 말고, 이 파파에게 자세히 말해보세요. 무엇이 문제인지…….”

설린은 한한파파의 손에 이끌려 침상 끝에 걸터앉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왜…….”

설린은 입을 열었지만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한한파파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 사공자…….”

“사공자요?”

“으, 응.”

“흑풍마군 마현 사공자를 말씀하시는 거 맞으시죠?”

“……어.”

“그가 왜요?”

“그게…….”

설린은 마현을 처음 만난 시점부터 호여정에 가기 전 만남, 그리고 호여정에서 있었던 일과 그때 주고받았던 전음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내가 잘못한 걸까?”

설린은 마치 갓난아이처럼 조심스럽게 한한파파에게 물었다.

한한파파는 잡고 있던 설린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따듯한 느낌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그런 것 같네요. 어찌되었든 아가씨께서 거짓말을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그가 거칠게 말을 했어도 그 순간 아가씨를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싸주었잖아요.”

“그렇지만…… 그 사람만 보면 기분이 나빠.”

설린의 말에 한한파파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래도 사과할 것은 사과를 해야지요.”

“후우…….”

설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받아줄까?”

“아무렴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사과하는데 어느 사내가 안 받아주겠어요.”

한한파파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흘러내린 설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그 종소리를 들은 설린은 잠시 고민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파.”

“……?”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이 야밤에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갑작스러운 설린의 행동에 한한파파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과하러.”

“아, 아가씨!”

한한파파가 불렀을 때 설린은 이미 방을 나가 버린 후였다.

* * *

밝은 빛을 만들어내는 라이트 구(球) 아래 마현이 앉아 있었다.

오늘 뜻하지 않게 세 공자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언젠가는 싸워야 할 상대들이라 상관이 없었지만, 그 문제의 발단이 설린이라는 점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녀를 떠올리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댕.

그때 밖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일단 만나봐야겠군. 무슨 의도로 나를 골탕 먹였는지 물어봐야겠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거라면 용서하지 않는다.’

『백 년을 기다려보세요, 내가 가나.』

『기다리겠다. 와라!』

『흥!』

막 일어서려는데 호여정을 떠나며 남긴 설린의 전음이 떠올랐다.

“흠.”

잠시 엉거주춤 서 있던 마현은 나직한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오지도 않을 자리에 굳이 나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얼굴이야 다시 볼 테니…….’

기분이 조금 상하기는 했으나 오늘의 일이 마현에겐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해명을 듣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마현은 다른 것에 집중했다.

“흑풍대주.”

스르륵.

“예, 주군.”

마현 옆으로 왕귀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풍대에 전하라. 오늘부터 긴장의 끈을 아주 느슨하게 풀어놓으라고.”

“예?”

호여정의 일로 긴장의 끈을 바싹 조이라는 명이 내려질 줄 알았다. 그리고 이미 왕귀진은 그렇게 명을 내린 후였다.

그런데 그 반대의 명이라니?

왕귀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긴장의 끈을 아주 느슨하게 놓으라고 명했다.”

“신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현은 다시 한 번 차근히 말했지만 왕귀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후훗.”

마현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툭 내뱉었다. 마기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덫을 놓아야지.”

여전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왕귀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알고, 그렇게 명을 내리도록.”

“명!”

이해할 수 없는 명이지만 복명하는 왕귀진의 음성엔 망설임이 없었다.

“세 마리 호랑이 중 가장 큰 놈부터다.”

마현의 눈동자에서 마기가 맴돌다 사라졌다.

* * *

왁자지껄하던 호여정은 자정이 되자 아주 조용했다.

사박, 사박…….

여인의 발자국 소리가 그런 호여정의 정적을 깨트렸다.

“하아.”

급히 달려온 탓에 설린의 뺨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고, 깊은 숨을 내쉬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선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아직 안 왔구나.’

설린은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게 가라앉히며 호여정으로 올라섰다.

“아!”

호여정으로 올라선 설린의 입술이 다시 벌어지며 자그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달빛이 은은하게 부서지는 작은 호수의 정취에 그만 취해 버린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자그만 돌멩이 하나로 만들어진 파장이 더 큰 물결을 불러오듯 그녀의 감정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더 풍부해지고 있었다.

설린은 호여정에 만들어진 돌로 된 의자에 앉아 달빛과 호수를 감상했다.

그렇게 시간이 점점 흘렀다.

반 각, 일 각……, 한식경, 반 시진……, 그리고 한 시진.

댕, 댕!

축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호여정을 울렸다.

여전히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설린의 표정은 차가웠다.

조금 전 지었던 따뜻한 눈빛도, 미소도 지금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설린이 무릎 위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찬바람도 비켜갈 것만 같던 설린의 얼음장 같은 표정이 서서히 옅어지며 전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메마른 표정으로 돌아갔다.

공허한 눈동자로 아무런 의미 없이 호수를 바라보던 설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열렸던 감정의 문이 다시 닫힌 것이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어.’

그렇게 설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객당으로 돌아갔다.

* * *

어젯밤 마현의 명에 흑풍각 대연무장에서 흑풍대원들이 한바탕 술잔치를 벌였다. 모두가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진탕 술을 마셨고, 대부분 연무장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왕귀진이 마현의 명을 아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른 새벽 그 사실은 무영대의 귀에도 들어갔고 이어 추도영에게로 보고가 올라갔다.

추도영은 밤새 침소에 들지 않았다.

분노에 몸을 떨며 이를 박박 갈았다.

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추도영의 충혈된 눈이 그 보고에 반짝였다.

자그마치 근 2년이었다.

부마전 안에서 분명 자신의 눈을 피해 그 어떤 힘을 키운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는 자신 있다고 판단했기에 어제 저녁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더불어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사검!”

추도영은 홀로 중얼거리다가 웅천수검 중 무영대를 관할하는 사검을 불렀다.

“예, 주군.”

추도영 앞으로 사검이 내려서며 군례를 취했다.

“지금 부교주는 어디에 있나?”

“연회 준비로 마주전에 거의 살다시피 합니다.”

“유령대는?”

“유령대 일부가 부마전을 지키고 있지만 대부분 부교주를 따라 마주전에 있습니다.”

그 대답에 추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풍대는 모두 고주망태가 되어 정신을 잃고 있고, 소수의 유령대만이 부마전을 지키고 있다?”

추도영의 눈빛에 조소가 담겼다.

‘부교주의 유령대를 맹신하는 모양이군. 언제나 울타리가 되어줄 거라 여긴 것인가? 후후후,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곳이 마교임을 아직 모르는 애송이군.’

“주제도 모르는 마현, 그놈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추도영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사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영대원…… 아니야, 확실한 것이 좋지. 무영대주와 함께 지금 당장 흑풍각으로 가서 흑풍대 한 놈을 납치해 오라. 너희 둘이라면 흑풍대 한 놈쯤은 소리 소문 없이 납치할 수 있을 것이다.”

“명!”

추도영의 눈에서 살심이 뿜어져 나왔다.

“마현, 네놈이 어젯밤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추도영의 몸에서 짙은 마기가 폭사되었다.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네놈의 목을…….”

콰직.

서탁 한 부분이 추도영의 손에 의해 뜯겨져나갔다.

“꺾어 버리겠다.”

* * *

띠링, 띠링, 띠리리링―

알람 소리에 서탁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마현이 눈을 떴다.

‘틈을 보이자마자 바로 움직임을 보이다니 어지간히도 분했던 모양이군.’

마현은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들린 알람 소리는 흑풍각에 쳐놓은 알람 마법의 경계음이었다. 즉, 누군가가 알람 마법진 안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바로 움직이는 걸 보면, 한편으로 항상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마현은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투명화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쯤 흑풍대 역시 알람 마법의 종소리를 들었겠지?’

흑풍대는 모두 대연무장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서른 명의 흑풍대원 중 왕귀진을 포함해 스물다섯 명은 정말 취해서 쓰러졌다.

하지만 부대주 철용을 비롯해 다섯 명은 아니었다. 모두 마시고 죽자는 분위기 속에서도 술기운을 내력으로 제어하며 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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