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6화
“말 그대로이지요.”
순간 세 장로의 눈이 반짝였다.
“율법, 강자 군림! 끌끌끌.”
“그 말씀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율법은 없지만…… 그래도 선례를 살펴보면, 서열이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이길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 앉았던 걸로 기억하오만.”
가릉은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런 일이 있었소이까?”
회회혈마가 가릉에게 바싹 다가붙으며 재차 되물었다.
“근래에는 없었지만, 있긴 있었소이다. 물론 본교 역사상 공자들끼리 이런 일은 없었지만 비슷한 경우는 몇 차례 있었지.”
“예를 들면요?”
삼안혈화와 역천마도 역시 가릉 곁에 바싹 다가붙으며 조근조근 말을 낮췄다.
“대략 50여 년 전. 현 교주님이 소교주 시절에 있었소.”
가릉은 가깝게 다가선 셋을 재밌다는 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터진 일. 밑져야 본전 아니겠소이까? 비록 늙은이오나 내 입 하나 더 거들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 듯싶은데…….”
가릉은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수염을 배배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면 주군께 바치는 선물로 그만한 게 없을 듯싶으오.”
“될까요?”
삼안혈화는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끌끌끌, 그럼 이 몸은 먼저 들어가오.”
가릉은 셋을 남겨두고 먼저 마주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선물이라…….”
회회혈마는 조용히 가릉의 말을 되새겼다.
“늙은 생강이 맵군.”
역천마도의 중얼거림에 회회혈마와 삼안혈화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본교에서만 백여 년을 보낸 가 당주요. 그가 그 말을 꺼냈다면 승산이 있다는 소리겠지.”
역천마도의 말에 회회혈마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시다, 해봅시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주군 이외의 길은 이제 없으니까.”
회회혈마의 결심에 삼안혈화와 역천마도도 동의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이목이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셋이 대공자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셋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측은함보다는 조소가 담긴 눈빛들이었다.
‘마치 이제는 자신들의 세상이라는 눈빛이군.’
회회혈마는 장로들의 거북한 시선에 이미를 찌푸리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거참, 딱한 일을 당했구먼.”
그때 회회혈마 옆자리에 앉은 대장로 혈월마성이 위로랍시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표정이나 음성은 냉랭하기 그지없어 회회혈마의 낯을 더욱 찌푸리게 할 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어떤가? 이공자를 대공자로 추대하는 것이…….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은 잊어버리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적통이신 이공자께서 대공자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일로 보는데. 이제 이장로나, 삼장로, 그리고 칠장로도 살아야 하지 않나.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와 손을 잡지. 우리와 자네들만 손을 잡는다면 이공자께서 소교주 자리에 오르는 것은 확정이 되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테니,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그간의 일은 모두 잊음세.”
대장로 혈월마성은 평소와 달리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사실 지금 회회혈마가 혈월마성과 같은 입장이었어도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과거야 과거고, 중요한 것은 미래일 테니까.
“크흠!”
회회혈마는 불편한 기색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그래. 쉽게 대답할 것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잘 생각해 보게. 아! 혹시나 해서 말일세. 내 한 가지 약조를 하지. 제안을 받아들이면 과거의 은원은 완전히 묻어 버리겠네. 다른 이들과 달리 토사구팽하지 않겠네.”
혈월마성은 턱으로 슬쩍 삼안혈화에게 연신 말을 걸고 있는 육장로 적두귀효를 가리켰다.
회회혈마가 혈월마성의 턱짓에 시선을 옮기니 삼공자 측인 적두귀효가 삼안혈화에게 바싹 달라붙어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대화 내용을 들어보지 않아도 지금 자신이 듣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문득 세상인심이라는 것이, 그리고 정치라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만 해도 죽일 듯이 서로 반목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말을 붙이고 있지 않은가.
‘훗…….’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래서 세상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지.’
회회혈마는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삼안혈화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앉은 역천마도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 어떤 몸짓도 없었지만 그들은 눈을 통해 많은 말들을 했다. 가릉 또한 그들에게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눈웃음을 보내왔다.
회회혈마는 모두의 눈빛을 확인한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요 며칠 숨 가쁠 정도로 모든 것이 홱홱 변했다.
‘어차피 사공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몸. 다시 태어나는 거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그렇게 회회혈마가 다시 한 번 자신을 채찍질할 때 대전 안으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주님 납시오.”
그 소리에 대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웅성거림이 일시에 사라지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회혈마 또한 감았던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사공소와 허진이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앉으라.”
사공소의 목소리는 매우 무거웠다.
“마교 천세, 천세, 천천세.”
“마교 천세, 천세, 천천세.”
모든 이가 복창을 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오늘 연회가 끝난 후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사공소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무거워 대전 안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가슴에 납덩이 하나씩을 올린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율 군사.”
“예, 교주님.”
“말하라.”
“예.”
율기는 사공소를 향해 허리를 숙인 후 몸을 돌렸다.
“오늘 교주님의 연회가 끝난 후 대공자 웅천마군과 사공자 흑풍마군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일로 대공자 웅천마군이 사공자 흑풍마군의 손에 숨졌습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있었던지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조용하라!”
사공소의 마기가 담긴 목소리가 한순간 대전 안을 점령했다. 그러자 바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것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흑풍마군은?”
“지금 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끼이익, 쿵.
마주전 문이 열리며 마현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 * *
마현은 굳게 닫힌 마주전 문 앞에 서 있었다.
얼마 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드시면 됩니다.”
비영대원의 말에 마현은 열린 마주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마현의 발걸음은 흡사 큰 전쟁에서 이긴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보폭도 컸지만 무엇보다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턱을 들어올렸고, 허리도 곧게 펴고 있었다.
마현은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으며 대전에 모여 있는 근 서른 명의 수뇌부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중앙 태사의 앞으로 걸어갔다.
“사공자 흑풍마군, 교주님의 부름을 받고 들었나이다.”
그 앞으로 다가선 마현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흐음…….”
너무도 당당한 마현의 모습에 사공소는 순간 침음성을 머금었다. 마현은 그 음성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공소 앞쪽에 자리한 허진에게로 향했다. 허진의 눈을 잠시 응시한 마현은 사공소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흑풍마군.”
“예, 교주님.”
공손했지만 당당한 목소리로 마현은 대답했다.
“왜 대전으로 오라 한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왜 대전으로 불려온 것인가?”
사공소의 물음에 마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의 율법대로 대공자 웅천마군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마현의 대답에 대전은 금세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사공소는 미간을 좁혔다.
“조용하라.”
하지만 웅성거림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쾅!
“조용하라는 본좌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태사의 한쪽이 사공소의 주먹에 산산이 부서졌다. 또한 목소리에는 마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피의 율법이라고 했는가?”
사공소는 다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마현에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교주님.”
“이유는?”
“북해빙궁의 요청에 의해 그들을 배웅해 주고 돌아오는 길, 대공자의 직속 무력단체인 웅천대가 저를 습격했습니다.”
“그게 대공자를 죽인 이유인가?”
“달리 다른 이유가 필요한 것인지 감히 신이 교주님께 물어봐도 되겠나이까?”
마현의 반문에 사공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동시에 대전 안의 모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누구도 철혈마제 사공소에게 그렇게 반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사공소는 잠시 마현을 노려보다 율기에게 물었다.
“율 군사, 흑풍마군의 말이 맞는가?”
“맞사옵니다. 하오나 그 자리에 웅천대만이 아니라 호원칠무대 중 염왕대가 동행했사옵니다.”
“염왕대?”
“그러하옵니다.”
사공소는 다시 마현에게 물었다.
“아는 일인가?”
“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마현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사공소는 그런 마현의 눈을 응시했다. 마현 역시 사공소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염왕대주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들라하라.”
사공소는 마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명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염왕대주 기건양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상당히 긴장한 모습으로 대전 중앙까지 걸어온 그는 사공소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대가 염왕대주인가?”
“그, 그러하옵니다. 교주님.”
그제야 사공소는 마현에게서 시선을 떼고 기건양을 쳐다보았다.
“본좌의 물음에 거짓을 고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며, 명!”
“웅천대와 함께 왜 천산 밖으로 나갔나? 누구의 명이었나?”
사공소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기건양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짓눌려 금세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 그건…….”
마현은 기건양이 사공소의 심령에 사로잡힌 것을 깨달았다. 마현은 슬쩍 눈을 돌려 회회혈마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회회혈마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마현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리한 수를 쓸 수밖에 없겠군.’
마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고개를 돌려 기건양을 쳐다보았다.
『갈!』
매직마우스에 마력을 담아 기건양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쿵!
미약하지만 파르르 떨리던 기건양의 몸이 툭 멈췄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심령을 뒤흔든 탓인지 기건양의 코에서 한 줄기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사공소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사공소는 눈동자만 돌려 마현을 쳐다보았다. 마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흠!’
사공소는 속으로 무거운 침음성을 삼켰다.
“대, 대공자께서 시, 신을 은밀히 찾아와 부, 부탁을…… 했사옵니다.”
그사이 기건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알지 못하는 힘이 끼어들었음을 사공소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의 주체가 바로 마현이라는 것 또한 눈치를 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섰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사공소는 다시 기건양에게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