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13화
“그럼 말을 고르러 가볼까?”
“주, 주군.”
회회혈마는 당황하며 마현을 불렀다.
“아직 문제가 더 남았나?”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4두마차는 이장로가 준비하는 걸로 알고 있지.”
마현이 흑풍각을 나서자 회회혈마는 서둘러 밖으로 따라나섰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 보려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사이 마현은 회회혈마와 함께 교에서 관리하는 마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마교의 마장을 총 관리하는 마장주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번에 출행할 일이 있어 말을 고르려고 왔네.”
마현은 고개를 돌려 마장 안 말들을 둘러봤다.
“굳이 이곳에 오지 않아도 명마 중 몇 마리를 골라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가?”
“예.”
“하지만 난 그 사실을 알았어도 아마 직접 왔을 거네. 이왕이면 내가 직접 고르고 싶으니까 말일세.”
마장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제가 명마들이 있는 마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현과 회회혈마는 마장주를 따라 마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마장 깊숙한 곳에는 또 다른 마장이 두 채가 있었다. 그 두 채의 마장은 조금 전 이곳으로 오기 전 보던 마장과 전혀 달랐다.
좁은 우리에 십여 마리씩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우리에 한 마리씩 있었고, 그 안에 깔린 짚들 역시 훨씬 깨끗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대공자께서 타실 말들은 이 중에서 고르시면 됩니다.”
마장주는 두 채의 마장 가운데 왼쪽에 있는 마장으로 마현을 안내했다.
“저곳은 볼 수 없는 겐가?”
“아, 저 마장에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명마들을 관리하는 곳입니다.”
“그렇군.”
마현은 마장주가 안내한 마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시간이 제법 흘렀을 때 마현은 마장 안에 있는 말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다들 좋은 말들이군.”
그 말이 칭찬으로 들렸던지 마장주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여기 있는 말들은 명마 중에서도 특별한 놈들만 뽑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말을 골라도 명마 중에 명마입니다.”
마장주는 신나게 말들에 관해 설명했다.
분명 좋은 말들이기는 하지만 왠지 마현은 선뜻 말을 고르지 못했다.
그렇게 마현이 말을 고르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자 신나게 떠들던 마장주의 목소리도 차츰 가라앉았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마, 마음에 드시는 놈이 없으십니까?”
결국 마장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 명마임에는 틀림없는데…… 마땅히 마음이 가는 놈이 없군.”
마현은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응?”
그런 마현의 눈에 마장 구석에 늙은 말 한 마리가 보였다. 당연히 마장주 역시 마현이 보는 늙은 말을 보았다.
“정말 대공자께서는 보시는 눈이 아주 높으십니다.”
마장주는 마현을 데리고 그 늙은 말 앞으로 다가갔다.
“교주님이 젊으셨을 때 탔던 놈입니다. 이제는 늙을 대로 늙어 그저 죽음만 기다리는 녀석이지만 젊었을 적에는 엄청난 녀석이었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면서 수많은 명마들을 봤지만 이 녀석 발꿈치에 따라올 녀석은 한 녀석도 못 봤습죠.”
마장주는 애처로운 시선으로 늙은 말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늙을 대로 늙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지 늙은 말은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서 있기에도 힘들어 보이는데도 그 늙은 말은 어깨를 쭉 펴고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눈을 아래로 내린 채 자신을 찾아온 마장주와 마현, 그리고 회회혈마를 거만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장주는 그렇게 힘들게 서 있는 늙은 말을 안쓰러워하며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려 했다.
푸히이잉!
하지만 늙은 말은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옆으로 피했다. 마장주의 손을 거부한 것이다. 마장주는 무안해 하며 어색하게 손을 거뒀다.
“훗!”
그 광경에 마현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푸르르릉!
그러자 늙은 말이 몹시 거친 투레질을 내뱉으며 마현을 노려보았다.
마현은 그런 늙은 말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노려보았다. 늙은 말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마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마현은 그 오연한 눈빛이 너무 재미가 있어 마굿간 안으로 들어가 늙은 말 바로 앞에 섰다. 여전히 늙은 말은 마현을 노려보며 가벼운 투레질을 내뱉었다.
마현은 눈에 기운을 담았다. 기세가 마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늙은 말을 에워쌌다. 그러자 늙은 말은 짧게 몸을 떨며 움찔거리더니 거센 콧김을 몰아쉬며 마현을 더욱 매섭게 쳐다보았다.
마현은 더욱 강한 기운을 늙은 말에게 내뿜었다.
푸쉭, 푸쉭―
시간이 흐르면서 늙은 말은 지쳐 가는지 코에서 흘러나오는 김과 소리가 서서히 약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늙은 말의 말라비틀어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마현의 눈과 기세를 피하지는 않았다.
“멋진 녀석이구나.”
마현은 손을 뻗었다.
푸히이잉!
거센 울음을 터트리며 늙은 말은 딱 손이 닿지 않을 만큼만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하.”
비록 이제는 볼품없이 늙었지만 여전히 강한 자존심을 가진 늙은 말의 모습에 마현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의 이름이 무언가?”
“…….”
“아니지,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마현은 막 입을 열려는 마장주의 대답을 듣지 않고 다시 늙은 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더욱 강한 기세를 내뿜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늙은 말은 그와 똑같은 폭 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마현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고, 늙은 말은 물러났다.
그러기를 대략 일 각.
후이이잉!
늙은 말은 마현의 기세에 꺾여 힘없는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현은 그런 말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말은 여전히 마현의 손을 피했다. 그리곤 마현의 정반대 쪽으로 도망가듯 피해 버렸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마현을 쳐다보는 늙은 말의 눈빛에서 조금 전과 같은 강렬함은 없었다. 힘없고 슬픈 눈빛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이냐?”
마현은 그런 늙은 말을 보며 마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입을 열며 다가갔다.
“곧 죽을 몸이라 더 이상 주인을 섬기고 싶지 않은 것이냐?”
푸히이이잉!
마치 마현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늙은 말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토했다. 마현은 그런 늙은 말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피하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힘이 빠져서인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늙은 말은 마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마현은 늙은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시 넓은 대지로 뛰어나가고 싶지 않으냐?”
후이잉.
늙은 말은 그저 힘없이 울었다.
“나가고 싶지 않으냐? 나를 태우고 나가고 싶다면 널 다시 넓은 대지로 데리고 나가게 해주겠다.”
푸히히히잉.
늙은 말은 고개를 들어 마현을 향해 애달프게 울었다.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슬픈 눈동자였다.
“나를 주인으로 섬긴다면 너를 가장 힘이 좋았던 때로 만들어 주겠다.”
후이이잉.
늙은 말은 고개를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나를 따르겠느냐?”
마현은 늙은 말을 보며 물었다.
늙은 말은 바로 호응해 오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마현의 눈을 그냥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푸히이이잉.
그리고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려면 너는 한 번 죽어야 한다.”
늙은 말은 그 말에 마현을 잠시 쳐다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마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너의 이름은 이제 풍(風)이다!”
마현은 말의 머리 위로 손을 들어올렸다.
마현의 손에서 마력이 뿜어져나갔다. 그 마력은 늙은 말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강한 충격에 말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을 파르르 떨다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 * *
쿵!
늙은 말, 풍이 땅바닥에 쓰러지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디그!”
그르르륵―
죽은 풍이 누어 있는 땅바닥이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땅바닥 아래로 풍의 사체가 떨어졌고, 갈라졌던 땅은 순식간에 풍의 몸을 뒤덮었다. 한순간에 풍의 몸이 땅에 파묻혔다.
“헙!”
사이한 그 광경에 마장주는 헛바람을 터트렸지만 이내 손으로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비록 마장주처럼 헛바람을 터트리지 않았지만 회회혈마의 표정 역시 마장주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마기의 기원인 나 카칸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다크 스티드(Dark steed)로 죽음에서 깨어나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 마기를 담은 룬어가 마현의 입에서 흘러나와 풍이 파묻힌 땅 위로 스며들었다.
쩍!
풍이 묻혔던 땅이 꿈틀거리더니 가늘게 갈라졌다.
쩌저적!
그러던 땅이 점점 깊게 갈라졌다.
쿠히이이잉!
갈라진 땅거죽 사이로 투기가 담긴 거친 말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학―
땅거죽이 마치 몸을 일으키듯 불쑥 솟아올랐다. 그 흙덩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마현 앞으로 튀어나왔다.
푸르르르르, 쿠히이이잉!
야수의 울음소리보다 더 거친 말의 우렁찬 투레질과 울음소리가 마장 안을 가득 채웠다.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