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14화
“부, 분명 새, 새하얀 백마였는데…….”
마장주는 말을 더듬으며 손을 들어 땅속에 파묻혔다가 다시 세상으로 튀어나온 풍을 가리켰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앞발을 번쩍 들며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풍은 칠흑과도 같은 새카만 색으로 변해 있었다.
“깨어났느냐?”
마현이 손을 살짝 들어올리자 풍이 타각, 타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마현이 쓰다듬는 풍의 새카만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노쇠해 듬성듬성 빠지고 버석버석했던 말갈기 역시 찰랑찰랑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마장주나 회회혈마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단지 풍이 죽었다 살아나면서 새하얀 백마에서 잡티 하나 없는 흑마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말의 몸 상태, 풍의 몸을 휘감은 근육들이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풍의 근육은 개별적으로 보면 과할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풍을 본다면 마치 조각상처럼 매끈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풍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기와 투기는 명마를 뛰어넘는 그 이상이었다.
“저, 전설의 적혈마도 저, 저 정도는 아닐 거야…….”
마장주는 말을 심하게 더듬으며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는 듯 눈을 비비고 또 비빈 후 묵빛 풍을 쳐다보았다.
이내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이 모두 현실임을 깨달았지만 마장주는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 회회혈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 장로님. 지,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혀, 현실 맞습니까요?”
그러나 회회혈마 역시 풍을 보느라 마장주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의 목소리 자체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 회회혈마의 눈에 마현의 품에서 머리를 비비던 풍이 입을 벌려 마현의 소매를 무는 모습이 보였다.
풍은 힘껏 마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나가고 싶으냐? 대지를 달려 보고 싶은 것이냐?”
마현은 부드럽게 물었다.
푸히이이잉!
풍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나가자!”
쿠히이이이!
기분 좋은 투레질을 한 풍은 몸을 돌렸다.
기이이잉―
풍의 등과 말갈기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풍의 등껍질이 마치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지며 뒤로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말갈기 일부가 길어졌다.
마현은 그런 풍 위로 올라타며 길어진 말갈기를 잡았다. 바로 말고삐였다.
“이장로.”
풍 위에 올라탄 마현이 회회혈마를 불렀다.
“한 시진 후, 흑풍대를 소집시켜 놓도록. 가자, 풍아!”
마현은 회회혈마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명을 내리고는 풍의 고삐를 당겼다.
푸히이이잉!
풍이 두 앞발을 번쩍 들어올리며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투각, 투각, 콰과과과곽!
풍은 바람처럼 마현을 태우고 마장을 벗어나 사라졌다.
“하, 하하하. 이, 이장로님. 저, 정말 제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 맞지요?”
“흠…….”
검은 바람이 되어 사라지는 마현과 풍을 바라보며 묻는 마장주의 질문에, 회회혈마는 그저 무거운 침음성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한 시진 후.
흑풍대는 회회혈마가 전한 마현의 명에 의해 흑풍각 내에 마련된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두두두두두!
흑풍대가 모여 있는 흑풍각 담장 너머로 땅이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콰광!
흡사 땅이 벽력탄에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흑풍각 담장 위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푸히이이잉!
거대한 그림자는 우렁찬 울음을 토해냈다.
쿵!
검은 그림자는 흑풍각 담장을 넘어 연무장 위로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인해 연무장 위에 깔린 장판석들이 들썩이며 먼지를 만들어냈다.
그르륵, 그르륵.
검은 그림자, 풍은 장판석을 앞발로 긁으며 거친 숨을 코로 내쉬었다. 뿌연 콧김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흑풍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 그림자에 놀라는 모습들을 보였지만 이내 그 검은 그림자가 한 마리의 흑마와 마현이라는 것을 알고는 달려왔다.
“주군!”
흑풍대는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허리를 숙였다.
마현은 풍에서 뛰어내렸다.
풍은 기분이 좋은 듯 마현에게 머리를 마구 비비며 콧김을 연신 몰아쉬었다.
“일어나라.”
마현의 명에 흑풍대가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중원으로 나간다.”
마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풍대의 얼굴에 하나같이 설렘과 흥분이 묘하게 뒤섞였다.
“근 넉 달에 가까운 여정이 될 것이다. 교에서 너희들에게 그동안 탈 말을 지급하겠지만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내 너희들에게 선물을 줄까 한다.”
마현은 손을 뻗어 다크 스티드, 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쿵!
풍은 앞발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르르륵!
그러자 풍 주위로, 연무장의 땅거죽이 불룩 솟아올랐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땅거죽이 툭 터지자 그 안에서 흑마들이 뛰쳐나왔다.
모두 서른 마리의 흑마였다. 그 흑마들 역시 풍과 같은 다크 스티드였다.
자욱한 마기를 내뿜는 다크 스티드의 등장에 흑풍대는 잠시 놀라며 움찔하는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내뿜는 기운이 자신들이 다스리는 스켈레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들의 패밀리어가 될 것이다.”
흑풍대는 곧 마음에 드는 다크 스티드를 찾아 흩어졌다. 대부분 다크 스티드를 찾아 움직였지만 개중의 몇몇은 다크 스티드가 주인을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잠시 혼잡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짝을 찾았다.
“너희 애마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라.”
마현의 가르침에 흑풍대가 저마다 다크 스티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들의 모습이 검은 연기로 화하더니 흑풍대의 팔을 휘감으며 스며들었다.
이미 흑마법에 익숙한 흑풍대였기에 별로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다크 스티드를 받아들였다. 그런 흑풍대의 왼팔에는 다시 마기로 만들어진 문신이 그려졌다.
그때였다.
끼익―
흑풍각으로 들어오는 작은 문이 활짝 열렸다.
투각, 투각, 투각, 투각.
언뜻 봐도 상당한 준마들이 떼를 지어 흑풍각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준마들을 이끌고 들어온 이는 마장주와 회회혈마였다.
“주군, 앞으로 흑풍대가 쓸 군마들입니다.”
회회혈마가 마현 곁으로 다가와 마장주가 이끌고 온 말들을 가리켰다.
“속하가 마장주와 함께 공을 들여 괜찮은 놈들로만 뽑아왔습니다.”
회회혈마의 말에 마장주가 허리를 넙죽 숙였다.
쿠히이잉!
준마들을 보자 풍이 마기를 내뿜으며 무거운 투레질을 내뱉었다. 그러자 준마들이 불안한 울음을 터트리며 낑낑거리는 모습들이었다. 그런 준마들을 향해 풍이 다리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쾅!
풍이 내려찍은 장판석 하나가 쩌저적 금이 가더니 산산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기세 때문이었을까.
준마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머리를 일제히 아래로 내려뜨렸다. 개중에는 오줌을 지리는 녀석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허어!”
마장주는 풍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풍처럼 기세로만 다른 말들을 제압하는 말은 없었다. 물론 힘이 뛰어나 유독 기세등등한 말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말들을 이렇게 모두 머리를 숙이게 하거나 오줌을 지리게까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때였다.
“어? 어?”
“이, 이거 왜 이래?”
흑풍대의 왼팔이 마치 물 밖으로 튀어나와 팔짝팔짝 뛰는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 진정해.”
철용이 당황한 듯 왼팔을 보며 소리쳤다.
흑풍대의 왼팔에 잠든 다크 스티드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스켈레톤처럼 한 몸이 되었기에 철용을 비롯해 흑풍대원들은 왜 다크 스티드들이 이렇게 날뛰는지 이해했다.
바로 흑풍각 내로 들어온 준마들 때문이었다. 다크 스티드들은 그 준마들이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태우기 위해 온 것임을 알아차렸다.
사실 흑풍대원의 몸에 잠든 다크 스티드들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이 알게 된 이유는 바로 서른 필의 다크 스티드를 이끄는 풍이 때문이었다.
쿠히이잉!
풍이 마치 명령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이익!”
결국 흑풍대원들은 날뛰는 다크 스티드를 어찌하지 못하고 밖으로 풀어주었다.
쿵! 쿵! 쿵! 쿵! 쿵!
흑풍대원들의 왼팔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들이 칠흑 같은 흑마가 되어 연무장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릉.
모습을 드러낸 다크 스티드들은 흡사 맹수의 울음과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마기와 함께 투기를 일제히 내뿜었다.
쿠히이잉!
그때 풍의 울음이 다시 한 번 터졌다.
그러자 다크 스티드들이 일제히 서른 마리의 준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맹수가 사냥하듯 준마들을 덮친 다크 스티드들은 뒷발로 후려치거나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었다.
후이이잉!
푸히이이잉!
펑! 펑! 콰직!
준마들이 서 있던 곳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풍아, 그만 하거라.”
마현이 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풍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울음을 터트린 후, 무거운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히이잉.
곧바로 매서운 기세로 준마들을 몰아치던 서른 필의 다크 스티드가 다시 흑풍대원들에게로 돌아갔다.
다크 스티드들이 한 번 휘몰아쳤던 곳에는 서른 필의 준마들이 모두 쓰러진 채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다행이 죽은 말은 없어 보였다.
그런 준마들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크 스티드들은 각각 주인들의 품에 머리를 비비고 서 있었다.
“하, 하하…….”
울음 같은 웃음을 터트리던 마장주는 결국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연신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이제는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된 회회혈마는 마현의 능력에, 그리고 흑풍대의 무서움에 다시 한 번 몸을 파르르 떨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가자!”
풍 위에서 마현이 명을 내렸다.
“명!”
“명!”
그 뒤로 다크 스티드를 탄 흑풍대가 일제히 명을 받들었다.
두두두두두두!
마현과 흑풍대는 흑마들과 함께 본산을 빠져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서른한 기의 인마의 모습은 마치 검은 바람이 사방을 휘저으며 달려 나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 *
시냇물이 고요하게 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다리 밑으로 넝마보다 못한 천 조각을 엉성하게 두른 움막 두 채가 보였다.
그 시냇물과 바로 옆에 지어진 두 채의 움막을 마현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눈을 처음 뜬 장소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마음을 연 친구, 손정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아직 정오가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움막은 조용했다.
모두가 빠져나가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 조용한 것이었다.
사천으로 들어오자마자 마현은 이곳으로 왔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냥 와 보고 싶었고, 그런 마음보다 몸이 먼저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추억에 잠겨 움막을 내려다보던 마현의 눈에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 움막에서 나오는 거지 아이들이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