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91화 (91/351)

# 91

16화

“파파!”

설린의 얼굴에 표정이 나타났다.

“호호호호.”

한한파파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뭔데?”

좀처럼 먼저 질문하지 않는 설린이었지만 이번에는 먼저 물었다.

“징마동에서 나왔데요.”

“그래? 건강하게?”

혹여나 어렵사리 열린 설린의 감정이 다시 닫힐까봐 한한파파는 좀 더 얄궂게, 좀 더 과장되게 마현을 이용했다. 그렇게 한 1년을 보냈다. 그로 인해 아주 조금이지만 평상시에도 설린은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그 후에는 마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굳이 마현을 이용하지 않아도 설린의 감정이 이제는 닫히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비록 감정을 드러내는 폭이 굉장히 적지만 천천히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과 달리 설린이 마현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기에, 사실 물어봐도 알려줄 것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말은 주고받지 않았었다.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랜만에 마현에 대한 소식이 들리기에 말을 꺼냈을 뿐이다. 하지만 돌아온 설린의 반응은 생각보다 민감했다.

관심을 보일 줄은 알았지만, 이건 예상 밖이다. 그다지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건강하게 나왔는지를 묻지는 않는다. 더욱이 설린이라면 아예 묻지 않는다. 그런데 물었다.

한한파파는 설린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알았다. 설린이 마현에 대해 그저 그런 평범한 감정 이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그걸 알자 한한파파는 한순간 당황했다.

한편 이제까지 마현을 이용해 설린의 감정을 건드린 것이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만약 자신의 그런 행동 때문에 순수한 설린이 마현에게 이성적 감정을 느낀 거라면?

그런 생각이 들자 한한파파는 문득 눈앞이 캄캄해졌다.

“파파?”

한한파파가 생각에 잠겨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설린이 그녀를 다시 불렀다.

“예, 예?”

“뭐해?”

설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닙니다.”

한한파파는 조금 전과는 달리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설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강하게 나왔답니다.”

“그게 다야?”

설린은 한한파파의 대답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한한파파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설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게 인연인지도…….’

설린의 마음을 연 것도 마현이었고, 그녀의 마음에 어느 정도 깊이인지는 모르나 평범한 감정 이상으로 자리 잡은 이도 마현이었다.

“마 공자가 대공자 신분으로 석 달 후에 열리는 무림맹 무림대회에 참석한답니다.”

“그래?”

고개를 살짝 끄덕인 설린은 몸을 돌려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무림맹, 무림대회?”

한한파파는 보았다.

설린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걸려 있음을.

* * *

마현은 검은 섭선을 펼쳐 흔들며 대로를 걷고 있었다.

마땅히 어디를 가야겠다는 목적도 없는 발걸음이라 여유로웠다. 특히 검은 비단으로 지어진 서생 옷에 섭선마저 검은 색이라 그런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현은 섭선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직접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승인 허진이 무림에 나오기 전에 선물로 준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자신의 제자라는 것.

허진은 서생 옷을 즐겨 입으며 항상 섭선을 들고 다녔다. 그래서 서생 옷과 섭선은 허진의 상징이기도 했다.

더욱이 마현 역시 무복이 아닌 서생 옷을 즐겨 입자, 허진은 이왕이면 섭선까지 드는 것이 어떠냐며 반강제적으로 손에 쥐여 주었다.

‘뭐, 그리 나쁘지는 않군.’

촤악!

마현은 일부러 소리를 내어 섭선을 펼친 후 부채질을 시작했다.

‘이 기회에 섭선을 이용한 마법이라도 만들어 볼까?’

허진의 독문무공에 섭선을 이용한 무공, 즉 선공(煽功)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허진이 선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독문무공이 아닐 뿐이었다. 그렇기에 마현은 선공을 배우지 않았다.

‘뭐 대충 바람 계열 마법을 이용하면 그럴듯할 것 같은데……. 부채를 확 펼쳐 뿌리며 윈드 커터를 날리면?’

탁!

마현은 히죽 웃으며 섭선을 접었다.

‘선기(煽氣)! 흠…… 부채를 접어 휘두르며 마나 미사일을 쏘면? 선탄(煽彈)?’

“하하하하!”

생각만으로도 재미를 느낀 마현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두두두두두!

그런 마현의 즐거운 상상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말발굽 소리였다.

“비켜라, 빨리 비키지 못할까?”

이어 내력이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힉!”

“꺄아악!”

“으악!”

대로를 걷던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당탕탕탕!

콰당!

급히 피하느라 사람들이 넘어지고 몇몇 가판대가 부서지는 모습까지 보였다.

마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갈라지는 사이로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무복을 입은 것과 조금 전 내력이 담긴 목소리를 터트리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임에 틀림없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를 말을 몰아 달리는 사내를 보는 순간 마현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사람들이 다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채찍질을 하며 말을 몰고 있는 모습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얼마나 빨리 말을 몰았는지 그 사내는 순식간에 마현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크흠!”

마현의 좋던 기분이 이름 모를 그 사내 하나로 망쳐져 버렸다.

“술이나 가볍게 한 잔 해야겠군.”

경치가 좋은 곳에서 가볍게 술 한 잔 즐기면 기분이 풀어질 것 같아 마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마현의 눈에 낯익은 객잔이 보였다.

용아객잔.

상당히 고급 객잔으로 마현에게도 인연이 깊은 객잔이었다. 바로 5년 전 손정과 헤어진 곳이었다.

“뭐 여기도 괜찮겠지?”

좀 더 찾아보면 더 좋은 곳이 있겠지만 마현은 그냥 마음이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정오가 조금 지났는데도 객잔 1층은 제법 북적거렸다. 약간 실망스러워하는 마현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점소이가 재빨리 손바닥을 비비며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가리켰다.

“조용한 곳을 찾으시면 조금 비싸지만 2층은 어떻습니까요?”

조용한 곳을 원했던 마현은 점소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1층과 달리 상당히 정갈해 보였다. 1층보다 한산하지만 2층 역시 사람들로 차 있었다.

마현은 자연스레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3층은 어떤가?”

“조용한 곳이기는 하지만 워낙 비싼 곳이라…….”

점소이조차 3층으로 안내하기엔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권하기에 부담되는 가격일 것이 분명했다.

“돈이라면 상관없네, 안내하게.”

마현의 말에 점소이는 활짝 웃으며 3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으로 안내했다.

“이곳을 올라가시면 됩니다요. 소인은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서…….”

“그런가?”

여기서 일하는 점소이도 올라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철저하게 최고급 층으로 따로 분류해 관리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3층으로 올라가자 2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장소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안내하는 하녀들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예쁘장한 하녀들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지간히 돈이 있지 않고서는 올라올 수 없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때 한 중년 사내가 하녀들 사이에서 다가왔다. 아마 이 3층만 따로 관리하는 지배인인 모양이었다.

“홀로 오셨습니까?”

“그렇네.”

“마침 경치 좋은 자리가 하나 남았으니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현 역시 바라던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배인을 따라 3층 내부로 들어섰다.

3층에는 한 무리의 손님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가로 가는 길에 그들이 앉아 있었기에 마현은 자연스레 그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는 젊은 남녀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낯익은 여자아이도 있었다.

“어?”

여자아이가 마현과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조금 전 당과 하나를 나눠 먹던 그 여자아이였다.

* * *

몸을 간단히 씻은 설린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북해빙궁의 심처이자 궁주 설관악이 머무는 북설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파파.”

“예, 아가씨.”

“아버지께서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거야?”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

설린은 한한파파와 함께 북설궁 내 설관악의 집무실 겸 서실로 들어갔다.

“왔느냐?”

서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설관악은 설린과 한한파파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에 놓인 다탁으로 향했다.

“한한파파도 앉으세요.”

설린의 뒤에 서 있는 한한파파에게 설관악은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북해빙궁에서 설관악이 유일하게 말을 높이는 이가 바로 한한파파였다.

나이도 나이지만 그보다는 설린을 낳으며 죽은 어미를 대신해 반평생 동안 한한파파가 설린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설관악은 그녀에게만은 말을 높이고 공손히 대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설관악은 설린의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탁에서 한 장의 서찰을 가져와 내밀었다.

“남해태양궁에서 온 서찰이다.”

설린은 조용히 손을 뻗어 설관악이 내민 서찰을 받아 펼쳐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서찰에 적힌 글귀에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서찰의 맨 마지막에 도달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서찰을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거절해 주세요.”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단숨에 잘라 버렸다.

“무슨 내용인가요?”

“한한파파도 보세요.”

설관악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서찰을 한한파파에게 내밀었다.

서찰을 집어든 한한파파의 눈은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뜬금없이 남해태양궁에서 날아온 서찰은 양곽원과 설린을 혼인시키는 것이 어떠냐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린아.”

설관악은 최대한 부드럽고 자상하게 설린을 불렀다.

“그러지 말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냐?”

“…….”

설관악의 말이 이어지면서 설린의 표정은 조금씩 차갑게 식어갔다.

“남해태양궁의 양 소궁주 정도면 너의 배필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고 이 애비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몇 번 만나 보았지만 인품도 그만하면 되었다 싶고.”

“…….”

“뭐 이 애비야 너를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고 싶지 않다만…… 이 정도 배필이면 보낼 수 있을 거라 여겨진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설관악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설린은 가차 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

“싫어요.”

“린아…….”

설관악은 설린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설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기에 더 이상의 말이 소용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

“석 달 후에 있을 무림맹 무림대회에 저를 보내주세요.”

“으응?”

북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설린이 먼저 무림맹으로 나가겠다고 하니 설관악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그랗게 떠진 그의 눈은 설린을 잠시 쳐다보다 한한파파에게로 향했다.

한한파파의 표정을 보자 설관악은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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