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92화 (92/351)

# 92

17화

“흠…….”

사실 설관악은 이번 무림맹 무림대회 때 자신의 제자이자 부궁주의 아들인 냉천휘를 보내려 했다. 비록 설린이 소궁주였지만 여인의 몸이었다.

혹여나 지금처럼 남해태양궁과 같은 곳에서 혼사가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부궁주의 아들인 냉천휘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냉천휘 역시 무림에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냉천휘를 무림맹으로 보내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설린이 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는 게냐?”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설린의 대답에 설관악은 깜짝 놀랐다.

이런 말을 할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한파파에게서 설린의 메마른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한한파파의 표정으로 보건대 단순히 바람을 쐬고 싶어 나가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생각을 해보마.”

“아니요, 허락해 주세요.”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한 것도 놀랄 일인데, 설린은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흠…….”

설관악은 잠시 설린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설린의 성격상 막는다고 해서 안 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았다, 그럼 천휘랑 가거라.”

“냉 사제랑요?”

“그래. 이제 천휘 역시 무림에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혹여나 네가 밖으로 시집을 가면 그 녀석이 이 북해를 이어받아야 할 테니……!”

설관악은 무심결에 말하다가 급히 입을 닫았다.

딸 설린은 항상 북해빙궁은 자신이 이어갈 것이라 장담해 왔다. 그래서 설관악이 그런 말을 꺼내면 더욱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설린이 냉천휘랑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소궁주는 소궁주이고 사저지간은 사저지간이었다.

“그렇게 하세요.”

설관악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북해는 자신이 이끌어갈 것이라고 차갑게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설린의 목소리나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고 판단한 설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볼게요.”

“그래. 그리고 한한파파는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설관악은 설린에게 대답하면서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한파파를 불러 세웠다.

한한파파는 설린을 잠시 본 후 고개를 끄덕였고, 설린은 한한파파의 그런 모습에 담담하게 몸을 돌렸다.

“그럼 조금 후에 봐, 파파.”

설린이 밖으로 나가고 설관악과 한한파파 둘이 마주 앉았다.

“한한파파.”

“예, 궁주님.”

“설린의…….”

설관악은 말끝을 흐렸다.

비록 그가 아버지이긴 하나 아무래도 설린의 이야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신 때문에 어릴 적부터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싶어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던 그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설린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보고 누구 못지않게 기뻐한 나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감정의 문이 열린 것이 아닌 듯싶어 한한파파를 잠시 남으라고 한 것입니다.”

“휴우…….”

한한파파 역시 설관악의 마음을 잘 알기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숨을 고른 한한파파는 마교에 갔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마현과의 만남 등에서부터 오늘 설린의 반응까지 이어졌다.

“흠…….”

한한파파의 말이 끝나자 설관악은 팔짱을 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설관악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합니다, 궁주님.”

반면 한한파파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교 대공자 흑풍마군 마현이라…….”

설관악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 * *

“앗!”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으음?”

마현은 설마 이곳에서 그 여자아이를 또 볼 줄 몰랐기에 살짝 놀랐다.

“우와, 우리 인연이네. 그치?”

여자아이는 자리에서 쪼르르 뛰어나와 마현 앞에 섰다. 그리고는 밝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연아, 누구니?”

여자아이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왔다.

“왜 아까 당과 사먹으러 갔을 때, 하나밖에 없어서 반씩 나눠 먹었다는 아저씨 있다고 했잖아. 그 아저씨야.”

“그래?”

여인은 여자아이의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마현에게 포권을 취했다.

“사천당문의 당문혜라고 합니다. 제 동생은 당비연이라고 합니다.”

“나 당비연이야. 헤헤헤.”

당비연은 언니 당문혜를 따라 앙증맞게 포권을 취했다.

“마현이라고 합니다.”

마현 역시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굳이 마인임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며칠 편히 사천을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 공자셨군요.”

정파인이라 마(魔) 씨 성에 조금은 인상을 찌푸릴 줄 알았는데 당문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당비연이 마현의 소매를 잡았다.

“혼자 왔어?”

당비연은 마현의 소매를 잡은 채 주위를 살폈다.

“그래.”

마현은 너무나 귀여운 모습에 당비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합석하자. 합석해도 되지? 응? 언니, 오빠.”

당비연은 몸을 비비꼬면서 응석을 부리며 당문혜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청년을 불렀다.

“비연아.”

당문혜가 조금 당황한 듯 당비연을 불렀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탁자에 앉은 네 명의 청년들을 보았다. 모두 은은하게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아 무림인들이었다. 더욱이 마기가 담겨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파 무림인인 듯싶었다.

마현은 굳이 그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응?’

그렇게 마현이 탁자에 앉은 이들을 살필 때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다름 아닌 조금 전 대로에서 심하게 말을 몰던 자였기 때문이다. 그자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터라 마현은 더욱 함께 자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현은 당황해하는 당문혜를 향해 부드럽게 포권을 다시 취하며 말했다.

“다음에 보자구나.”

마현은 당비연의 손을 살포시 풀며 웃었다. 그리고는 지배인을 따라 조금 떨어진 창문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나도 저리 갈래.”

그러자 당비연이 떼를 쓰며 쪼르르 뛰어와 비어 있는 맞은편 의자에 훌쩍 뛰어올라 앉았다.

“비연아.”

당문혜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 당비연을 불렀다.

마현은 어쩔 수 없이 그쪽 탁자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비연아, 어서 이쪽으로 안 와?”

“싫어, 싫어. 그쪽은 재미없단 말이야.”

“휴우…….”

당비연의 토라진 목소리에 당문혜는 한숨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당문혜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마현으로서는 당비연이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조용히 술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밝은 꼬마아이 당비연과 함께 있으면 꽤나 유쾌할 것 같았던 까닭이다.

“문혜야.”

“예, 오라버니.”

“비연이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가 막혀서는 안 되니 그냥 놔두어라. 그리고 혹 저 공자님께 폐가 될 수도 있으니 네가 저리로 가서 비연이를 돌봐주고.”

당문혜의 오라비인 듯한 사내가 마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공자가 드시는 것은 저희가 사겠습니다.”

사내는 그러면서 마현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당문혜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마현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공자님, 실례가 아닐까 싶네요.”

마현은 막 차려진 상에서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당문혜는 예의상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당비연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한 잔 드시겠습니까?”

마현은 멀뚱히 혼자 술잔을 기울기가 뭐하다는 생각에 술병을 가볍게 들었다.

“고맙습니다.”

무가의 여인이라서 그런지 당문혜는 마현의 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현은 술병을 건넬까 하다가 예의가 아닌 듯싶어 그녀의 술잔에 직접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나도!”

그때 당비연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소리쳤다.

“마시고 싶으냐?”

“헤헤헤, 나는 감주(甘酒)!”

당비연은 혀를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마현은 당비연의 말에 감주를 시켜 자신처럼 술잔에 따라주었다. 감주의 단맛에 기분이 좋은 듯 당비연이 귀엽게 웃으며 홀짝홀짝 마셨다. 마현도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입술에 술을 적셨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 길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바쁜 사람들, 느긋한 사람들…….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과 느긋함에 마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셨다.

오랜 시간 그들의 자리에는 대화가 없었다.

당비연은 당비연 대로 단 감주와 맛있는 음식에 정신이 팔려 먹기 바빴고, 마현은 홀로 유유자적한 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당문혜는 처음 보는 이와 그다지 나눌 말이 없었기에 그냥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마현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지, 오랜 시간 동안 적막감이 돌자 조금 답답함을 느낀 당문혜가 고개를 들어 마현을 응시했다.

마현에게서는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묻어나왔다.

“조금 전에 비연이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리 할 말이 없는 당문혜는 당비연에게 들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마현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당과 처음 먹는 거라 그랬어. 우물우물.”

당비연은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말했다. 그 말에 당문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마현은 그냥 담담히 웃을 뿐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굳이 과거의 일을 그녀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현은 그냥 웃었는데 대답은 정작 다른 곳에서 나왔다.

“우물우물. 그건 아저씨가 어릴 적에 엄청 가난했었대, 언니. 우물우물. 그래서…… 벌컥벌컥! 캬, 더욱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못 먹어봤대.”

당비연의 말에 당문혜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냥 생각 없이 눈빛으로 물어본 것이었는데 가슴 아픈 곳을 건드린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죄, 죄송해요.”

당문혜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마현에게는 그다지 가슴 아픈 과거가 아니었다. 마현은 담담하게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되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그리고 대화도 끊겼다.

별달리 대화가 없자 마현은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을 향하고 있는 마현의 귀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네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3층 자체가 워낙 조용하다 보니 들리게 된 것이었다.

마현은 그들의 대화에서 네 청년의 신분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마현에게 머리를 숙였던 청년은 대충 짐작한 대로 사천당문의 소가주, 암군자(暗君子) 당화평이었다. 그리고 세 청년은 사천성 북부 정파 세력권 내에 있는 무가의 장남들이었다.

그중 허리에 도를 차고 있는 이는 신도방(神刀幇)의 소방주 심지상이었고, 검을 차고 있는 이는 청성파의 속가제자들이 만든 속청검문(俗靑劒門)의 소문주 정호영이었다. 그리고 대로에서 말을 몰아 마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이는 독패장(獨覇莊) 소장주 독무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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