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23화
“사천으로 마교 대공자가 온다는 소문이 바로 그걸세. 근데 그 대공자가 검은 비단으로 된 서생 옷을 즐겨 입는다는 소리를 들어서 말일세.”
늙은 거지는 당과를 모두 먹은 후 꼬챙이를 혀로 핥으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공자도 검은 비단으로 된 서생 옷을 입었군, 그래.”
마현은 늙은 거지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왠지 평범한 노인이 아닌 듯했다.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대수롭지 않아 처음에는 그냥 괴팍한 거지라고만 생각했다.
마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시선을 내려 늙은 거지의 허리춤을 살폈다.
‘개방은 아닌가?’
허리춤에는 아무런 매듭도 매여져 있지 않았다. 그래도 몰라 마현은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투시 마법을 펼쳤다. 역시 감춰진 옷 부분에도 매듭은 없었다.
‘아니야, 뭔가가 있어.’
그렇게 생각한 마현은 늙은 거지의 몸을 마나 스캔(Mana scan)의 마법을 이용해 살폈다. 그리고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한 차례 부들부들 떨더니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가락을 쪽쪽 빠는 늙은 거지의 몸에, 정확히 말하자면 단전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잠들어 있음을 본 것이다.
거지는 현재까지도 넘볼 수 없는 교주 사공소나 스승 허진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는 엄청난 양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은 누구…….”
“후암, 잘 먹었네.”
늙은 거지는 배를 툭툭 쳤다.
그런데 그런 말이나 행동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늙은 거지의 배에서 들려왔다.
꼬르륵.
“허허허, 이거 염치가 없군.”
늙은 거지는 배를 다시 툭툭 쳤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마현을 보며 물었다.
“배 안 고프나?”
늙은 거지의 뻔뻔한 행동에 마현의 미간이 다시금 좁아졌다.
* * *
“후루룩. 오물오물, 쩝쩝쩝.”
늙은 거지는 소면을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마현은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무림의 고수이기는 한데 누구인지 모른다. 개방이 아닐까 싶었지만 개방 방도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매듭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우연히 자신과 마주친 건 아닌 듯했다. 늙은 거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생각에 마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물오물, 쩝쩝……!”
소면을 다시 한 번 입 안에 밀어 넣던 늙은 거지는 눈동자만 올려 마현을 쳐다보았다.
“사람 먹는 거 처음 보나?”
“노인은 누구십니까? 아니 선배님은 누구십니까?”
마현은 질문을 하다 호칭을 바꿔 다시 물었다.
“거지에게 선배라니…… 크하하하하!”
늙은 거지는 마현의 말이 정말 웃긴 것인지 배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마현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생각 같아서는 힘으로 알아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제가 당할 것 같아 말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선배님.”
“아이구.”
늙은 거지는 짐짓 과장되게 몸을 웅크렸다.
“잘못하다가 거지 때리겠네.”
늙은 거지는 도대체 마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부는 아이 같지만 머리가 백발인 것을 보면 반로환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기운이 전혀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걸로 보아 반박귀진의 경지에는 올라섰으니…….”
마현의 말에 늙은 거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바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현을 응시했다.
“클클클클. 그렇게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게냐?”
마현은 입술을 말아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 거지왕이야. 크크크.”
‘거지왕?’
선뜻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거지왕이라면 분명 개방 방주일 텐데 자신이 아는 개방 방주의 모습과 늙은 거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방주라면 반드시 구결의 매듭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었다.
뭐 방주라서 안 했다라고 우기면 그만이겠지만, 아무리 방주라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다.
‘개방 방주도 아닌데 거지왕이라고 하…….’
생각에 잠기던 마현의 눈이 순간 부릅떠졌다.
‘걸왕(乞王)? 개방 태상방주 걸왕?’
너무나도 쉽게 말을 풀어 이야기했기에 마현은 미처 걸왕을 떠올리지 못했었다.
또한 걸왕이 은거 아닌 은거에 들어가 무림 일에 나서지 않은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으니 쉽게 떠올리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현은 걸왕을 마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걸왕이라……, 이런 인연도 나쁘지 않지.’
마현은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상을 치우고 이 객잔에서 자랑하는 고급 요리를 모두 내오너라. 그리고 술은 뭐가 있나?”
“10여 년 정도 묵힌 검남춘(劍南春)이 있습니다요.”
“검남춘?”
오량주(五糧酒)와 함께 사천성을 대표하는 명주 중 하나였다. 거기에 10여 년 정도 숙성되었다고 하니 명주 중 명주일 것이 분명했다.
“그거 좋군. 몇 병이나 내올 수 있나?”
“저희 객잔에 세 병밖에 없습니다요.”
“모두 내오너라.”
“예?”
그 말에 점소이는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10년 묵은 검남춘이라면 어지간한 평민들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모두 내오너라.”
“아, 알겠습니다요.”
점소이는 마현 앞에 앉아 있는 걸왕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점소이에게 마현은 금자 반 냥을 던져주었다.
“히익!”
“가져오너라.”
금자 반 냥과 마현을 번갈아 보던 점소이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알겠습니다요.”
점소이는 발에 불이라도 난 듯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주 돈지랄을 하는구나.”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나쁘지 않군요.”
마현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걸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 소개는 했고……, 너는 누구냐?”
“알고 접근하신 거 아닙니까?”
자신의 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을 테니 맞춰보라는 마현의 태도에 걸왕은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히 걸왕 앞에서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나불대는구나.”
걸왕은 전과 달리 중후한 기운을 내뿜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걸왕도 어차피 거지. 중요한 건 지금 걸왕께서 제게 붙어 빌어먹고 계신다는 겁니다. 아닙니까?”
그때였다.
마현의 말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기가 막히도록 적절하게 점소이 몇이 양손 가득 푸짐한 음식들을 가지고 와 탁자에 한상 가득 차렸다.
뽕!
동시에 검남춘 술병이 따지며 이뤄 말할 수 없는 향긋한 주향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향이 좋군요.”
마현은 검남춘을 들어 걸왕에게 권하지도 않고 자신의 술잔에 쪼르르 술을 따랐다. 그러자 은은하던 주향이 더욱 진해지며 주위로 퍼져나갔다.
음식들과 검남춘의 주향에 넋을 잃은 걸왕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걸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음식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위치였다. 굳이 돈이 있든 없든 말이다.
하지만 걸왕은 뼛속까지 거지였다. 그래서 돈이 있어도 사먹지 않았다. 아니 아예 돈 자체를 소지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은 은거 아닌 은거에 들어간 터라 다른 문파들을 돌아다니며 얻어먹지도 않았다.
근 10여 년 이상을 이런 고급 음식에 입을 대지 못한 걸왕이었다.
원래 거지들이 그렇지만, 특히 걸왕은 음식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다.
꿀꺽.
걸왕의 목젖이 움직였다. 더불어 가늘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고인 침이 살짝 보였다.
“침 흐릅니다.”
쓰읍.
마현의 말에 걸왕은 재빨리 소매로 입을 닦았다. 그러면서 마현을 잠시 노려보다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크흠!”
걸왕은 무안한지 어색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다. 나는 거지지.”
그 말에 마현은 검남춘을 들어 걸왕 앞에 내밀었다.
“드시겠습니까?”
“당연하지.”
걸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특유의 가벼운 몸짓으로 얼른 술잔을 들었다. 술잔에 검남춘이 가득 차오르자 걸왕은 킁킁거리며 주향을 맡았다.
“좋구나. 이게 얼마 만이냐.”
걸왕은 입을 쩍 벌려 단숨에 검남춘을 털어 넣었다.
“크으으……, 캬아!”
걸왕은 몸을 부르르 떨며 감격에 겨워했다. 그는 마치 무공을 선보이듯 젓가락을 들어 날렵하게 음식 하나를 집어 입 안에 쏙 넣었다.
“흐음…….”
걸왕은 눈을 감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오물오물……, 그나저나 네놈도 걸물은 걸물이구나. 크흐흐흐.”
걸왕은 연신 음식을 입에 넣으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까?”
마현은 가볍게 대답하며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웅천마군을 베어 버리고 대공자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니…… 심장 하나는 듣던 대로 강심장이구나.”
역시나 마현이 예상한 바대로 걸왕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하긴 정보하면 개방인데, 그 개방에서도 태상방주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모레 있을 사천당문 여식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아마 당과를 파는 노점상 주인과 하는 이야기를 들은 듯싶었다.
“그렇습니다.”
“클클클, 사천당문이 네 녀석의 정체를 알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겠구나.”
생각만 해도 재밌는지 걸왕은 연신 웃음을 실실 흘렸다.
“선배님께서는 무슨 일로 사천에 오신 겁니까?”
“선배님? 클클클. 역시 재미있어. 비리비리한 정파 놈들보다 낫군. 그놈들은 나만 보면 연신 퇴물 취급이니……, 쯧쯧쯧. 캬악, 퉤!”
걸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아, 왜 왔냐고 물었냐?”
“그렇습니다.”
“10여 년 동안 구걸 짓하다가 알게 된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의 누이가 얼마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뭐 얻어먹은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왔다.”
‘독패장 때문에 왔군.’
마현은 독무웅을 떠올리며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눈빛을 걸왕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구나.”
걸왕은 젓가락을 놓고 입안에 가득 든 음식을 꿀꺽 삼켰다.
“……혹 마교 짓이냐?”
걸왕의 눈빛에서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마현의 몸을 휘감았다. 마현 역시 그 기운을 느끼며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 것 같습니까?”
마현은 정파 소속 독패장을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흠…….”
걸왕은 마현의 그런 모습에 마교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걸왕은 곧바로 마현을 향한 기운을 다시 거두었다.
마현은 그때 걸왕 뒤로 자신을 발견하고 우르르 떼를 지어 몰려오는 독패장 무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흑도.』
마현은 이미 소환해놓은 흑도를 불렀다.
『왜?』
『내가 나서려 했지만 네가 나서줘야겠다.』
『크크크, 본좌가 화끈하게 놀아주지.』
『안 돼! 조용히 어떤 마공만 익혔는지만 알아봐. 노는 건 그 다음이다.』
『쳇! 알았다.』
흑도가 사라지고 마현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해 보거라.”
마현은 걸왕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쩌면 걸왕을 만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다른 건 없습니다. 다만 마공을 익혔고, 그 마공에 여인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뿐.”
대수롭지 않은 듯 가벼이 말했지만 걸왕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느 놈이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게냐?”
걸왕은 은은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만큼 분노했다는 뜻이리라.
『주인.』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그새 흑도는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알아봤나?』
『그들이 익힌 마공은 극양천혈공(極陽天血功)이다.』
『극양천혈공? 금마공인가?』
『한때는 금마공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이유는 여인의 피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주인 역시 알 테고. 오랜 연구 끝에 피가 필요 없어져 금마공에서 풀렸는데 그들이 익힌 극양천혈공은 금마공일 때의 극양천혈공이더군. 하지만 위험한 마공이라 교에서도 아마 특별 취급하는 마공일 텐데…… 정파에서 극양천혈공을 볼 줄 몰랐다.』
『결국 본교의 마공이군.』
『그렇지.』
『그럼 회수해야지. 더불어 본교를 농락한 대가도 치르게 해야 하고.』
『크크크크!』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