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7화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빈도가 안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으니……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무량수불.”
송천이 나간 후 마현은 객당 안에 비어 있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객당 안은 상당히 넓었고, 군데군데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응?’
가까운 곳에 모여 있는 네 남녀는 마현도 아는 이들이었다. 바로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 역시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마현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곧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객당 안이 어수선해졌다.
그러더니 객당에 들어서는 문 쪽에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며 누군가를 향해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왔기에 그러는가, 호기심이 생겨 마현 역시 문 쪽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객당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바로 청명진인이었다.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청명진인의 일자건(一字巾) 위로 틀어 올린 상투머리에서 전과 달리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조금 보였다.
확실히 무당제일검의 이름은 무거운 듯했다. 그가 나타나자 객당 내에 앉아 있는 이들이 없었다. 그와 한 번이라도 더 얘기를 나누려고 애쓰는 게 역력했다. 하지만 청명진인의 딱딱한 표정에 다들 쉽사리 다가가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청명진인은 송천를 앞세우고 마현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막 마현을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 청명진인 앞으로 네 명의 후기지수가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청명진인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청명진인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힘보다 그들이 속한 세가의 힘 때문이었다.
“다들 오랜만이구나. 가주들께서는 강녕하시고?”
“덕분에 편안하십니다.”
짧은 안부인사가 오갔다.
“하…….”
“다음에 보자구나.”
인사가 끝난 후 남궁혁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청명진인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버린 후였다. 당연히 넷의 시선은 청명진인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청명진인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한 서생과 마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어제 객잔에서 본 서생이었다.
그냥 어느 돈 많은 집 자제로 무당파에 참배하러 온 모양이라고 가볍게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청명진인이 저렇게 살가워하는 것을 보면 무슨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무량수불.”
그렇게 그들이 청명진인과 마현을 잠시 쳐다볼 때 한 무당파 제자가 그들 곁으로 다가서며 도호를 읊었다.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남궁혁이 도인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학성 사숙의 폐관은 좀 더 길어질 것이라고 청명 대사숙께서 이르셨습니다.”
“분명 오늘 폐관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만……, 학성 사숙께서 당신의 성취가 여전히 미진하다면서 달포 정도 더 머물다가 나오겠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허어, 이런 일이…….”
“어쨌든 고맙습니다.”
남궁혁은 난처한 얼굴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어쩌지?”
“무작정 찾아온 우리 잘못도 있죠, 뭐.”
사실 맞는 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대화도 툭 끊겼다. 그러니 자연스레 청명진인과 마현에게로 눈과 귀가 쏠렸다.
“그래, 잘 지냈느냐?”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마현은 청명진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신수가 훤해졌구나.”
청명진인은 제자 학성을 볼 때마다 마현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하는 게 아닐까, 가끔 걱정했던 마현이 이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간 찜찜했던 기분이 한순간 사라졌다.
“학성을 찾아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마현의 대답에 청명진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표정을 본 마현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
“아니다, 아니야.”
마현의 눈동자에 어린 걱정을 읽은 청명진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학성은 지금 폐관수련에 들어가 있단다.”
“네, 그건 저를 안내해 주신 도인에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도인이 말하기를, 오늘 폐관이 끝난다고…….”
“너도 들은 모양이구나. 헌데……, 녀석이 스스로의 성취가 만족스럽지 않은지 좀 더 수련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구나. 허허, 그것 참.”
“그렇군요.”
마현은 청명진인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하필 이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게 아니라 내 처소로 가자구나. 네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고 보냈다가는 학성에게 큰 원망을 들을 것 같구나.”
마현 역시 그게 좋다는 생각에 청명진인을 따라 객당을 나섰다. 청명진인을 따라 마현이 무당파 경내를 지나가는데 학방이 뛰어오며 소리쳤다.
“사숙님.”
“무슨 일이기에 이리 경박하게 뛰어다니느냐?”
청명진인은 그런 학방의 행동을 가볍게 질타했다.
“대사부께서 여기 계신 마 공자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사백께서?”
청명진인의 사백이라면 현 무당파 장문인의 스승인 현도상인이었다. 그는 사실상 이미 오래전에 무림에서 은거해 무당산 깊숙한 곳에서 유유자적 생활하고 있었다.
‘어찌 사백께서 이 아이를 알고 있을까? 가만, 학방도 이 아이를 아는 것 같지 않은가.’
문득 청명진인은 그런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입니다, 마 공자.”
그때 학방이 반가운 얼굴로 마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학방에게 답하는 마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당파에는 마교 대공자 신분이 아닌 손정의 어릴 적 친구로서 찾아온 것이다. 그만큼 편히 손정을 보고 갈 생각이었다. 헌데 그러기에 이미 틀려 버렸다.
“학방아.”
청명진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예, 사숙님.”
“마 공자와는 어찌 아는 사이더냐?”
“그게 2년 전…….”
“제가 대답하지요.”
마현은 학방의 말을 자르며 청명진인을 향해 돌아섰다.
어차피 조용히 들렸다 가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도리인 듯싶었다.
“2년 전 본교 교주님 생신연회에 왔을 때 학방 도인과 친분을 나누었습니다.”
“보, 본교?”
청명진인은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리더니 쉽사리 다물지 못했다. ‘본교’의 의미가 마교를 지칭한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마인이 되었더냐?”
청명진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본교 부교주 되시는 분이 제 스승님이십니다.”
“허면…… 대공자 흑풍마군 마…….”
청명진인은 놀란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현.
그 이름 때문이었다.
“네가 빈도를 우롱한 것이냐?”
청명진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아닙니다. 말씀을 드리려 했지만…….”
“휴우…….”
청명진인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다, 일단 사백님을 뵌 후 빈도를 찾아오너라.”
“알겠습니다.”
청명진인은 마현과 학방을 향해 손을 저으며 몸을 돌렸다.
‘휴우…….’
긴 한숨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뒤늦게 얻은 하나밖에 없는 제자, 학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외부적으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성은 태극검룡이란 별호를 하사 받았다.
그만큼 학성은 이제 무당파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필 마교의 대공자라니…….’
청명진인은 학방과 함께 현도상인의 거처로 향하는 마현의 등을 쳐다보았다.
심사가 어지러워졌다. 자연스레 머리 또한 복잡해졌다.
마치 커다란 바위라도 올려 놓은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 * *
진무각에 들어서던 청명진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청명진인의 눈에 멀리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이 보였다. 그 절벽 중간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문이 일렬로 달려 있었다.
무당파 제자들이 폐관수련 때 이용하는 정심동(正心洞)이었다. 그는 십여 개의 정심동 철문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학성이 있었다.
학성은 청명진인에게 있어 특별한 제자다.
그가 평생 유일하게 받은 단 한 명의 제자였고, 아마 후에도 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유일무이한 제자가 될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쏟은 정성과 마음은 각별했다.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가?’
자연스레 청명진인은 학성과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청명진인은 학성을 가르치며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참으로 착한 아이였다.
단지 심성만 고운 것이 아니었다. 성정도 올곧아서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않을 아이였다.
또한 골격이 약한 것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학성은 뛰어난 무의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타고난 재능이 아니었다. 노력에 의한 결실이었다.
그 점이 오히려 청명진인의 마음을 더 흡족하게 만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제자.
청명진인은 학성을 가르치며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자식을 대할 때의 아비와도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런 제자의 하나밖에 없는 친우가 마교 대공자라니.
“허허, 허허허.”
공허한 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 * *
무당파 경내를 지나 뒤편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 끝은 꽤나 가파른 높은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은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산봉우리로 오르는 길이었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그나마 사람들이 오르기에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학방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산봉우리 끝을 가리켰다.
“대사부께서는 저 위에 머물고 계십니다.”
마현은 학방을 따라 산봉우리 위로 걸어 올라갔다. 생각 외로 높아 산봉우리까지는 대략 일각 정도 소요되었다.
산봉우리에 오르자 자그만 초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게 다였다.
그 흔한 싸리문도 없었다.
바람이 산봉우리를 지나다 쉴 만한 곳에 초가 한 채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하.”
“허허허.”
조용하고 아늑할 거라는 마현의 생각과는 달리 초가 안에서 웃음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손님이 계신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
학방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초가로 다가갔다.
“대사부님.”
그 목소리에 초가 안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곧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뫼시고 왔느냐?”
“예.”
“안으로 뫼시어라.”
“뫼시긴 뭘 뫼셔?”
“허허허, 그래도 그건 아닐세. 안으로 뫼시어라.”
안에서는 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어 또 한 사람의 걸걸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학방이 마현에게 초가로 들어서는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마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마 가야, 왔느냐?”
누런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음을 짓는 이는 바로 걸왕이었다. 그 앞에는 오래되어 색이 바랜 도복을 입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짓고 있는 노도인이 있었다.
방 안은 단출했다.
방구석에 놓인 자그만 서탁과 서책 몇 권이 다였다. 그리고 알싸한 냄새가 나는 약초를 담은 듯한 면 주머니가 벽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놈아 왔으면 인사라도 할 것이지 뭘 그리 두리번거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마현이라고 합니다.”
마현은 걸왕에게 인사를 건넨 후 현도상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무량수불, 이 나이 먹다 보니 도명도 잊고 살 때가 많지만…… 빈도는 현도라 하네. 여기 앉게나.”
현도상인은 여전히 푸근한 인상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닥을 가리키며 자리를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마현은 현도상인과 걸왕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 한 잔 드시게.”
현도상인이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감싸듯 들었다. 곧 찻주전자의 주둥이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현은 현도상인의 손바닥과 찻주전자 사이에서 기이한 열기를 느꼈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