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8화
“뜨겁지는 않을 거네.”
현도상인은 자연스럽게 마현 앞에 놓인 찻잔에 따뜻하게 데워진 차를 따랐다.
그윽한 향기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이름 모를 꽃들을 말린 거라 맛이 좋을지 모르겠네.”
“감사합니다.”
마현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살짝 적셨다.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어떤가? 마실 만한가?”
“아주 좋습니다.”
마현의 얼굴에는 꾸며낸 것이 아닌 진정 흡족해하는 감정이 묻어나왔다.
“어찌 제가 여기에 온다는 걸 아셨습니까?”
“이놈아, 내가 괜히 개방 태상방주더냐?”
걸왕은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투로 말을 툭 내던졌다. 순간 마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걸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정파에서 나쁜 마음을 먹고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고 습격한다면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마현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현 앞으로 걸왕이 얼굴을 내밀며 히죽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왜, 오금이 저리고 불알이 바싹 졸아드냐? 낄낄낄.”
걸왕은 마현에게서 떨어져 벽에 등을 기댔다.
“농이니 그렇게 인상 구기고 있을 필요 없다.”
“허허허허.”
그 둘 사이에 현도상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도우는 여전하구먼.”
“내가 어때서?”
“그냥 그렇다는 거네.”
“그 나이까지 심심한 벽곡단만 먹더니 사람이 다 싱거워졌군.”
“그런가? 허허허.”
“낄낄낄.”
그렇게 웃던 걸왕이 마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야 어쩌다 보니 여기 놀러왔다가 우연히 너를 본 거지만……, 무당산에 오른 너를 알아본 저 말코도사의 능력은 진짜란다.”
걸왕의 말을 들으니 이번에는 거짓이 아닌 듯싶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차를 마시는 현도상인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무당파 경내에서도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암자다. 그런 이곳에서 현도상인이 마현의 기운을 느꼈다고 하니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나이가 되면 하나쯤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생긴다네.”
현도상인은 차를 내려놓으며 마현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 빈도를 볼 필요 없네. 벗이 오랜만에 찾아와 도우 이야기를 하더군. 그런데 마침 도우가 내 집에 들렀기에 그저 차 한 잔 대접하려 부른 것일세.”
현도상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레 말했지만 받아들이는 마현은 달랐다. 그저 편하게 들을 수만은 없었다.
“어찌 저를 느끼셨는지요?”
“그냥 남들보다 냄새를 잘 맡을 뿐이라네.”
“……냄새?”
“그나저나 도우는 마기를 아주 잘 갈무리했구먼. 빈도가 아는 마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현도상인은 뭔가 말을 할 듯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끝을 흘렸다.
그 말에 마현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더 굳어졌고, 걸왕의 우중충한 눈빛은 순간 빛을 발했다.
“이보게 현도.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인가?”
“…….”
“마기가 다르다니?”
걸왕은 말하면서 마현을 흘깃 쳐다보았다.
“혹……, 천살성(天殺星)이라도 되는 겐가?”
“허허허, 허허허허.”
걸왕의 말에 현도상인은 제법 큰 웃음을 터트렸다.
“바탕은 현묘한데 이룸이 어둡구나…….”
현도상인은 마현의 눈을 직시했다.
“어린 도우.”
“…….”
“그대와 가까운 별이 무당파 위에 떠 있으니…… 친우를 생각해 앞으로 이 무당파도 잘 부탁하네.”
“이 사람,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현도상인의 말에 걸왕은 버럭 화를 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현 역시 현도상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그냥 맨입으로 부탁만 할 수 없으니 살짝 귀띔하네만……, 그대가 찾는 것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네.”
선문선답도 이런 선문선답이 없었다.
“이만 내려가 보게나. 이보게, 도우. 오랜만에 곡차나 한 잔 할 텐가?”
마현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현도상인이 술을 마시자고 하자, 걸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곡차라면…… 술? 자네가?”
걸왕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현도상인을 쳐다봤다. 그런 걸왕의 물음에 현도상인은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현도, 내게 말해주게. 방금 마 가에게 한 말뜻이 뭔가?”
“곡차 마시기 싫으면 자네도 내려가게나, 무량수불.”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지그시 감은 눈과 꽉 다문 입새를 보며 마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봐야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린 도우.”
마지막으로 현도상인의 음성이 마현을 붙잡아 세웠다.
“빈도의 부탁을 꼭 들어주게.”
마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현도상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속세의 욕망을 모두 버렸을 것만 같은 그에게서 집요한 집착이 느껴졌다. 왠지 거부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거부할 수 없다기보다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내 마지막 짐을 어쩌나 했는데……. 무량수불.”
마현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의 귓전에선 좀 전에 현도상인이 했던 말이 묘한 여운이 되어 울리고 있었다.
“도우가 원하는 건 가까운데 있다네…….”
마현이 밖으로 나오자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학방이 다가왔다. 마현은 그가 다가왔음을 알았지만 현도상인의 방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버린 듯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해하기 힘드시죠?”
학방은 그런 마현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을 건넸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대사부께서 말씀하신 것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이해가 될 겁니다.”
마현은 학방의 말을 들으며 그제야 방문에서 눈을 뗐다.
“이미 천기를 보시는 분이니……, 우리 같은 범인이 그 뜻을 어찌 쉽사리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청명진인께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청명 사숙님이요?”
학방은 이곳으로 오기 전 마현이 청명진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마 공자께서는 청명 사숙님을 어떻게 아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에 마현은 그저 담담하게 웃음만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빈도를 따라오시지요.”
학방이 조용히 마현을 안내했다.
* * *
청명진인의 눈은 찻잔을 향해 내려가 있었다.
처소로 온 이후 입안에서 느껴지는 쓴맛을 달래고자 차를 준비했다. 하지만 한 모금도 채 마시지 못했다. 평소 그렇게 자주 마시던 차였지만 오늘은 입안에서 맴도는 쓴맛을 더욱 진하게 만들 뿐이었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셔 보았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쓴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느끼는 쓴맛은 지금의 감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헛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냥 묵묵히 자리에 앉아 찻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휴우…….”
깊은 나락과도 같은 한숨을 푹 내쉰 청명진인은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얼굴을 매만졌다.
‘정아…….’
이제 손정은 학성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진인은 홀로 학성을 생각할 때마다 학성이 아닌 손정이라는 이름을 되뇌곤 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고민은 고뇌를 낳는다.
청명진인은 주먹을 계속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부르셨습니까, 각주님.”
진무각 소속의 ‘송’자 항렬의 제자 하나가 들어왔다.
“아니다.”
청명진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처소를 빠져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그가 걸어간 곳은 무당파 장문인이 기거하는 삼청궁(三淸宮)이었다.
“장문사형, 청명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시게.”
장문인실 안에는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도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무당파를 이끌어가는 장문인인 청하진인이었다.
“무슨 일이 그리 바쁘다고 이리 무심할 수 있는 겐가?”
청명진인을 바라보는 청하진인의 눈동자에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청하진인에게 있어서 항상 고민이 있었다.
과거 차기 장문인으로 확정됐을 당시 그로서는 검이냐, 아니면 무당파 경영이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둘 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당파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좀 더 확실한 경영이 우선이겠지만, 무인의 입장에서는 검도 중요했다. 그때 청명진인이 나타났다.
그는 ‘청’자 항렬이었지만 사형들과 근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날 정도로 어린 사제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검술의 경지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경이로웠다.
천재였다. 사제 청명은 자신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무의 기재였다.
질투심이 날 법도 하건만, 청하진인은 그런 청명진인을 보며 비로소 웃었다. 마음껏 웃었다. 아마 무당파에서 제자들에게 늘 근엄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자신의 위치만 아니었다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청하진인은 그 후 마음속에서 검을 꺾었다.
무당파의 무를 상징하는 검을 모두 사제 청명진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당파를 이끌기로 결심했다.
비록 대외적으로, 또한 실질적으로 무당파를 이끌어가는 것은 청하진인이었지만, 당사자인 청하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당파를 이끌어가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것을 지탱해주는 밑바탕은 사제 청명진인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상의를 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래, 무엇인가?”
청명진인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달싹거리며 입이 벌어졌다 닫히기만 반복할 뿐, 그는 선뜻 말을 내뱉지 못했다.
청하진인은 그런 청명진인의 망설임을 보며 이맛살을 모았다. 분명 중요한 말을 꺼낼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 긴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평소 신중하지만 거침없는 성격의 사제가 저렇듯 말을 망설일 정도면 많은 갈등에 휩싸여 있을 거라 짐작했다.
청하진인은 그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사형.”
청명진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돌아서 나가려는 청명진인의 눈앞에 학성과 무당파가 어른거렸다.
“사제, 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나, 항상 사제 뒤에 이 무당파가 있음을 잊지 말게나.”
청명진인은 입만 뻥끗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당파…….’
청명진인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달래기 위해 질끈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입술 또한 질끈 깨물고 있었다.
“장문사형.”
자리에 일어났던 청명진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학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학성 사질에 대해 말인가?”
장문인으로서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던 청하진인이었지만 학성의 이름이 거론되자 미약하게나마 표정이 바뀌었다.
청하진인에게 있어서 학성은 청명진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미 학방과 함께 다음 대의 무당파를 이끌어갈 중요한 재원이었다.
학방은 자신을 이어 무당파를 이끌어갈 것이고, 학성은 무당파를 든든하게 떠받쳐 줄 무당의 검으로써 말이다.
청명진인과 자신처럼.
안 그래도 학성이 검에 큰 성취를 보이자 학방은 청하진인이 그랬던 것처럼 근래에는 검을 놓고 무당의 살림을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겐가?”
가급적 재촉하지 않으려 했던 청하진인이었지만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5년 전 학성을 입문시킬 때 드린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아직 기억하네만.”
“그때 제자로 거두고 싶던 또 한 명의 아이가 있었다는 말도 기억하시겠군요.”
“그럼, 기억하다마다.”
“그 아이가 학성과 친형제처럼 우정을 나눈 사실도요.”
“허어……, 답답하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는 없는 겐가?”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마현인 것은 기억하는지요?”
청명진인의 질문에 청하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청하진인이라고 해도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아이가 바로…… 마교 대공자 흑풍마군입니다.”
“…….”
청하진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 대공자가 지금 무당파에 와 있습니다. 학성을 보고자 말입니다.”
“어찌, 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