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0화
“답을 주거라, 답을…….”
청명진인은 그답지 않게 애원조로 말했다.
“비키십시오.”
“답을 주거라.”
“비키십시오!”
마현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차갑게 식어갔다.
“학성은 이제 내 자식과도 같은 아이다. 그 아이의 앞길에 뻔히 보이는 장애를 놔둘 수 없구나.”
“지금 제 눈에 비친 청명진인의 모습이 어떤지 아십니까?”
“안다, 아니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청명진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꿇으마. 대신 학성을 네 가슴 속에만 묻어다오.”
마현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갔다.
“그나마 한때 진인에게 은혜를 입어 호의를 품고 있는 제 감정을 지우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현은 청명진인을 외면한 채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청명진인 역시 발걸음을 옮겨 마현의 앞을 막아섰다.
“블링크!”
마현은 블링크를 이용해 단숨에 방문 앞으로 순간이동했다. 그리고 문을 열며 말했다.
“배웅은 필요 없습니다.”
쾅!
거친 소음과 함께 다시 문이 닫혔다.
마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청명진인은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저 마현이 방을 나갔다는 것만 생각되었다.
청명진인은 뛰쳐나가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쩌면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뒷일은 무당파 장문인이자 사형인 청하진인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학성과 마현이 앞으로 만날 수 없게.
청명진인은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내공으로 귀를 막았다. 마치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켜 버리려는 듯.
* * *
진무각이 훤히 보이는 소문(小門)에서 서성이던 한 무당파 제자가 진무각주실에서 나오는 마현을 보자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청명진인이 함께 나오는지 살폈다.
하지만 청명진인은 나오지 않았다. 학방이 마현에게 다가가는 것을 확인한 제자는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나 무당파 장문인실로 향했다.
“허어, 결국 그렇게 된 것인가?”
청하진인은 어두운 안색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칠성단은?”
칠성단은 무당파 내에서도 조금 특이한 무력단체였다.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무당파의 조직 중 하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달랐다. 다른 조직과는 달리, 칠성단은 무당파 장문인의 수족과 같은 직속 무력단체였던 것이다.
사실 무당파 내에 권력 다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청하진인이 사사로이 이익을 취할 만큼 성정이 음침한 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청하진인은 이들을 은밀하게 키웠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제아무리 도의 길을 걷는 무당파라고 해도 무림문파였다. 하루라도 피가 마를 날이 없는 냉혹한 무림이라는 세상에서 수백 수천의 무가들 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그 위치를 고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런 일들 중에는 더러운 일도 있었다. 칠성단은 바로 암중에서 은밀히 그런 일을 처리할 용도로 만들어진 무력단체였다.
“이미 소집시켜 놓았습니다.”
제자의 대답에 청하진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바로 진무각에서 객당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무당파 제자가 명을 받들고 밖으로 나가자 청하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검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성과 마교 대공자 사이를 벌려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검을 잡은 청하진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불룩 솟아올랐다.
“무량수불.”
* * *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간 것일까?’
진무각에서 나온 마현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기에 학방은 선뜻 마현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보기에 지나칠 정도로 청명진인은 살갑게 마현을 맞이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배웅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학방은 그저 마현보다 반걸음 앞서서 걸을 뿐이었다.
‘응?’
그러던 중 학방은 자신을 죄여오는 이상한 기운에 서둘러 검 자루에 손을 얹혔다.
‘누가 감히 본파 안에서…….’
학방의 눈에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담장 너머로 수십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학방과 마현을 둘러쌌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있던 학방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들의 정체가 무당파 칠성단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약간의 의문 또한 생겼다.
왜 그들이 이토록 날카로운 기세를 뿜으며 앞을 가로막은 것일까?
학방은 자신과 같은 항렬의 칠성단주에게 다가가기 위해 걸음을 내딛다가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청하진인을 보자 급히 허리를 숙였다.
“장문인을 뵈옵니다.”
마현이 없었다면 스승님이라 불렀겠지만, 마현이 함께 자리를 함으로써 사석이 아닌 공석이 되었기에 청하진인을 그리 불렀다.
“학방은 물러나라.”
항상 듣던 인자한 음성이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스승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
순간 학방은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고개를 살짝 들어 청하진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음장 같은 그의 표정을 보아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대체 왜…… 혹?’
잠시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학방의 머릿속에 마현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마현은 마교 대공자 신분이었지만 개인의 자격으로 무당파에 왔다.
숨기려고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보였다.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학방아, 학방아. 아직 멀었구나.’
학방은 자책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그 사실을 청하진인에게 먼저 보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리하지 못한 것이다.
“장문인, 여기 계신 마 공자께서는…….”
상황이 어찌되었든 일단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학방은 청하진인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호통뿐이다.
“물러나라 하지 않았느냐!”
“자, 장…….”
“뭣들 하느냐! 저 녀석을 밖으로 끌어내지 않고!”
청하진인의 명에 칠성단의 두 제자가 학방 곁으로 다가와 양팔을 움켜잡았다. 이어 몸부림치는 학방의 뒤로 칠성단주가 다가가 그의 수혈을 짚었다.
정신을 잃은 학방의 몸이 축 늘어지자 팔을 붙들었던 칠성단원이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모든 상황을 마현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현의 얼굴은 지독할 정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내면은 달랐다.
그의 가슴속은 세상 그 어떤 것조차 녹여버릴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현은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쉬었다. 그러면서 머리를 식혔다. 차갑고 냉정하게…….
“무슨 의도가 있어 무당파에 침입을 한 것이냐?”
청하진인은 목소리나 행동이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칠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모습이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진무각 쪽을 바라봤다. 이런 소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청명진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당제일검이라는 무당파 최고의 고수가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훗.”
마현은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청하진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학성이 떠올랐다.
무당파의 장문인과 무당제일검이 이처럼 나서는 것을 보면 학성이 무당파에서 꽤나 사랑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흡족한 마음이 생겼다.
그런 모순 속에서 마현의 마음속에는 갈등이라는 감정이 솟았다.
좀처럼 가져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원래 마현이라면 비록 정마대전이 터진다고 해도 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학성이 걸렸다.
차가워진 눈빛으로 청하진인과 칠성단을 바라보며 마현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마현의 눈이 칠성단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들은 모두 학성의 사형이요, 사제요, 사질들일 것이다.
‘학성아, 내가 무당파에 졌다. 후후후.’
마현의 입술이 틀어졌다.
‘대신 훗날 거하게 술을 사야 할 것이다.’
마현은 그만 고민을 끝냈다.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군.’
마현의 얼굴에서 풀풀 풍기던 냉기가 서서히 옅어져갔다.
‘하지만 이 카칸이, 마현이 순순히 꼬리를 말 수는 없지.’
마현의 얼굴에서 냉기가 사라지고 투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든지 결과는 같은 것 아닙니까?”
“그리 말하니 편하군.”
청하진인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마현의 말에 청하진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칠성단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교의 침입자다! 포박하라!”
스르릉, 챙챙챙!
칠성단원들은 일제히 복명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무당파 제자답지 않게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상당히 음침하고 폐쇄적이었다.
『주군!』
땅속에서 왕귀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나오지 마라. 이건 내 업이다.』
마현은 서서히 자신을 조여 오는 칠성단을 보며 서클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현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뿜어졌다.
“개진(開陣)!”
칠성단주의 목소리에 단원들은 일곱 명씩 짝을 지어 칠성진을 펼쳤다.
“연계(連繫)!”
이어진 명에 칠성진과 칠성진이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또 다른 거대한 칠성진을 만들었다.
칠성단은 그 이름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무당파의 절기인 칠성검을 극성으로 연마한 이들로, 칠성검을 기반으로 하는 칠성검진을 익히고 있었다.
거대한 칠성진이 만들어지자 마현이 느끼는 압박감과 그들의 기세는 순식간에 증폭되었다. 마현은 마기를 더욱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마력을 눈으로 집중했다. 마력이 눈으로 스며들자 마기가 은은하게 묻어나오며 눈동자에서 빛이 폭사되었다.
“출(出)!”
칠성단주의 목소리가 터지기가 무섭게 마현을 둘러싼 일진이 마현을 향해 검을 들었다.
쐐애애액!
쑤아아악!
공기를 빛처럼 가르며 검이 내뿜는 파공성이 순식간에 마현의 몸을 에워 감쌌다.
“펌 실드(Firm shield)!”
비록 마력의 소모가 일반 실드에 비해 두 배 이상이었지만 마현은 실드 중 상위 서클에 해당하는 펌 실드를 펼쳤다.
따다당, 탕탕탕!
펌 실드의 은은한 보호막과 칠성단의 검 사이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레이트 실드(Great shield)!”
마현은 그 즉시 실드의 크기를 키웠다.
우우우우웅!
마력을 머금은 실드는 길고 은은한 음을 토해내며 칠성단의 일진을 강제적으로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당황한 칠성단 소속 무당파 제자들이 천근추의 수법으로 몸을 지탱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땅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뒤로 밀려날 뿐이었다.
“지금 뭐하는 것이냐!”
눈앞에 보이는 황당한 모습에 칠성단주가 목청을 높였지만, 일진의 퇴행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진에 있던 몇몇 무당파 제자들이 몸을 날려 검을 휘둘러봤지만 실드에 부딪혀 푸르고 붉은 불꽃만 만들어낼 뿐이었다.
“사, 사술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기가 질린 얼굴을 하는 이도 여럿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들의 눈에 비친 실드는 호신강기의 일종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