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2화
무당파의 폐관수련동은 천연 동굴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다. 수련실에 들어가 있노라면 바깥세상과 연결된 것이라곤 천장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 하나뿐이다.
오늘도 그 구멍 사이로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아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쐐애애액!
사내는 마치 유일하게 수련실을 밝혀주는 빛을 잘라 버리려는 듯 햇빛 아래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후우…….”
검을 거둔 사내는 숨을 가다듬으며 길게 내쉬었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른 사내는 수련실 구석에 놓인 두 개의 항아리로 걸어갔다.
한 항아리에는 벽곡단이, 나머지 한 항아리에는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사내는 표주박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남은 물을 얼굴과 몸에 뿌렸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사내는 벽에 허리를 기대며 바닥에 앉았다.
그런 사내의 눈동자는 조금 전과 달리 무척이나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이번 무림대회가 끝나면 스승님께 시간을 조금 달라고 해서 현이를 찾아봐야겠다.’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짓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이제는 도인이 되어 학성이라는 도명으로 문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손정이었다.
학성은 고개를 들어 아련한 눈빛으로 수련실과 바깥세상을 유일하게 연결하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놈, 5년이 흘렀건만 아무 연락도 없다니……. 혹 어렵게 사는 건 아닌지…….’
“휴우…….”
학성은 다시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 * *
새하얀 마차.
그 새하얀 마차를 끄는 잡티 하나 없는 백마 여덟 필.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는 백마를 탄 서른 명의 백의를 입은 사내들.
확실히 이목을 끄는 행렬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보고 누구 하나 선뜻 호기심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바로 팔두마차 위에 펄럭이는 깃발 때문이었다.
새하얀 비단에 푸른 눈보라가 그려진 깃발, 그것은 바로 북해빙궁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설 사저, 정말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군요.”
북해빙궁주 설관악의 제자인 냉천휘는 근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여정임에도 지치지 않는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냉천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북해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얼음에 둘러싸인 북해의 회색빛 풍경만 봐오다가 중원에 처음 발을 들였으니 그에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재밌고 신기했다.
냉천휘는 코를 한껏 벌름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아……, 공기도 어쩌면 이렇게 따뜻하고 맑을까요? 안 그래요, 설 사저?”
수없이 반복되는 냉천휘의 질문에 설린은 마지못해 ‘그래’하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리곤 금세 다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린의 맑은 눈동자에도 스쳐지나가는 녹음이 비춰졌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설린은 문득 손에 낀 가락지를 내려다봤다.
마현에게서 선물로 받은 뒤 한 번도 손에서 빼지 않았던 가락지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밌어서, 그 다음에는…… 모르겠다. 아니 이유를 외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저 습관이 되어버렸다. 빼면 허전함을 느끼는 습관.
‘그곳으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린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를 보면 이 정체 모를 감정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커졌다.
설린은 조용히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심장과 함께 손도 뛰는 것 같았다.
* * *
섬서성 성도 서안(西安).
하지만 사람들은 서안보다 옛 과거의 향수가 묻은 장안(長安)이란 명칭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한때 폐허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안은 다른 성의 성도보다 더 크고 화려한 듯 보였다.
마현과 흑풍대가 서안 안으로 들어왔다.
성문으로 들어서는 흑풍대의 모습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싫어 마현은 흑풍대 특유의 검은 피풍의를 잠시 벗으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복장 또한 자유롭게 입으라 명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 흑풍대원들은 흑풍대가 되기 전에 즐겨 입던 옷들로 모두 갈아입은 상태였다.
단지 복장을 자유롭게 입은 것이라면 조금 보기가 좋았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과거 흑풍대 전원이 삼류, 혹은 이류 마인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낭인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생활을 했던 이들이다. 엄격한 흑풍대 복장에서 벗어나자 옛 습관이 다시 되살아났는지 옷은 물론이요 검을 소지한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마현은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질서 없는 낭인들로 보이겠지만, 그 안에는 흑풍대 나름의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던 까닭이다.
서안의 저잣거리를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질 좋은 비단 유생의, 산들산들 흔드는 섭선.
거기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명마.
그 주위를 둘러싸고 호위하는 낭인들의 모습.
마현과 흑풍대의 모습은 영락없이 유람 나온 어느 부잣집 도련님 행색이었다. 그런 까닭에 가끔 행인들의 눈길은 받았지만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성 안은 사람들로 인해 매우 붐볐다.
화산파에서 열리는 무림대회가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도시인만큼 거리에는 크고 작은 객잔들이 즐비하게 늘어섰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린 탓인지 빈 객잔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마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현 혼자라면 모를까, 흑풍대까지 함께 묵을 객잔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흑풍대를 모두 풀어 객잔을 수소문했다.
객잔이 고급이든 허름한 곳이든 상관없었다. 이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객잔이면 되었다.
그렇게 흑풍대가 흩어지고 대략 일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쯤이었다.
“주군, 다행히 객잔 하나를 찾았다고 합니다.”
과거 사천총타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소매가 찢어지고 상의가 풀어헤쳐진 모습으로 왕귀진이 다가와 보고했다.
“다행이군. 그곳으로 가지.”
잠시 후 흑풍대가 다시 소집되고 마현은 그들과 함께 객잔으로 향했다.
“저곳입니다, 주군.”
대로를 따라 조금 떨어진 곳에 우뚝 솟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워낙 객잔 잡기가 어려워 애써 잡은 객잔이 좀 허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4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제법 깨끗한 객잔이었다. 중앙 번화가를 조금 빗겨난 곳에 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몰리지 않은 듯했다.
“별채를 잡으려다가 혹시 몰라 객잔 4층 전체를 빌렸습니다.”
“잘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보다야 그것이 더 편할 테니…….”
마현은 흡족해하며 말에서 내렸다.
“풍아.”
푸히이잉!
풍은 떨어지기 싫은지 머리를 내밀며 마현의 몸에 머리를 비벼댔다.
마현은 그런 풍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쉬고 있어라.”
풍이 아쉬운 듯 촉촉한 눈망울로 마현을 쳐다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힘차게 투레질을 한 번 내뱉고는 흡사 물속으로 스며들 듯 땅 아래로 몸을 감추었다.
“가자.”
마현은 다시 흑풍대를 이끌고 객잔으로 걸어갔다.
이미 마현 일행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점소이 하나와 말끔한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객잔 밖으로 나와 마현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뒤로 철용의 모습도 보였다.
찰나지만 마현을 대면한 지배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객잔을 예약한 흑풍대원들이 낭인들 차림을 하고 있는지라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끔하게 차려입은 마현이 모습을 드러내니 적어도 돈 떼일 일은 없을 거라 안도하는 듯 보였다.
“매향객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분히 접대용 인사에 미소까지 곁들이며 지배인이 다가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를 따라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처럼 객잔은 내부도 깔끔했다.
“왕이야, 네가 4층으로 안내해드려라.”
지배인의 말에 옆에 있던 점소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 녀석을 4층에 상주시켜 놓을 테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지.”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마현과 흑풍대는 왕이라는 점소이를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번화가를 조금 빗겨난 곳이라 그런지 그다지 전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방을 둘러보고, 짐을 푼 뒤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대주.”
“예, 도련님.”
이미 입을 맞춘 터라 왕귀진은 마현을 주군이 아닌 도련님이라 불렀다.
“오늘 하루 정도는 술을 허락한다.”
“와아아아!”
“우어어!”
마현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흑풍대는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환호를 질렀다. 마현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다들 술을 좋아하던 놈들이었지만 흑풍대가 되면서 좀처럼 술을 접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 과하지 말 것.”
“감사합니다, 도련님.”
여기저기서 마치 고함과도 같은 감사 인사가 터져 나왔다. 마현도 함께 웃으며 왕귀진과 철용에게 비어 있는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둘은 나와 함께 마시지.”
영광이라는 듯 왕귀진과 철용이 냉큼 의자를 빼고 앉았다.
잠시 후 푸짐한 음식과 술이 탁자를 가득 채웠다.
“한 잔 하자.”
마현은 술병을 들어 왕귀진과 철용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소인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늦은 점심 겸 간단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분위기는 금세 왁자지껄 흥겨워졌다.
그렇게 기분 좋은 술자리가 한창 이어질 때였다.
객잔 안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지배인이 재빨리 뛰어가 허리를 숙였다.
무리 중앙에 서 있던 화려한 무복을 입고 있는 청년은 지배인의 인사도 받지 않고 인상만 잔뜩 찌푸린 채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눈이 찢어지고 입술이 얄팍한 것이 편협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빈 방 있는가?”
청년의 옆에 있던 중년 사내가 지배인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지배인은 고개를 빠금히 젖혀 객잔 안으로 들어온 이들의 수를 대충 헤아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요.”
“인원이 더 있네.”
“몇 명쯤이나…….”
“한 십여 명 정도 될 걸세.”
“별채까지 빌리신다면 아슬아슬하긴 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중년인은 지배인의 말에 안도감을 내비쳤다.
“일단 별채로 모실까요?”
지배인은 청년의 얼굴을 힐끗 살피며 중년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별채는 본문 제자 분들에게 내줘야지. 이봐, 지배인.”
청년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지배인을 불렀다.
“예, 손님.”
“특실이 4층에 있나?”
“그렇습니다만 4층은…….”
“4층 전체랑 별채를 빌리지.”
청년은 지배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말만 툭 던지고, 올라가려 했다.
“저기 손님…….”
지배인은 조심스럽게 청년을 다시 불렀다. 그러자 청년이 짜증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돈이 걱정되나?”
“그게 아니라……, 4층은 다른 분들이 이미 들어와 계십니다.”
“누가?”
청년의 짧은 반문에 지배인은 슬쩍 고개를 돌려 눈짓으로 마현과 흑풍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청년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