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4화
특이한 것은 무당파 도인들의 도복이 짙은 남색이 아닌 새하얀 색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상복(喪服)이었다.
도인들은 누가 죽었다고 해서 상복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달포 전 무당파 최고 어른인 현도상인이 타계(他界)했다. 그렇기에 무당파는 산문을 걸어 잠그고 참배객도 들이지 않고 현도상인에 대한 추모 법회를 매일 열어왔다.
오늘도 추모 법회를 끝내고 장문인실로 돌아온 청하진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스승인 현도상인의 타계도 큰일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마현 때문이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차기 무당파를 이끌어가야 할 학성 때문이었다.
무거운 안색을 하며 장문인실로 들어서는 청하진인의 뒤로 청명진인과 학방이 함께 따라 들어섰다.
“제가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청하진인과 청명진인이 자리를 잡을 때 학방이 차를 준비했다. 학방이 차를 준비해 다시 탁자로 돌아올 때까지 탁자 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향긋한 다향도 청하진인과 청명진인의 깊은 한숨에 그 향을 뽐내지 못하고 흩어지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청하진인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며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장문사형.”
“……?”
“이 사제는 걸왕님의 말이 더 걸립니다.”
걸왕은 현도상인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였다.
비록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지만 걸왕은 현도상인의 마지막 모습을 비교적 세세히 알려주었다. 현도상인이 죽기 전에 마현을 만났으며,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어찌 사백님께서는 마교 대공자에게 본파를 지켜달라고 했을까요?”
청하진인은 청명진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답을 알았다면 지금 이처럼 답답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현도상인이 마현에게 했다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천존님의 뜻을 보신 것인가? 도대체 그 뜻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대화가 다시 끊어졌다.
끊어진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못했다.
따뜻한 차가 미지근해지고 다시 차가워졌다. 그 시간 동안 탁자 위를 오가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학성을 무림대회에 안 보낼 수도 없고…….”
학성의 이름은 이미 무림맹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단지 이름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오로지 청명진인의 제자라는 것과 무당파에서 최고의 후기지수에게 전해지는 호칭인 ‘태극검룡’을 학방에게 물려받았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단지 소문일 뿐, 실제로 학성이 스스로 증명한 것은 없었다.
그 증명을 이번 무림대회에서 하려 했다. 그렇기에 학성에게도, 무당파에서도 놓칠 수 없는 무림대회였다.
하지만 학성을 무림대회에 보내자니 마현이 걸렸고, 안 보내자니 그동안 널리 알려온 학성의 이름이 사상누각이 되며 세인들의 비웃음을 살까 걱정이 되었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 딱 그 꼴이었다.
“천존님의 뜻이라…….”
끝은 모르나 그 길을 안다면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장문사형.”
“인연은 하늘의 뜻, 일단 그냥 놔둬 보세. 무량수불.”
청하진인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도호를 낮게 읊조렸다.
* * *
청록색 도복을 입은 십여 명의 도인들이 서안에 들어섰다.
바로 청성파 도인들이었다.
“휴우, 송일 사형, 정말 사람 많군요.”
“그러게 말이다.”
선두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이는 청성파의 송일과 태일이었다. 그 뒤를 그 둘보다 한 배분 아래인 운자 항렬의 도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리 붐비니 객잔 잡기 쉽지 않겠는데요.”
“난주감상의 영이가 잡아놓겠다고 했으니 그다지 걱정할 건 없지 싶다.”
“감영 말씀이십니까?”
태일은 감영의 이름이 나오자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음에 송일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태일의 웃음이 그를 자극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감영이라는 이름이 주는 언짢음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여전히 사형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까?”
“그걸 뭐라 하겠느냐, 어찌되었든 내게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하지만 정식 사제지간을 맺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서라, 난주감상은 청성파에 큰 기부를 하는 몇 안 되는 곳이니까.”
그건 태일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태일뿐만 아니라 청성파 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난주감상의 독자를 속가제자로 받아들여 장문인의 제자인 송일이 특별히 가르친 것이다.
그런 송일이 그의 이름을 들으며 습관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감영의 편협하고 우쭐되기 좋아하는 성품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보잘것없는 재능이었다. 무에 관한 재능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나마 강제로 영단 하나를 먹여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했지만 그를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송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감영이 스스로가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무림대회에 참석해 청성파와 난주감상의 이름을 천하에 알리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그것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만 나왔다.
“사형, 저기.”
태일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난주감상의 호위무사 같은데요.”
“그래 보이는구나.”
얼마나 숨 가쁘게 뛰어왔던지 그들 앞에 선 사내는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객잔을 잡아두었습니다.”
“그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이가 수고했군.”
송일은 감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상가가 청성파에 하는 것이 있어 빈말이라도 툭 던져주었다.
“도련님이 기다리십니다. 소인을 따라오시지요.”
사내는 청성파 도인을 안내하며 매향객잔으로 향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안 오지? 에이, 잡았으니까 따로 연락을 안 했겠지.’
매향객잔으로 들어서며 차후 객잔이 바뀌게 되면 통보하겠다는 명을 듣고 사내는 서안으로 들어서는 성문으로 향했다. 별다른 통보가 없었으니 객잔을 잡았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향객잔이 보였다.
“저깁니다, 도인님들.”
송일과 태일이 앞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흠?’
들어서는 순간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스, 스승님!”
그때 고통에 찬 목소리가 객잔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스, 스승님.”
감영은 송일이 객잔 안에 모습을 드러내자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어갔다.
“어찌 된 일이냐?”
송일은 팔이 잘려 온몸이 피범벅이 된 감영을 부축해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감영이 하나 남은 팔로 마현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원한 가득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치며 고해바쳤다.
“저놈입니다! 저놈! 저 마인이 다짜고짜 객잔을 비우라며 제 팔을 잘라 버렸습니다.”
“마인?”
챙!
송일은 마인이라는 말에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검을 뽑자 태일과 뒤를 따라 객잔 안으로 들어온 청성파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너, 너는?”
객잔 안을 살피던 태일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객잔 구석, 태일의 시선이 향한 어둑한 곳에서 마현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놈의 명줄도 그다지 길지 않은 것 같군. 이렇게 본인의 눈에 띈 것을 보면…….”
구석진 곳에서 마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본인이 한 말을 기억하나?”
“…….”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태일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면 마현의 얼굴엔 서릿발처럼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 * *
학방은 단단한 철문 바로 위, 벽에 새겨진 수련제일동(修練第一洞)이라는 글씨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이나 그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학방의 시선은 차츰 아래로 내려와 굳게 닫힌 철문으로 향했다.
“흠…….”
옅은 침음성을 내뱉는 학방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인연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구나, 얄궂어…….’
학방은 조금 전 청하진인과 청명진인에게서 학성과 마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량수불…….’
속으로 도호를 외칠 때였다.
쿵!
묵직한 쇳소리가 들리더니 굳게 닫혔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새카만 동굴 안에 한 청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폐관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학성이었다.
밝은 빛에 잠시 적응이 안 되었는지 학성은 살짝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형.”
학성은 학방을 보자 그 앞으로 걸어왔다.
“원하는 것은 얻었냐?”
“예, 사형.”
학방의 질문에 학성은 득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사형, 어찌 도복의 색이…….”
학성은 학방이 입은 도복이 남색이 아닌 하얀색인 것을 지적했다.
“달포 전 대사부께서 탈각하셨단다.”
“그 어른께서요?”
학성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학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려가자.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예.”
둘은 수련동에서 내려와 진무각주실로 향했다.
“오늘은 바쁠 게다.”
“제가 너무 촉박하게 나왔지요? 죄송합니다, 사형.”
학성은 예정보다 삼 일 정도 늦게 수련동에서 나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화산파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학성이 늦게 출관하는 바람에 일정이 조금 더 늦춰진 것이다.
“괜찮다. 하루쯤 늦는다고 해서 참가를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어느새 둘은 진무각주실 앞에 다다랐다.
“사숙께 인사올리고 오늘은 편히 쉬어라.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사형.”
“아, 그리고 스승님께서 어차피 내일 떠나기 전 볼 것이니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 사숙께만 인사 올리고 그냥 편히 쉬어라.”
“같이 안 들어가십니까?”
진무각주실 앞에서 몸을 돌리는 학방의 모습에 학성이 물었다.
“아서라, 근 일 년 만에 사제지간이 함께하는 자리에 끼어들 만큼 이 사형 눈치가 없진 않다.”
학방은 학성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돌아섰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학성을 보며 학방은 어서 들어가라 손짓했다. 다시 한 번 눈으로 인사를 한 학성은 진무각주실로 들어갔다.
사실 학성이 수련동에서 나오는 것을 학방이 마중 갈 이유는 없었다. 굳이 그를 찾은 이유는 며칠 동안 학성과 마현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수련동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네가 무림대회가 열리는 동안 학성을 곁에서 돌봐주어라.”
오늘 아침 스승이자 무당파 장문인인 청하진인의 명이 떠올랐다. 어찌어찌하라는 구체적인 명은 없었다. 그게 더 답답하고 무거웠다. 그럴 리 없지만 모든 짐이 자신에게 떠밀려온 것 같았다.
‘스승님도 답이 없어 그리 말씀하셨을 텐데…….’
불경한 생각을 한순간 가졌다고 생각했음인지 학방은 조용히 눈을 감고 도호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무당파에서 내려오는 산길.
사실 평소에 워낙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어서 그다지 산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동안 참배객을 받지 않아 지금은 인적이 드문 길로 바뀐 터라 넓은 산길은 고즈넉했다.
사박 사박 사박.
그 산길을 두 명의 무당파 제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학방과 학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