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5화
“사형.”
“응?”
“왜 우리 둘만 길을 떠나는 겁니까?”
학성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학방은 그 질문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늙은 사형과 단둘이 길을 떠나니 심심하더냐?”
사실 청하진인과 청명진인이 십여 년의 나이 차가 있는 것처럼 둘 사이도 십여 년 차이가 있었다.
청하진인보다 청명진인의 나이가 훨씬 적은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그보다 청명진인이 학성을 늦게 제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하하, 사형. 농이 너무 짙어 이 사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 사형의 농이 제대로 먹힌 것이구나. 하하하하.”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학성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스승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명 사숙님?”
“예, 사형.”
학성은 고개를 들어 학방을 쳐다보았다.
“사형.”
“……?”
“제 기우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스승님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 보였습니다.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왜 학방이 그것을 모르겠는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문인의 표정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은 것 같고요.”
“…….”
학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것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 학방의 모습에 학성은 그저 사형도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곁눈질로 학성을 쳐다보는 학방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화산으로 가면 필시 마 공자를 보게 될 것인데…….’
사실 학방은 청하진인이나 청명진인처럼 다른 이의 시선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단지 그가 걱정하는 것은 학성이었다.
“사형, 이번에 우승을 해서 수심 깊은 스승님과 장문인의 얼굴에 웃음꽃을 만들어 줘야겠습니다.”
학방의 고심을 모르는 학성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씩씩하게 말했다.
“녀석, 꼭 그리해라!”
학방은 손을 뻗어 학성의 어깨를 억세게 감싸 안았다.
그렇게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두 사형제가 안개 자욱한 무당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 * *
태일과 마현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맞부딪히자 송일은 마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자는 누구냐?”
“마교 대공자입니다.”
태일은 마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송일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하필…….’
송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자신의 다리를 잡고 와들와들 떨고 있는 감영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놈!’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지금 감영이 딱 그 꼴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멋모르고 무림대회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분명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청성파 제자임을 거들먹거렸을 것이다.
송일은 검 자루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불룩 솟아올랐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검을 들어야 했다. 강호에서 청성파의 이름은 낮지 않으니까.
태일 역시 마현을 주시하면서 그 뒤에 포진하고 있는 자들을 살폈다. 옷차림은 다르지만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바로 흑풍대였다.
‘흑풍대…….’
“객잔 안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마현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객잔 내부를 훑었다.
“그래도 며칠 집으로 삼아야 할 곳인데, 혈향이 짙게 배면 곤란하겠지?”
마현의 물음은 태일을 향해 있었다.
그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기에 태일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마현은 활짝 폈던 섭선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면서 태일이 딛고 서 있는 바닥에 그리스 마법을 깔았다. 동시에 섭선을 휘둘렀다.
“윈드 커터!”
십여 개의 바람의 칼날이 순차적으로 태일에게 날아갔다. 언제라도 검을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태일은 어렵지 않게 검을 들어 자신의 몸을 방어했다.
또한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무릎을 살짝 굽혀 힘을 주고 바닥에 발바닥을 단단히 밀착시켰다.
쾅!
처음 바람의 칼날이 태일의 검과 부딪혔다.
‘헙!’
순간 태일의 눈이 부릅떠졌다.
단단히 바닥을 디디고 서 있었건만 마치 얼음판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자신의 몸이 뒤로 주룩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볼 정도의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바람의 칼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일은 몸을 더욱 숙이며 두 다리에 내력을 내려보냈다.
천근추의 수였다.
쾅!
하지만 그는 낮은 신음을 흘려야 했다.
“큭!”
태일의 몸이 또다시 뒤로 주룩 밀려났다. 천근추의 수도 통하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쾅!
연이어 날아오는 바람의 칼날, 그 날카로운 선기에 태일의 몸은 어느새 객잔 입구까지 밀려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태일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선기야 흔하지 않지만, 사실 선기나 검기나 똑같은 것이다. 한데 그런 선기에 자신의 몸이 이처럼 맥없이 뒤로 밀려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밀려난 것이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다잡는 태일의 눈에 마현의 차가운 미소가 보였다. 그 미소가 더욱 진해지며 마현의 섭선이 크게 궤적을 그렸다.
“서, 선강?”
섭선에서 반투명한 강기가 쏘아졌다.
“윈드 재벌린!”
쿠오오오오―
윈드 재벌린, 바람의 창은 공기를 갈가리 찢으며 기염을 토해냈다. 태일은 검을 가슴으로 바싹 당겨 한순간 내력을 폭발시켰다가 다시 휘둘렀다.
하나의 검이 수십 개의 검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검은 흡사 그물처럼 촘촘히 흩어지며 태일의 몸을 에워 감쌌다.
검막이었다.
콰과과광!
윈드 재벌린과 검막이 서로 부딪히며 강렬한 폭음과 함께 객잔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깔끔한 객잔이었지만 천장에 미세하게 쌓여 있던 먼지가 그 충격에 우수수 떨어졌다.
“큭!”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터트린 태일의 억눌린 신음소리가 객잔 밖에서 들려왔다. 마현의 의도대로 태일은 윈드 재벌린의 엄청난 힘을 버티지 못하고 객잔 밖까지 순식간에 밀려난 것이다.
마현은 섭선을 접으며 객잔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송일이 검을 들고 마현의 앞을 막아섰다.
마현은 섭선으로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송일의 검을 옆으로 밀어내며 물었다.
“그대도 죽고 싶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살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는 마현을 보며 송일은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죽고 싶으면 나오라.”
마현은 송일을 지나쳐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곧 다시 멈춰야만 했다. 이번에는 송일의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청성파 제자들이 검을 뽑으며 막아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세와는 달리 그들은 하나같이 마현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훗.”
마현은 옅은 실소를 머금으며 몸에서 마기를 개방했다.
우우우웅―!
마현의 흑색 유생의가 펄럭거릴 정도로 마기가 몸을 휘감았다. 마기는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지 서서히 주위로 퍼져나가며 청성파 제자들을 은근히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자 청성파 제자들이 엉거주춤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마현은 마기를 더욱 그들에게 집중시키며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마현의 한 걸음에, 청성파 제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다시 마현의 한 걸음에, 다시 청성파 제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마현이 몇 걸음 내딛자 청성파 제자들은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가 없게 되었다. 객잔의 벽과 출입문이 그들의 뒤를 가로막은 것이다.
마현은 씨익 웃으며 다시 발을 내딛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며 출입문 앞을 열어 주었다.
마현은 출입문 바로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명심하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미리 경고하지. 만일 태일 도장과 본인 사이에 끼어들면 그 누구라도 죽는다. 죽고 싶으면 끼어들어도 좋다.”
일그러지는 송일의 얼굴을 뒤로 하고 마현은 여유 있게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로 한가운데 태일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 때문일까. 어느 사이엔가 대로엔 인적이 뚝 끊겨 있었다. 태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뿐 길을 오가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마현이 밖으로 나가자 청성파 제자들과 흑풍대가 그 뒤를 이어 쏟아져 나왔다. 양쪽은 곧 마현과 태일을 중심으로 대치했다.
“대주.”
“예, 주군.”
“무고한 양민들이 다치지 않게 공간을 넓혀라.”
“명!”
왕귀진은 즉시 흑풍대를 시켜 대로 위 공간을 넓혔다. 양민들 역시 그런 흑풍대의 지시를 순순히 잘 따랐다. 그들 모두 무림인들의 싸움에 호기심을 갖고 모여든 것이지 싸움에 끼어들어 다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태일아…….”
그사이 송일은 태일 가까이 다가갔다.
“사형, 이건 이 사제의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
“혹 사천당문에서의 일이냐?”
태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형, 사질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태일아.”
“마교 대공자에게 이 손으로, 이 검으로 청성의 위대함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태일은 마현을 노려보며 투기를 불살랐다.
송일은 갈등에 휩싸였다.
그는 태일과 달리 마교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문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청성파의 장문인이자 스승인 청허자의 영향 때문이었다.
태일만 나선다면 이 일은 단지 마교 대공자와 사제 둘만의 일로 국한될 수 있지만, 자신을 비롯해 청성파 제자들이 모두 나선다면 그때부터 청성파와 마교의 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마교와 청성파 간의 은원.
그건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정마대전까지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될 수 있다는 소리다.
“사형, 이 사제를 못 믿습니까?”
갈등하는 송일의 모습에 태일이 한 자 한 자 찍어내듯 말을 내뱉었다. 그 음성엔 자신감 또한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하다, 사제.”
결국 송일은 검을 거뒀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일이 아니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제.”
송일은 태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어깨를 꽉 쥐었다.
“반드시 이겨라. 그 이후의 일은 무조건 이 사형이 책임지겠다.”
태일은 송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송일은 뒤로 물러나며 청성파 제자들에게 검을 거두라 명을 내렸다.
촤아아악!
태일은 허공에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마현 앞으로 자신 있게 걸어 나갔다.
“마는 결코 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태일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지이잉―
그 기세가 검에 담겨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죽을 준비는 되었나?”
마현은 그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흘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태일은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