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20화
“어찌되었나?”
야율황기가 마현과 철용 가까이 다가왔다.
그뿐 아니라 야인들 역시 제멋대로 서 있거나 누워 있었지만 다들 고개를 돌려 철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까딱하다가는 길거리에서 노숙할 팔자였기 때문이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됐습니다. 아무래도 남만야수궁 야인들께서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뭔가?”
“나오시게.”
철용이 객잔 문을 향해 소리치자 문이 살짝 열리며 지배인이 머리만 쏙 내밀었다. 여전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괜찮으니 어서 나오시게.”
철용이 몇 번 더 타이르듯 다그치자 지배인은 주춤거리며 객잔 밖으로 나왔다.
“말씀하시게.”
철용의 말에 지배인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천성이 장사꾼인지 한 번 말문이 트이자 객잔 안에서 철용과 나눴던 말을 술술 풀어냈다.
“일단 별채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야율황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배인의 말이 거듭될수록 그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 객잔 문으로는 못 들어가십니다. 객잔 뒤로 나 있는 뒷문만 이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기…….”
턱으로 맹수들을 가리키던 지배인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매, 맹수들은 별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맹수들이 있기 때문에 점소이를 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거기에 따르는 불편함을 감수해 주십시오.”
지배인의 말을 듣는 내내 얼굴을 찌푸리던 야율황기는 급기야 입술을 벌려 어금니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지배인 앞으로 얼굴을 바싹 내밀었다.
“그게 다냐? 앙?”
마치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히익!”
그 모습에 지배인의 얼굴은 다시 새하얗게 탈색되었고, 온몸을 후들거리다가 결국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땅에 웅크린 그의 몸은 겨울날 가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지, 지배인은 눈을 부릅뜨며 힘겹게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두, 두 배!”
“……?”
“수, 숙박료를 두, 두 배로 내셔야 합니다.”
“이놈이, 감히 남만 야인을 호구로 알아?”
야율황기의 몸에서 맹수의 야성과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두 배! 아니면 절대 안 됩니다요!”
지배인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몸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지배인이 강단 있게 나오자 야율황기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기운을 거두었다.
“에잉, 어쩔 수 없지.”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지배인의 얼굴엔 약간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두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그렇게 남만야수궁은 마현의 도움으로 객잔 별채에 무사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 * *
끼우욱― 끼우욱!
서안으로 들어서는 외곽 성벽 위로 새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상공을 선회하며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흰 독수리 아래, 구릿빛 피부를 한껏 드러낸 여인 한 명이 역시나 새하얀 표범을 옆에 대동한 채 오연히 서 있었다.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는 여인의 옷차림은 중원의 것이 아니었다.
몸에 착 달라붙어 아찔한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낸 옷은 남만 지역의 독특한 복색이었다.
“이씨! 정말 잡히면 죽었어!”
주먹을 불끈 쥐며 아미를 잔뜩 찌푸리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남만야수궁의 야화 야율선이었다. 무엇에 그리도 화가 났는지 그녀는 씩씩거리는 숨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이토록 분노하게 만든 것은 오빠 야율황기였다.
얼마 전 ‘여자애랑 다니면 불편하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그녀 몰래 야율황기가 수하들을 데리고 흡사 야반도주라도 하듯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그것도 초저녁부터 그녀에게 술을 진탕 먹여 놓고는 말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야율선은 분을 채 삭이지 못하고 이렇게 오빠의 행적을 쫓아오는 내내 씩씩거리고 있었다.
야율선은 습관적으로 새하얀 표범, 백묘(白猫)의 뒷덜미를 쓰다듬다가 욱하는 성질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캬오오옹!
그러자 백묘가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시끄러워!”
야율선은 그런 백묘의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았다.
끼이이잉!
“어차피 서안에 있는 이상, 백조(白鳥)의 눈을 피할 수 없지.”
백조는 새하얀 독수리의 이름이었다.
야율선은 하늘에 떠 있는 백조를 보며 눈을 표독스럽게 빛냈다. 벌써부터 그녀의 머릿속엔 오빠에게 복수하는 그림이 신랄하게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흠…….”
야율선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삐딱하게 한 채 서 있었다.
“생각보다 꽁꽁 숨은 모양이네. 아악, 약 올라!”
야율선은 아무 잘못도 없는 백묘의 머리를 또다시 후려쳤다.
캬오옹!
백묘는 별반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냥 땅바닥에 배를 깔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응?”
그때 활짝 열린 성문으로 마차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북해빙궁?”
홀로 기다리기에도 심심하던 터라 야율선은 그 마차를 향해 냉큼 달려갔다.
“설 언니도 왔으려나?”
그녀는 설린이 어쩌면 무림대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것이다.
“왔으면 좋으련만.”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야율선은 기다렸다는 듯 훌쩍 몸을 날려 말 위로 올라섰다.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마부는 깜짝 놀라며 마차를 세웠다.
“으차!”
야율선은 마부를 향해, 그리고 걸개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창문으로 다가가 마차의 작은 창문을 탕탕 두드렸다.
“언니 있어?”
그 기척에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오옷! 있다, 있어.”
야율선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설린을 보자 호들갑을 떨더니 대뜸 문을 벌컥 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야.”
설린의 인사를 받으며 마차에 오른 야율선은 마차 안이 꽉 차 있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엥? 손님들이 있었네.”
그녀의 눈은 웬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어라? 냉 소협도 있었네요.”
“오랜만입니다, 야율 소저.”
야율선은 냉천휘와 면식이 있었던 터라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이후 냉천휘의 소개로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근데 어찌 혼자야?”
“아휴, 말도 마! 내 그 인간을! 잡히면 죽었어.”
설린의 물음에 야율선이 다시 씩씩거렸다.
그러면서 야율선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설린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간에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한창일 때였다.
끼우욱!
백조가 긴 울음을 토하며 마차 위로 내려앉았다.
그 울음에 야율선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백조를 쳐다보았다.
“아싸, 찾았다. 언니 어떻게 할 거야?”
“……?”
“같이 우리 오빠한테 갈까? 혹 벌써 자리 잡았으면 객잔 잡기도 편할 수 있으니까. 성도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까 아주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요, 바글바글. 객잔 잡기가 아마 상당히 어려울걸?”
설린은 냉천휘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았어!”
야율선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문을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자, 출발!”
북해빙궁 마차와 그를 호위하는 설영대는 야율선의 백조를 따라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아쉬워.”
네 명의 청춘남녀가 얼굴에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 주루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남궁혁과 남궁방, 그리고 제갈영영과 제갈문이었다.
최상층의 온 벽면은 아무런 장식 없이 창문으로 채워져 있었다. 모든 창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는데, 그 창 너머로 중원오악 중 서악이라 불리는 화산의 한 자락이 보였다.
왜 이런 고급 주루의 최상층 내부에 아무 장식도 없는지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아…….”
그 숨 막히는 절경에 제갈영영은 앵두빛 입술을 살짝 벌리며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정말 언제 봐도 멋진 절경이에요.”
“그렇소?”
“네.”
“하긴 무덤덤한 내가 봐도 저리 웅장한 것을…….”
남궁혁과 제갈영영이 서로에게 몸을 살짝 기댄 채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그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주루 한구석에서 들려왔다.
“형님.”
“누님!”
먼저 자리를 잡은 남궁방과 제갈문이 그런 그들을 향해 동시에 못마땅한 눈빛과 마땅찮은 목소리를 뱉은 것이었다.
“녀석들.”
남궁혁은 그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제갈영영은 암고양이도 저리가라 할 만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그런 눈빛에 둘은 찔끔하며 몸을 사렸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남궁방이 자리를 잡는 남궁혁과 제갈영영을 보며 주루에 올라올 때보다 더욱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라……. 식견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으니…….”
“그런데 정말 천마군림보였을까?”
제갈문이 남궁방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천마군림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
“마교 대공자의 무위를 견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잖아. 어디 우리가 마교의 마공을 본 적이 있냐?”
“그 말은 방이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남궁혁 역시 남궁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지금 섬서성에 파다하게 퍼진 청성파 제자들과 마현의 싸움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뒤늦게 그곳으로 뛰어가 봤지만 이미 싸움은 끝난 후였다.
“소문이 어찌 났던 중요한 것은 마교 대공자가 섬서성 대로 한가운데서 청성파 제자 십여 명을 홀로 상대해서 이겼다는 거지.”
“거기에 청옥검을 지닌 송일 도장과 태일 도장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죠.”
제갈문의 말에 남궁혁의 머리가 무겁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청성파가 무림대회에서 이 일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요?”
남궁방이었다.
“글쎄다, 전후 사정을 몰라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어찌되었든 청성파에서 죽은 제자는 없고, 더구나 청성은 무리로 덤볐지만 마교 대공자는 홀로 그들을 대적했다고 하니……. 흑풍대가 있었는데 말이다.”
“거참, 정말 마교 대공자의 얼굴을 보고 싶군요.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정파 세력권에서 그리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마교의 사공자에서 단숨에 웅천마군 추도영을 죽이고 대공자로 올라선 자이니 그만한 배포가 있는 거겠지…….”
“나이도 우리와 비슷하다고 하던데…….”
“아마도 이번 무림대회가 끝나면 무림맹 수뇌부 사이에서도 그를 두고 논란이 분분할 것이다.”
자신들이 앉아 있는 탁자 정 반대편에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현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네 청춘남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 * *
“언니.”
“응?”
야율선은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녀가 등장한 이후로 마차 안은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사공자, 아니 이제 대공자지.”
야율선은 혀를 쑥 내밀며 머리를 툭 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대공자라는 말에 설린의 담담하던 눈동자가 찰나지만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