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121화 (121/351)

# 121

21화

“오늘 성 안에서 한 건 했더라.”

“……?”

설린은 그녀답게 눈동자로만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야율선의 말에 궁금증을 드러낸 것은 설린만이 아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거나, 그다지 귀담아 듣고 있지 않던 이들 역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주시하자 야율선은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입을 놀렸다.

“글쎄 성 안에서 청성파와 한바탕 했다지 뭐야.”

“청성파와?”

“응, 엄청난 무위를 선보이며 청성파 제자들을 완전히 때려눕혔대. 들은 소문에 의하면 허공답보에…….”

“허, 허공답보?”

학방은 너무 놀라 그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반응에 야율선이 고개를 돌려 학방을 은근히 노려봤다. 그로 인해 자신의 이야기에 흐름이 끊긴 탓이다.

“미, 미안하오.”

야율선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설린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또 천마군림보를 보였다나 어쨌다나…….”

“…….”

“아, 대공자로 올라섰다더니 마교 교주님의 진전을 받으신 건가? 그럼 이제 소교주?”

홀로 상상하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던 야율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더 멋있어졌겠지? 좋겠다……, 누군지 몰라도 마교 대공자의 배필이 될 사람은…….”

배필이란 단어에 설린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왜긴, 세잖아!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힘이 최고 아니겠어?”

남만야수궁의 여인다운 대답이었다.

“아!”

야율선은 손바닥을 탁 치고는 은근한 눈으로 설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노골적이다 보니 설린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배필은 언니?”

장난기가 다분했지만, 야율선은 부럽다는 듯 설린의 옆구리를 툭 쳤다.

갑자기 설린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

“응? 아니야?”

야율선은 그 표정에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아니야.”

설린은 왠지 가슴이 먹먹해져 그리 대답했다.

“정말?”

야율선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치뜨더니 코맹맹이 소리로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리며 슬쩍 설린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꼬드겨 볼까나?”

* * *

마현과 야율황기는 흑풍대와 남만야수궁 야인들을 아래층에 자리를 잡게 한 후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이 자리한 탁자에는 곧 음식과 술이 한상 푸짐하게 차려졌다.

“근데 너무 쥐어 팬 거 아닌가?”

“뭘 말입니까?”

“청성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마현은 술잔을 들며 차갑게 말했다.

“호오…….”

야율황기는 같이 술잔을 들며 묘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역시 대공자는 사내야. 암! 마음에 안 들면 누구든 찍어 눌러야지.”

마현은 그런 야율황기를 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 말해.”

마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본인에게 하대를 하는 것입니까?”

“으, 응?”

뜨끔한 탓인지 어색하게 대답하던 야율황기가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뭐 어때? 어차피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

마현이 콕 집어 말해서 그런지 이번에는 다시 말을 슬쩍 올렸다.

“대공자.”

“……?”

“우리 그냥 격식 차리지 말고 지내자고. 사내들끼리 이거저거 다 따지면 좀 답답하고 그러지 않아?”

“그 말씀은 친우가 되자는 소리입니까?”

“친우? 끄응.”

야율황기는 ‘친우’라는 단어에 앓는 신음을 삼켰다.

“친우는 친우인데……, 내가 형, 자네가 동생. 뭐 그렇다고 복잡하게 의형제를 맺자는 것은 아니고.”

그도 친구가 되는 것은 싫은 기색이었다.

“싫소.”

마현은 그런 야율황기의 말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잘라 버렸다.

“너무 냉정하게 자르는 거 아니야?”

야율황기는 은근히 인상을 찌푸리며 마현을 바라보았다.

“옛말에 객지에서 만나 마음이 통하면 열 살 미만이면 벗이요, 열 살 이상이면 형 대접을 하라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야율 소궁주님과 본인의 나이가 열 살 이상까지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누가 그래?”

마현이 옛말까지 들먹이자 야율황기는 은근히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공자님과 주자님도 인정한 관례라 했습니다.”

“누구? 공자? 주자?”

마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남만야수궁이라고 해도 공자와 주자의 이름은 알았다.

“끄응…….”

그래도 성현으로 추앙받는 공자와 주자가 그랬다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요리조리 피해갈 만한 변명거리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훗.”

마현은 그런 야율황기의 모습을 보며 술잔을 들었다.

불편한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야율황기와 달리 마현의 모습은 느긋했다.

전처럼 서로 말을 높이던지, 아니면 친우가 되든지…… 마현으로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 보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에이, 좋다!”

야율황기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 내려치며 허리를 폈다.

“까짓것, 친구 먹지 뭐.”

마치 자신이 손해를 조금 감수하겠다는 듯 야율황기는 호탕하게 말했다.

“어차피 격식 차리는 거 체질에도 안 맞고, 그리고 대공자는 세잖아. 세면 친구 먹지 뭐.”

마현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가 설마 친구가 되자고 할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한 잔 마시자고.”

야율황기가 술잔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그 모습에 마현 역시 술잔을 들어 함께 마셨다.

그렇게 몇 순배가 돌고 분위기가 좀 더 익어갈 무렵이었다.

“아! 맞다!”

야율황기가 금방 뭐라도 생각이 난 것처럼 무릎을 탁 쳤다.

“물어본다는 게 까먹고 있었군. 그래 마 형, 설 소궁주의 다리는 걸었나?”

야율황기의 표정이 음침하면서도 야릇하게 바뀌었다.

“……?”

“거 왜, 안다리 있잖아.”

마현이 말을 잘 못 알아듣자 야율황기는 몸을 비틀어 보이며 재차 물었다.

“아, 왜 그거 있잖아.”

답답한 듯 야율황기가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쳤다.

“……?”

“아이구, 답답해. 밤에 자빠뜨렸냐고!”

이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마현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야율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설 소궁주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좀 더 재미있는 대답을 원했지만 마현의 대답은 서생처럼 싱겁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야율황기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무안한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정말?”

“뭐가 말인가?”

“설 소궁주와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거. 왜 교주 생신 때에는 한 쌍의 그 뭐냐……, 뭐 어쨌든 사이 좋아 보이더만.”

마현은 그냥 미소만 지었다.

특별히 대답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과거 추도영을 죽이기 위해 이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담담히 웃음만 머금자 야율황기는 눈동자를 가늘게 만들었다.

“그리 웃으니 더 수상한데…….”

야율황기의 말을 들으니 자연스레 설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거론되자 덩달아 소소한 기억들도 함께 떠올랐다.

“훗.”

문득 마현은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이 무뎌졌군.’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제껏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잠시 미뤄뒀지만 이제 슬슬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과거의 힘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웃으니 더 이상한데…….”

야율황기는 눈초리를 더욱 가늘게 만들며 마현을 쳐다봤다.

그때였다.

사람들 한 무리가 주루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빽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주루를 뒤흔들었다.

“오빠!”

바로 야율선이었다.

“히익! 쟤가 어찌…….”

야율황기는 야율선을 보자 얼굴이 흙빛이 되어 탁자 아래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 커다란 몸집이 다 숨겨질 리 만무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 어머! 대공자님도 있었네. 호호호.”

눈에 쌍심지를 켜고 탁자로 다가오던 야율선이 마현을 보자 금세 표정이 돌변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활짝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야율 소저.”

마현은 야율선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녀와 함께 올라온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인사를 건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마현은 순간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린은 마현을 보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현의 얼굴에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는 자신을 향해 있었다.

콩닥거리던 심장은 두근두근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더불어 양 볼이 살짝 뜨거워졌다.

홍조였으리라.

‘어머!’

그 느낌에 설린은 어찌할 바를 몰라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렸다.

그렇게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마현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어쩌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도 웃어야 하나?’

짧은 순간 숱한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마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가슴은 꽝꽝 귀청을 울리며 더욱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오랜…….”

설린은 한 손을 가슴 위로 살포시 올리며 허리를 살짝 숙이려 했다.

하지만 그 인사는 전해지지 않았다. 마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순간 설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런 그녀의 귀에 마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아! 정이 맞지?”

설린은 고개를 돌렸다.

마현은 자신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온 무당파 제자 앞에 서 있었다.

“현? 마현이야?”

둘은 서로의 눈빛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없이 애정이 담긴…… 부드러운 그런 눈빛이었다.

마현이 손정, 이제는 학성이란 도호로 불리는 친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잘 지냈냐?”

그리고 이번에는 학성이 마현의 가슴을 툭 쳤다.

“너는?”

그렇게 다시 눈빛을 주고받은 둘은 억세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두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갈 정도로, 설린의 가슴이 다시 쿵쾅쿵쾅 뛸 정도로.

잠시 끌어안았던 둘이 떨어졌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함께 온 이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도저히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둘일 텐데, 그들 사이가 이 세상 누구보다 친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의문에 찬 표정을 지을 때 학방의 얼굴은 조금씩 어두워지더니 종국에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린은 마음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마현이 끌어안고 있는 학성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 * *

마휴당으로 온 허진은 경비를 서고 있는 수마대원의 군례를 받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에 계시느냐?”

“예, 부교주님.”

문이 열리고 허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휴당 안에는 사공소 외에 군사 율기와 마의당주 가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교주 왔는가?”

“어디 편찮으십니까?”

웃통을 드러낸 사공소의 몸 곳곳에 은침이 꽂혀 있었고, 가릉은 그런 사공소의 손목을 진맥하고 있었다.

“아니네, 요 근래 몸이 좀 찌뿌드드하고 자주 피로를 느껴서 말이야.”

별일 아니라는 듯 사공소는 한 손을 들어 휘저었다.

“앉지.”

사공소는 맞은편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허진이 의자에 앉을 때쯤 가릉이 손을 떼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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