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22화
“혹 어디 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율기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휴우, 다행군요.”
율기는 안도감 어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릉은 사공소 뒤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침을 뽑았다.
“율 군사, 그것 보게. 내 별일 아닐 것이라 했지? 그냥 나이를 먹으니 그런 것일 거야. 안 그런가, 가 당주?”
사공소는 율기에게 슬쩍 핀잔을 주며 가릉에게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 물었다.
“소신 역시 그리 생각하옵니다.”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었기에 가릉 역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단지 노환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면도 없지 않았다. 양민들이야 환갑이면 장수하는 나이지만 화경 이상의 고수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하지만 이제 사공소도 슬슬 노환을 걱정할 때가 된 것도 사실이다.
사람마다, 체질마다 다른 것이니 어쩌면 노환일 수도 있을 거라고 가릉은 결론을 내렸다.
“거 봐, 내 말이 맞대도.”
사공소는 어깨를 손으로 몇 번 주무르고는 상의를 다시 입었다.
율기가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일 때 시녀가 쟁반에 차 한 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또 생맥산차인가?”
사공소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피로를 푸는 데에는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교주님.”
율기는 시녀가 가져온 찻잔을 들어 사공소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서 가릉을 향해 슬쩍 눈치를 보냈다.
“소신 생각에도 득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릉 역시 생맥산차가 사공소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율기를 거들었다. 사실 율기가 생맥산차를 주기적으로 바치게 된 것도 가릉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율기는 사공소가 피곤해하는 것 같다며 몸에 좋은 차를 권해달라고 했었다. 그때 가릉이 권한 것이 바로 지금 사공소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시는 생맥산차였던 것이다.
“크으!”
사공소는 쓴소리를 내며 비운 찻잔을 율기에게 넘겼다. 그것을 공손히 받는 율기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비틀어진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는 평소의 깐깐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보고할 것이 있다고?”
“소소한 몇 가지들입니다. 내일 오전 대전회의 때 올리려다가 마휴당으로 오는 김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가?”
사공소는 그사이 새로 내온 용정차로 입안을 헹구며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섬서 장안에 천마군림보 등장이라……, 후후후.”
사공소는 보고서를 읽으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천마군림보요?”
허진은 그 말에 놀라 눈만 껌뻑거렸다.
“뭘 그리 놀라나? 그 천마군림보를 대공자가 시전했다는데…….”
“예? 현이가 말입니까?”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마현은 교주의 독문무공인 천마신공을 물려받지 않았으니까.
“뭐 천마군림보처럼 보이는 보법 중 하나겠지.”
사공소의 말에 허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부교주, 자네 무공 중에 천마군림보 같은 공보(攻步)가 있나?”
“그건 교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본교에 천마군림보 같은 공보가 있었나?”
사공소는 뺨을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없습니다, 교주님.”
율기가 그런 사공소를 보며 대답했다.
“소신이 알기에 공보는 천하에 천마군림보밖에 없습니다.”
“그래?”
사공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무재(武才)는 무재라는 소리인가?”
사공소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부교주.”
“예, 교주님.”
대답하는 허진의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천마군림보로 뭘 했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청성파 제자들을 눌렀다는군.”
사공소의 말에 허진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재미있어. 사천성에서도 한바탕 하더니 화산파 바로 지척인 장안에서도 한바탕이라……, 간이 큰 건지 겁이 없는 건지, 후후후.”
그리 말해도 사공소 역시 흡족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배포가 큰 것이겠지요.”
그렇게 대답하는 허진의 입가에 어린 미소도 사공소의 미소에 지지 않을 정도로 흐뭇해 보였다. 사공소는 그런 허진을 향해 낯을 살짝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리 좋은가?”
“좋습니다.”
“팔불출이 따로 없구먼……, 쯧쯧쯧.”
사공소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허진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돌았다.
급기야 사공소는 고개를 내저으며 보고서를 율기에게 넘겼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유쾌한 보고서군.”
“감사합니다, 교주님.”
“수고했네.”
사공소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한쪽으로 물러나 있는 가릉을 보며 다시 한 번 혀를 또 찼다.
가릉 역시 늙고 주름진 얼굴에 한껏 자글자글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본 것이다.
“가 당주도 그리 좋은가?”
“헙!”
본능적으로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는 찰나, 가릉은 이곳이 어디임을 상기하며 재빨리 입을 막았다.
“하긴, 가 당주도 대공자 사람이니…….”
“소신은 오로지 교주님의 신하이옵니다.”
가릉은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부교주도 대공자 편, 이거 마휴당에서 내 사람은 율 군사뿐이로구먼.”
사공소는 가릉의 그런 모습을 본체만체하며 율기를 쳐다보았다.
율기는 그런 사공소의 행동에 그저 허리만 깊숙이 숙일 뿐이었다.
“다들 나가보게.”
사공소의 축객령에 율기와 가릉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마휴당을 나갔다.
“자네는 안 가나?”
사공소는 여전히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용정차를 마시는 허진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차는 다 마시고 가겠습니다.”
“빨리 본교에 대공자가 오던지 해야지……, 이건 뭐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오니. 부교주 자리가 그리 시간이 많이 남는 자리던가?”
“아무렴 교주님만 하겠습니까?”
“뭐?”
“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마휴당 안에서 오랜만에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휴당을 나서던 가릉은 율기가 그가 총괄하는 마교귀이각(魔敎鬼耳閣)이 아닌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마교귀이각으로 안 가시오?”
“잠시 들릴 곳이 있소이다.”
“그럼 먼저 실례하오.”
가릉은 율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마의당으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가릉의 뒷모습을 보던 율기의 눈동자에서 언뜻 회색빛 귀기가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 * *
학방과 학성이 주루 위로 올라오자 그들과 안면이 있던 남궁혁 일행이 인사를 건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남궁방이 제갈문의 어깨를 툭 치며 턱으로 최상층으로 올라오는 설린을 눈으로 가리켰다.
“누구지? 무림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나?”
둘 모두 혈기 왕성한 나이인지라 설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북해빙궁의 빙화인 모양이다.”
남궁혁은 설린의 뒤에서 그녀를 조용히 호위하는 설영대주 곤오를 보며 말했다.
“천하일색이라고 하더니 역시 그 말이 오히려 부족한 듯하군.”
남궁혁의 말에 제갈문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맞습니다. 숨이 멎을 듯 아름답습니다.”
“제갈 누이, 인사하러 가야지.”
설린의 외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둘을 보며 남궁혁이 제갈영영에게 말했다.
“그래요.”
“너희도 그만 침 흘리고 가자.”
그렇게 넷은 설린과 학방을 비롯한 후기지수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어정쩡한 모습으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바로 마현과 학성 때문이었다.
“학성 도인이랑 있는 저 서생…….”
남궁혁이 어디서 본 듯한 이라 생각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
그때 제갈영영이 무릎을 딱 쳤다.
“무당파에서.”
“아! 그 서생.”
제갈영영의 말에 모두들 마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원래 학성 도인이랑 알던 사이인 모양이군.”
달리 추측할 길도 없었기에 남궁혁의 말에 제갈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과 달리 남궁방과 제갈문은 여전히 설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하자, 네 사람은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남궁혁은 개인이 아닌 전체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아, 남궁 소협.”
걸개아가 남궁혁을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몇 마디 인사가 오갔다. 그 후 남궁혁은 처음 보는 설린에게로 걸어가 포권을 취했다.
“남궁혁이라고 합니다.”
남궁혁이 인사를 하자 남궁방과 제갈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으로 붙으며 포권을 취했다.
“남궁방입니다.”
“제갈가의 문이라고 합니다.”
그 둘은 최대한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설린이라고 합니다.”
“아! 익히 그 이…….”
남궁방이 금세 아는 척을 하려했지만 설린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보통 여인이었다면 오만방자하고 예의가 없다고 여겼겠지만 남궁방과 제갈문은 결코 설린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빙화라고 하더니……, 별호가 딱 맞군.”
“어느 정도의 도도함은 흠이 안 되지.”
죽이 척척 맞는 둘의 말을 들으며 남궁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남궁방은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이고, 제갈문 역시 이제 처남이 될 사이가 아니던가.
남궁혁은 둘을 위해서라도 합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 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곧 화산파에서 다시 만날 각 문파의 후기지수일뿐만 아니라 대부분 익히 아는 이들이었다. 합석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아니 그렇게 되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저는 따로 앉을까 합니다.”
마현이었다.
“그러시오.”
남궁혁은 마현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쉽게 대답했다.
“따로 자리를 잡아두었으니 한 잔 하자.”
마현의 말에 학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도도 실례하겠습니다.”
학성의 반응도 어느 정도 예견했다.
물론 학성과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화산파로 오기 전에 무당파에 먼저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단 설린과의 합석이 목적이었다.
마현과 학성은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벗어나 야율황기와 야율선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자, 그럼 저희가 잡아놓은…….”
남궁혁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탁자 쪽으로 길을 텄다.
그런데, 설린이 그냥 몸을 돌리더니 마현과 학성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빈도도 실례하겠소.”
이번에는 학방이었다. 그래, 학방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학성과 한 동문이니까. 그런데 이어 들려온 소리들이 남궁혁 일행을 얼어붙게 했다.
“당 모도 실례하겠소.”
“험험.”
당화평과 걸개아도, 그리고 뒤늦게 올라온 냉천휘도, 모두 마현과 학성이 앉아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 버린 것이다.
당혹감과 황당함에 남궁혁의 인상이 순간 일그러졌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던가?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다. 한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남궁혁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마현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자세히 살피니 은연중 모두가 마현을 중심으로 모인 듯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두 동생을 위해 남궁혁은 어쩔 수 없이 일행을 이끌고 다가가 합석했다.
남궁방과 제갈문 역시 자존심이 살짝 상했지만 설린 때문이라고 자위하며 남궁혁과 제갈영영을 따라 자리에 합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