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23화
애초의 계획대로 분위기를 휘어잡지 못했지만 그 둘은 금세 분위기를 이끌며 설린의 시선을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차 남궁방과 제갈문의 눈에 그제야 야율황기와 야율선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둘의 눈이 다시 한 번 반짝였다.
야율선은 설린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눈이 호강하는구나.’
단순히 호강으로 끝내기는 아쉬웠다.
환심을 사고, 가까워지고 싶었다.
남궁방과 제갈문은 마음이 통했는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신 있었다. 얼굴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았고, 그를 뒷받침해 줄 힘 있는 가문도 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을 두고 둘이 싸울 일도 없어졌다.
설린이나 야율선이나 그들은 누구라도 좋았다. 그녀들의 미모는 누가 더 낫다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미색의 성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남궁방과 제갈문이 서로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탁자에 인원이 늘어나자 야율황기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뭔 놈의 수가 이리 많아?”
안 그래도 조금 전 귀가 따갑도록 야율선의 잔소리를 들어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갑자기 자리가 들썩이자 신경질이 난 것이다.
야율황기를 아는 몇몇이 그런 그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남궁혁은 달리 받아들였다.
야율황기를 처음 보는데다가 자존심이 몹시 상한 터였다. 뒤늦게 합석한 탓에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미간이 좁아졌다.
남궁혁의 좋지 않은 시선이 야율황기에게로 향했다.
“뭘 봐?”
야율황기는 술잔을 들려다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남궁혁의 눈빛에 직설적으로 툭 쏘아붙였다.
“뭐요?”
그 말을 들은 남궁혁이 참을 리 없었다.
“야율 형, 좋은 자리잖아.”
마현에게 있어 지금 이 자리는 기분 좋은 자리다. 험악해지는 것은 싫었다.
“뭐, 마 형이 그리 말한다면야.”
하지만 야율황기는 남궁혁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마현은 야율황기를 대신해 남궁혁에게 사과했다.
“크흠!”
남궁혁은 못마땅한 신음을 흘리며 마현의 그 사과를 흘려들었다. 그 모습에 다시 야율황기가 발끈하려는 찰나, 마현이 손을 뻗어 말렸다.
“근데, 마 형.”
“……?”
“섭섭하게 왜 이래. 소개시켜 줘야지.”
야율황기가 학성을 가리켰다.
“아, 정아. 아니 이제 학성이지?”
마현의 말에 학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무당파의 학성. 그리고 이쪽은 남만야수궁의 야율황기 소궁주.”
비록 시선은 외면하고 있었지만 마현의 소개에 남궁혁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결코 자신이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서생처럼 보이는 자와 함께 있기에 낭인이거나 어디 중소문파 출신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남궁혁으로서는 왠지 일진이 꼬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학성이라고 합니다.”
“야율황기요.”
자신을 소개하며 야율황기는 잠시 학성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가를 실룩거렸다. 뭔가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에잇, 뭐 마 형 친구니, 그냥 말 놔도 돼. 아, 물론 나도 놓고.”
그 너무나 빠른 진도에 학성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 공자님, 저는 왜 소개 안 시켜주나요?”
“학성입니다.”
“야율선이예요.”
학성의 소개에 야율선은 활짝 눈웃음을 치며 인사를 건넸다.
“저는 남궁방입니다.”
“제갈문입니다. 반갑습니다, 야율 소저.”
그사이에 남궁방과 제갈문이 끼어들었다.
“반가워요.”
야율선은 그 둘에게도 밝게 인사를 건넸다.
“남만에서…….”
제갈문이 재빨리 야율선의 인사를 받으며 말을 걸었지만 야율선은 바로 고개를 돌려 마현과 학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 공자님. 근데 어떻게 두 분이 아는 사이세요?”
야율선의 질문에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마현에게로 모였다.
그녀가 한 질문이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혁을 비롯한 일행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남궁방과 제갈문은 더했다.
어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서생 하나가 좌중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특히 야율선도, 설린도 마현만 보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그저 어릴 적 친우입니다.”
마현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학성을 바라봤다.
“그게 다예요?”
야율선은 실망한 투로 다시 물었다.
“현이는 제 목숨보다 소중한…….”
학성이 마현 대신 대답했다.
“친우입니다.”
마현이 그런 학성의 말을 이어받았다.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잘 지냈어?”
“보다시피.”
학성의 질문에 마현은 비단으로 지어진 옷을 가리켰다.
“너는?”
“나도.”
몇 년 만에 만났지만 그게 다였다.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서로의 눈만 봐도 그냥 알 것 같았다.
“한 잔 할까?”
마현이 잔을 들었다.
학성 역시 잔을 들었다.
챙!
잔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탁자 위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둘은 서로를 보며 다시 한 번 웃은 뒤 술잔을 들어 단숨에 삼켰다.
“설 소저?”
남궁방은 슬그머니 설린을 불렀다. 그 부름에 설린이 고개를 돌려 남궁방을 쳐다보았다.
“언제 한 번 남궁가에 방문해 주십시오. 이 남궁 모가 근사하게 대접하겠습니다.”
난데없는 초대에 설린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그녀였다.
마현 옆에 앉았건만 그는 한 번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니, 아직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은 차가워졌다. 그런 상태에서 남궁방이 실없이 치근거리니 당연히 냉기가 풀풀 풍길 만도 했다.
설린은 남궁방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시선을 마현에게로 옮겼다.
그런 그녀의 눈에 마현의 비어 있는 술잔이 들어왔다.
설린은 손을 뻗어 술병을 들었다. 술을 따르며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자 한 것이다.
“술잔이 비었네요.”
“아, 고맙소.”
마현은 당연하다는 듯 술잔을 들어올렸고, 설린은 조심스레 술을 따랐다. 하지만 마현은 술잔을 받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 것이 다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학성에게로 돌아갔다.
설린의 눈 끝에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물기가 맺혔다.
미웠다.
그 순간 마현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마 공자님.』
설린은 차가워진 음성으로 마현을 전음으로 불렀다.
이런 자리에 전음이 들려오자 이상하다 여기며 마현이 그제야 설린에게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마 공자님은 참으로 무심하군요.』
“……?”
『제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이럴 거면 반지는 왜 주신 건가요?』
설린은 그만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마현을 차갑게 노려보더니 홱 몸을 돌려 주루를 내려가 버렸다.
“서, 설 사저.”
설린의 그런 갑작스런 행동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냉천휘가 당황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설린과 냉천휘가 그리 자리를 뜨자 분위기는 한순간 싸하게 식어 버렸다.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설린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궁방이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며 마현을 노려보았다.
쾅!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남궁방은 노골적으로 마현을 압박해 들어갔다.
“도대체 설 소저에게 무슨 무례를 저질렀기에 그녀가 저리 화가 나서 간단 말이오!”
“맞소! 어서 냉큼 사과하고 그녀를 모셔 오시오!”
제갈문도 소리치며 남궁방을 거들었다.
남궁혁과 제갈영영 또한 말은 하지 않았으나 거의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은근히 기세를 일으켜 마현에게로 쏘아 보냈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학성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무리 그들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는 하나 마현만큼 소중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야율선의 웃음이 먼저 터졌다.
“깔깔깔.”
야율선의 웃음으로 인해 순간 제갈문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야율황기도, 야율선도, 걸개아도, 학방도, 다들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이라면 유생의를 입은 서생을 측은하게 바라보던가, 아니면 그를 보호하려 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청성파가 셀까? 아님 여기 계신 네 분이 셀까?”
야율선은 탁자 위에 손을 얹어 턱을 괴고는 마현과 남궁혁 일행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청성파?’
남궁혁 일행은 뜬금없는 청성파 얘기에 더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설린을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이 주루로 올라오기 전에 그들이 나누던, 마교 대공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 설마?’
일행이 놀란 얼굴로 설마 하고 있을 때 야율선이 직접 나서며 정리해 주었다.
“마 공자님, 천마군림보를 선보이셨다고요?”
그 말에 네 사람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졌다. 낯빛 역시 흑빛으로 바뀌었다.
“교주님의 진전을 이어받으신 건가요?”
야율선의 질문에 마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기색으로 학성을 바라봤다. 학성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마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친하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무거운 그 무엇이 둘 사이에 끼었다.
갑작스런 변화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학성을 쳐다보던 마현이 잠시지만 남궁혁 일행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다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싸늘한 마현의 눈동자에서 발산되는 무형의 기운에 온몸이 짓이겨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마현은 다시 학성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런 마현을 보는 학성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곧 침착함을 찾았다.
학성의 머릿속에 어릴 때 사천성 어느 담벼락에서 주고받던 말들이 떠올랐다.
“신?”
“그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은 누구지? 또 그들을 모시는 사제들은 있어? 신성력(神聖力)이나 마성력(魔聖力)은 사용해? 신전은?”
“자, 잠깐. 하나씩만 질문해.”
“…….”
“뭐부터 물었지? 아!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 부처님이나 천존님을 말하는 거야?”
“혹 부처님과 천존님이 빛의 신이야, 아니면 어둠의 신이야?”
“몰라.”
“그럼 부처님이나 천존님이 죽음이나 파괴, 혹은 전쟁 같은 것을 추구해?”
“아니.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건 아닐 거야. 혹 현아, 마신(魔神)에 대해 물어보는 거야? 마신이라면 일단 마교의 상징인 아수라신이 있어.”
“그렇구나.”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마법사!”
“……?”
“마법사 중에 오로지 전쟁과 전투에만 미친 마법사들이 있어. 바로 흑마법사! 나는 바로 흑마법사가 될 거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좋은 거겠지?”
학성은 왜 미처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한탄스러웠다.
머리가 복잡했다.
마현을 바라보는 학성의 머릿속에 스승과 사숙, 사형, 사질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무당파는 이제 자신과 하나다. 무당파는 정파 무림의 양대 기둥이라 일컬어진다. 자신은 그런 곳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기억이 또다시 떠올랐다.
“정아.”
“으, 응?”
“우리 친구 맞지?”
“어. 넌 내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야.”
“나도.”
학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벌을 내리시면 받겠습니다. 떠나라면 떠나겠습니다. 제자는 차마 친우를 버릴 수 없습니다.’
학성은 눈을 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마현이 보였다.
학성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그려졌다. 그 웃음에 마현의 표정도 풀리며 학성을 따라 조금씩 미소가 짙어졌다.